제2부: 길 위에서 길을 찾다

제4장. 다시, 흙으로 돌아와 길을 묻다

by 조영빈

제4장. 다시, 흙으로 돌아와 길을 묻다

도시의 비즈니스 세계를 통과하는 나의 길고 험난했던 여정은, 역설적이게도 나를 다시 흙의 세계로 이끌었다. IGM에서 배운 ‘가치관 경영’이라는 새로운 나침반과 ‘농업경영컨설팅협회’를 세우며 만난 동지들은, 내게 새로운 사명을 안겨주었다. 그것은 내가 지난 수십 년간 도시의 현장에서 배우고 익혔던 경영의 언어와 신뢰의 철학을, 이 땅의 뿌리인 농업에 접목하는 일이었다.


나는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전국의 밭과 논으로 향했다. ‘강소농(强小農)’. 작지만 강한 농업인, 그들의 곁에서 나는 내가 가진 지식과 경험을 나누는 훌륭한 조력자가 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나는 가르치기 위해,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 그리고 변화를 이끌기 위해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땅은, 그리고 땅의 사람들은 내게 전혀 다른 가르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전문가라고 생각했지만, 흙먼지 날리는 현장에서 보잘것없는 이방인에 불과했다. 나는 내가 스승이라 믿었지만, 흙으로 다져진 손마디와 계절의 흐름을 꿰뚫는 농부들의 지혜 앞에서 나는 겸손한 학생이 되어야 했다.


이 장은 내가 가르치기 위해 떠났다가,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돌아온 여정에 대한 기록이다. 전국의 강소농들이 땀과 눈물로 일군 흙 위에서, 나는 책이 알려주지 못한 진짜 생명의 질서를, 그리고 교실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었던 삶의 철학을 배웠다. 그러나 동시에, 그 눈부신 성공의 이면에서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거대한 벽과 마주하게 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 벽은 결국, 나를 또다시 낯선 땅으로 이끄는 새로운 질문의 시작이 되었다.


1. 강소농 현장에서 배운 지혜


치유농장을 구상하고 실천해 나가는 지금의 내 삶에, 책으로 배운 이론만큼이나 강한 영향을 준 것이 있다면 바로 현장에서 만난 농부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였다. 그들의 말은 때론 투박했고, 때론 농담처럼 들렸지만, 그 안에는 흙을 살아낸 시간만큼 깊이 있는 지혜가 담겨 있었다. 그 지혜의 조각들은 흩어져 있던 내 생각들을 하나로 꿰어, 마침내 ‘치유농업’이라는 새로운 길로 나를 이끌었다.


“무슨 선생이야. 그냥 형이라고 해.”

농업 컨설턴트로서 나의 첫 번째 깨달음은, 충북 음성의 한 무궁화 농장에서 시작되었다. 오랜 공직 생활을 마치고 귀농해 수천 평의 땅에 무궁화를 심던 연세 지긋한 농장주. 나는 긴장된 마음으로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며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러자 그분은 내 어깨를 툭 치며 호탕하게 웃으셨다. “무슨 선생이야. 그냥 형이라고 해.” 순간 나는 당황했지만, 그 짧은 한마디에 담긴 따뜻함과 신뢰에 마음의 벽이 허물어지는 것을 느꼈다. 화려한 이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수직적 위계가 아닌 수평적 관계를, 전문가와 고객이 아닌 사람 대 사람의 만남을 택한 것이다. 그날 이후 우리는 나이 차이를 뛰어넘어 ‘형’과 ‘동생’이 되었다. ‘형’이라는 그 한마디는 정장과 명함으로 둘러싸인 나를, 진짜 ‘나’로 만나자는 진심 어린 초대였다. 나는 기꺼이 정장을 벗어 던졌다. 노트북을 덮고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고,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그의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들과 함께 땀 흘리고 막걸리 잔을 부딪치는 동안, 컨설팅은 일이 아닌 삶이 되었다. 진짜 컨설팅이란 무언가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묻고, 같이 짓고, 더불어 기뻐하는 과정 그 자체임을, 나는 흙 위에서 배웠다.


“박사님은 제 생명의 은인입니다.”

‘형’이라는 부름이 내 자세를 바꾸었다면, 천안의 한 포도 농장주가 건넨 이 말은 내 일의 무게와 의미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컴퓨터 자판조차 서툴렀던 그는, 오랜 관행에만 의존해 농사를 짓다 한계에 부딪힌 상태였다. 그러다 우연히 내 강의를 듣고, 그중 한두 가지 아이디어를 농장에 적용해 큰 성과를 거두었다며 내 손을 붙잡고 말했다. “박사님은 제 생명의 은인입니다.” 나는 순간 멍해졌다. 강의 중 스치듯 던진 한 문장이, 누군가에게는 절망의 끝에서 만난 동아줄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강의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행위가 아니었다. 한 사람의 인생이 걸린 ‘삶의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건네는, 무겁고도 신성한 일이었다. 그 농부의 진심 어린 한마디는 내가 지금도 현장에 서는 이유이며, 치유농업을 통해 더 많은 이들에게 ‘전환의 순간’을 선물하고 싶은 가장 큰 동기가 되었다.


“농사가 아니라 농업 경영입니다.”

현장을 누비며 나는 농부들이 단순한 생산자가 아님을 깨달았다. 특히 앞서나가는 강소농일수록 그들은 치열한 경영자이자 고독한 철학자들이었다. 한 포도 농장 대표는 내게 단호하게 말했다. “박사님, 이제 농사가 아니라 농업 경영입니다. 농부는 농사꾼이 아니라 농장의 CEO예요.” 그 말은 내 머리를 강하게 울렸다.

오늘날 농업은 단순히 씨 뿌리고 거두는 일로 끝나지 않는다. 생산, 가공, 유통, 브랜딩, 고객 관리까지 포괄하는 총체적인 ‘경영’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직시하라는 외침이었다. 나는 이 깨달음을 바탕으로 강의 때마다 외친다. “여러분은 이제 농부가 아니라, 농장의 CEO입니다.” 한 사람의 농부가 자신의 밭을 경영의 시야로 바라보기 시작할 때, 비로소 진정한 변화는 시작된다.


“아까징키 색깔이 새빨간데 무슨 흑자요.”

물론 모든 농가가 CEO 마인드를 갖춘 것은 아니었다. 한번은 강의 중에 농장 결산을 강조하자, 한 농업인이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아까징키(머큐로크롬) 색깔이 새빨간데 무슨 흑자요. 적자가 줄줄 새는데 결산이 무슨 소용입니까?” 그 한마디에는 ‘장부를 써도 현실은 나아지지 않는다’는 깊은 체념과 무력감이 배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럴수록 더더욱 장부를 써야 한다고 역설했다. 적자일수록 흐름을 보고, 방향을 바로잡는 경영의 첫걸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훗날 그 딸기 농장주는 간단한 수입·지출 분석을 통해 처음으로 ‘흑자’를 경험했고,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아까징키는 여전히 새빨갛지만, 이젠 제 농장 통장은 조금씩 푸르게 변해가고 있습니다.” 그 말은 내게 ‘새빨간’ 현실 속에서도 숫자와 기록을 통해 회복의 단서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르쳐 주었다.


“마을이 발전하려면 미친놈 두 놈은 있어야 돼.”

전남 장성의 한 산촌 마을 어르신은 내게 공동체 변화의 핵심을 꿰뚫는 한마디를 던졌다. “마을이 발전하려면 미친놈 두 놈은 있어야 돼. 혼자 설치면 손가락질하지만, 둘이 같이 설쳐대면 ‘뭐가 있나보다’ 하고 관심을 갖거든.” 조직과 공동체의 변화는 언제나 소수의 열정 있는 사람들로부터 시작되며, 그들이 ‘하나’가 아닌 ‘둘’ 이상으로 연결될 때 비로소 운동이 된다는 통찰이었다. 혼자만의 이상은 공허하지만, 둘이 되면 동지가 생기고, 셋이 모이면 기획이 시작되며, 다섯이 손을 맞잡는 순간 기적이 일어난다. 이 가르침은 훗날 내가 치유농장을 개인의 농장이 아닌, 지역과 함께하는 ‘공동체 케어팜’으로 설계하는 가장 강력한 교훈이 되었다.


“착한 생산자와 착한 소비자가 함께 착한 세상을 만들어 갑니다.”

결국 모든 지혜는 하나의 질문으로 모였다. 우리는 어떤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가? 나는 내가 설립한 농업회사법인의 이름처럼, ‘착한 세상’을 꿈꾼다. 그것은 단순히 인증 마크가 붙은 유기농산물이 넘쳐나는 세상이 아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정직하게 농사짓는 생산자의 양심과, 그 진심을 알아주고 기꺼이 제값을 지불하는 소비자의 존중이 만나는 세상이다. 인증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 사이의 믿음이다. 이 믿음이 살아있는 관계야말로 농업이 단순한 산업을 넘어, 사람과 사람을 잇는 생명의 문화가 되도록 만드는 시작점이다. 나는 농부들의 목소리를 통해, 내가 궁극적으로 일궈야 할 것이 단순한 농장이 아니라, 바로 이 ‘신뢰의 흙’임을 깨달았다.

2. 눈부신 성취, 그러나 보이지 않는 벽


우리는 함께 땀 흘렸고, 함께 많은 것을 이루었다. 컨설팅을 통해 만난 농부들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피어났고, 텅 비었던 통장에는 숫자가 채워졌다. 그들은 더 이상 흙먼지 묻은 농사꾼이 아니라, 자신의 농장을 왕국처럼 일구는 당당한 경영자로 우뚝 섰다.


농가 소득이 늘었다는 기쁜 소식이 여기저기서 들려왔고, 그들의 환한 웃음 속에서 나는 대한민국 농업의 희망을 보고 있다고 굳게 믿었다. 성공의 단맛은 달콤했고, 보람은 가슴 벅찼다. 그러나 그 눈부신 성취의 빛이 밝아질수록, 그 뒤편으로 드리워지는 짙은 그림자 또한 외면할 수 없었다. 시대가 변하고 있었다. 농업을 둘러싼 환경은 우리가 쌓아 올린 작은 성공의 성곽을 위협하는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왔다. 기후 위기는 예측 불가능한 폭우와 가뭄을 일상으로 만들었고, 평생의 노하우가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는 농부들의 주름은 깊어졌다. 거침없이 밀려드는 시장 개방의 파도는 가격 경쟁을 부추겼고, 농촌의 고령화는 마을의 불빛을 하나둘 꺼뜨리고 있었다.

나는 보았다. 우리가 이룬 ‘개인의 성공’이라는 성이 이 거대한 파도 앞에서 얼마나 위태로운지를. 그 성공은 철저히 한 사람의 비범한 역량과 밤낮없는 희생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성공한 농부의 어깨는 더욱 무거워졌고, 번아웃으로 쓰러지는 이들도 생겨났다. 무엇보다 가슴 아팠던 것은, ‘어떻게 더 잘 팔 것인가’에 몰두할수록 어제의 이웃이 오늘의 경쟁자가 되어가는 현실이었다. 한 사람의 영웅이 마을의 이름을 알릴 수는 있어도, 마을 전체가 함께 행복해지는 공동체를 만들기는 어렵다는 명백한 한계. 성공의 과실이 이웃과 지역으로 흘러넘치는 ‘선순환’의 고리는 너무나 약했고, 오히려 성공이 깊어질수록 농장과 농장 사이의 보이지 않는 담벼락은 더 높아져만 갔다.


나의 고민은 내가 그토록 신봉했던 ‘강소농’ 모델 자체의 한계로 이어졌다. 개인의 역량을 극대화하고 소득을 높이는 데는 성공했지만, 거대한 위기 앞에서 서로를 보듬고 함께 일어서는 공동체의 회복력을 키우는 데는 명백히 부족했다. 이것이 과연 지속가능한 농업의 미래일까? 농업이 단지 돈을 버는 치열한 전쟁터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고, 지친 이들을 보듬는 따뜻한 ‘치유’의 장이 될 수는 없을까?


강소농 현장에서 얻은 깊은 행복과 보람은 역설적으로 나를 더 크고 근원적인 갈증으로 이끌었다. 나는 ‘더 강한 개인’을 넘어 ‘더 따뜻하고 회복력 있는 공동체’를 만드는 농업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한국의 현장에서는 그 답을 찾기 어려웠다. 나는 시선을 밖으로 돌려야만 했다. 어쩌면 아주 다른 철학 위에서, 이윤이 아닌 사람을 남기고, 경쟁이 아닌 협력을 통해 공동체를 일구는 사람들이 세상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그렇게 나의 마음은 간절한 희망을 품고 유럽을 향했다. 그곳에 가면 내가 마주한 이 거대한 질문에 대한 작은 실마리라도 얻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이것은 성공 사례를 배우러 가는 단순한 견학이 아니었다. 우리가 마주한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우리 농촌이 잃어버린 가치를 되찾기 위해, 그리고 내가 앞으로 만들어가야 할 삶의 본질을 찾아 떠나는 새로운 순례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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