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나의 길을 찾아서, 컨설턴트가 되다
3. 재도전과 프리에이전트의 시작
그린화재에서 경영지원 본부장으로서 보낸 2년은 파란만장이라는 말이 부족할 만큼의 시간이었다. 회사로 복귀하면서 나는 또다시 학구열에 불을 지펴 성균관대학교 경영전문대학원 박사과정에 등록했다. 물론, 회사의 경영지원 본부장이라는 중책을 맡으면서 박사 과정을 겸하는 것은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았다. 어느 날 사장님이 농담처럼 툭 던진 말이 그 상황을 대변해 주었다. "기획 담당 임원이 공부할 시간이 있을까?" 그 말처럼 업무와 학업을 병행하는 것은 버거웠지만, 배움에 대한 갈증은 나를 멈추지 않게 했다.
이러한 개인적인 도전과 별개로, 회사 내 상황은 더욱 예측하기 어려웠다. 대주주가 바뀌는 과정에서 조직은 끊임없이 흔들렸고, 그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한없이 작았다. 임원이라는 직함은 그저 명패에 불과했고, 하루하루 쌓여가는 무력감 속에서 나는 내 역량의 한계를 직시했다. "누군가 나에게 그만두라고 말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나는 지쳐 있었다
임기를 며칠 앞둔 저녁, 인사 담당 임원이 조용히 나를 불렀다. 해직 통보를 받는 순간, 가슴 한편이 서늘했지만 이내 설명하기 힘든 해방감이 온몸을 감쌌다. 마침내 꽉 조여 있던 끈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회사 건물을 나서자마자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회사 그만뒀어.” 잠시의 침묵 뒤, 돌아온 아내의 대답은 뜻밖에도 담담했다. “그래, 잘했어.” 그 한마디에 그간의 모든 스트레스가 눈 녹듯 사라지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그날 집으로 바로 들어가지 못했다. 해방감과 허무함이 뒤섞인 채 발걸음은 정처 없었고, 결국 조용한 술집에 들어가 홀로 잔을 기울였다. 술잔에 비친 낯선 내 얼굴 위로, 고졸 사원으로 시작해 주경야독으로 버텼던 청춘, 그리고 조직을 가족이라 믿으며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지난 세월이 겹쳐 보였다.
나는 오랫동안 회사를 짝사랑해왔다. 그러나 조직은 끝내 조직일 뿐, 나는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부품에 지나지 않았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술잔을 비우며 나는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조직을 짝사랑하지 말고, 이제는 너의 길을 걸어라.” 그날 밤, 나는 비로소 완전한 자유인이 되었다. 자유인이 되었지만, 내 마음을 채운 것은 첫 퇴직 때 느꼈던 해방감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5년이라는 세월이 더 흐른 뒤였고,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다시 취업 시장에 나선다는 것은 막막한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깊은 고민에 빠져 있던 그때, 내 마음속에 문득 아이오와의 한적한 풍경과, 따뜻한 미소로 나를 맞아주었던 로타리안 호스트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곳은 내 삶의 가치관을 바꾸어 놓은 전환점이자, 언제나 돌아가고 싶은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었다. 나는 염치를 무릅쓰고 그동안 서신을 주고 받았던 메인 호스트에게 연락해 나의 상황을 설명하고 다시 찾아가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잠시 후 돌아온 그의 대답은 기적과도 같았다. 그는 10여 년 전의 호스트들에게 모두 연락을 취했고, 그들은 모두 두 팔 벌려 나를 다시 맞아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다시 한번 아이오와에서 꿈같은 한 달을 보냈다. 10여 년 전과 거의 같은 분들의 집에서, 나는 더 이상 어리고 긴장했던 청년이 아니라 오랜 친구이자 아들처럼 편안한 시간을 보냈다. 그들의 변함없는 환대와 따뜻한 위로 속에서, 나는 막막했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내려놓고 다시 나아갈 힘을 얻었다. 물론, 내가 그렇게 꿈같은 시간을 보내는 동안 한국에 남아 나를 기다려야 했던 아내와 가족들은 얼마나 많은 걱정을 했을지, 철없던 나는 훗날에야 깨닫게 되었다. 그들의 고마움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바로 그 시기, 나의 다음 길을 열어줄 또 다른 운명적인 만남이 찾아왔다. 과거 컨설팅 회사에서 일할 때 알게 된 한 서치펌 대표가 마침 미국에 와 있었고, 그와의 만남에서 ‘미국과 한국을 잇는 인재 서치펌’이라는 새로운 사업 구상을 듣게 된 것이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한다’는 그 비전은 내 마음을 강하게 흔들었고, 훗날 내 회사가 될 ‘넥서스브레인컨설팅’의 첫 번째 씨앗이 되었다.
귀국 후, 나는 서두르지 않았다. 먼저 박사과정 선배가 운영하는 콜센터에서 잠시 일하며 숨을 골랐고, 마침내 오랜 시간 매달려왔던 박사학위 논문 심사를 무사히 마쳤다. 비로소 내 이름 앞에 ‘박사’라는 무게를 더했을 때, 나는 준비가 되었음을 느꼈다. 마침내 나는 ‘넥서스브레인컨설팅’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내 인생의 첫 사업을 시작했다. 이 회사는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모든 경험과 철학, 수많은 길을 돌아온 끝에 얻은 깨달음을 담아낸 실천의 장이었다. 특히 회사의 핵심 철학은 나의 박사학위 논문, “보험계약자의 신뢰와 관계몰입에 관한 실증연구”에서 비롯되었다. 나는 논문을 통해 고객의 흔들리지 않는 신뢰란 ‘회사의 공신력, 배려, 정직성’이라는 세 가지 기둥 위에 세워진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리고 이 철학은 그대로 넥서스브레인의 운영 원칙이 되었다. 나의 회사는 단순히 사람을 기계적으로 중개하는 곳이 아니라, 기업과 인재 사이의 깊은 신뢰를 짓는 곳이어야 했다. ‘공신력’은 우리의 전문성이 되었고, ‘배려’는 사람의 삶과 가능성까지 함께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가 되었으며, ‘정직성’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타협할 수 없는 우리의 약속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수많은 길을 돌아 마침내 온전한 ‘프리에이전트’로서, 내 이름과 내 철학으로 세상 앞에 다시 섰다.
‘연결과 관계를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한다’는 비전으로 가슴은 벅찼다. 그러나 설립의 설렘이 채 가시기도 전에, 현실의 벽은 높고도 두꺼웠다. 당시만 해도 서치펌이라는 업종 자체가 낯설었고, 중소기업은 비용 부담 때문에 쉽게 문을 열지 않았다. 대기업들은 이미 굵직한 글로벌 서치펌과 손을 잡고 있었기에, 갓 출발한 작은 회사에 기회를 주는 경우는 드물었다. 사무실은 초라했다. 몇 평 남짓한 공간에 책상 몇 개, 전화기와 팩스가 전부였다. 매일같이 수십 통의 전화를 돌려도 돌아오는 대답은 대부분 냉담한 거절이었다. 나는 그 작은 공간에서 밤을 새우며 프로필을 정리하고, 기업 자료를 분석하며, 언젠가 알아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붙잡고 버텼다. 때로는 하루 종일 뛰어다니며 사람을 만나고, 저녁이면 텅 빈 사무실에 홀로 앉아 불 꺼진 건물의 창밖을 바라보곤 했다.
“내가 과연 이 길을 제대로 선택한 걸까?” 짙은 회의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시행착오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어떤 프로젝트는 막바지 단계에서 클라이언트가 방향을 바꾸는 바람에 수개월의 노력이 허사가 되기도 했고, 어렵게 연결한 인재가 기업과 맞지 않아 처음부터 다시 과정을 밟아야 할 때도 있었다. 때로는 내가 ‘신뢰’라고 믿었던 관계가 단순한 이해관계의 끈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고 깊은 허탈감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그 잿더미 속에서 배웠다. 신뢰는 하루아침에 쌓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 작은 약속 하나를 목숨처럼 지켜내는 일이 결국 회사를 지탱하는 기반이 된다는 것을. 한 건의 성공 뒤에는 수십 번의 실패가 숨어 있었지만, 그 실패들이야말로 넥서스브레인을 단단하게 만드는 돌기둥이 되어주었다. 무엇보다도 초창기의 혹독한 시행착오는 역설적으로 나 스스로의 철학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었다. 사람을 숫자로만 보지 않고, 그 사람의 삶과 가능성까지 함께 바라보는 태도. 기업에는 단순히 ‘인재’를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함께할 ‘동반자’를 찾아주는 일이라는 확신. 그것이야말로 넥서스브레인이 존재해야 할 이유라고 믿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작은 사무실은 내게 두 번째 대학이자 실험실이었다. 실패와 좌절은 매일의 교과서였고, 그 속에서 배운 교훈들은 훗날 더 큰 도약의 밑거름이 되었다. 넥서스브레인의 초창기 도전은 끝없는 시행착오였지만, 바로 그 시행착오 덕분에 나는 논문 속에 잠들어 있던 ‘신뢰’라는 단어를, 비로소 내 삶의 뜨거운 언어로 만들 수 있었다.
4. 가치관경영: 새로운 나의 나침반
2011년 늦가을, 나는 세계경영연구원(IGM)에서 주최한 제1기 지식경영 컨설턴트 과정을 수료했다. 삼성, 제일모직, 효성 등 대기업에서 평생을 바쳤던 퇴직 임원들과 함께 ‘IGM 컨설팅 파트너’라는 새로운 명함을 손에 쥐던 날, 나는 끝이라 생각했던 경력의 길목에서 또 다른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었다. 우리는 ‘퇴직자’가 아닌 ‘다시 꿈꾸는 사람들’이었다.
1년여에 걸친 IGM 프로그램은 단순히 컨설팅 기술을 가르쳐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제는 우리보다 작은 기업, 이 나라의 뿌리 같은 중소기업 CEO들을 돕고 싶다”는 동료들의 진심 속에서, 내 삶의 방향을 되묻는 치열한 성찰의 시간이었다. 특히 그곳에서 배운 ‘가치관 경영’은, 단순히 돈을 버는 것을 넘어 삶의 철학과 가치를 경영의 중심에 두는 방식으로, 넥서스브레인컨설팅의 실패 이후 방향을 잃었던 내게 새로운 나침반이 되어주었다.
바로 그 무렵, 마치 운명처럼 새로운 길이 열렸다. 정부에서 ‘강소농(强小農) 육성사업’이라는 새로운 농업 정책을 막 시작한 것이다.
때마침 나는 몇몇 경영지도사 동기들과 함께 ‘농업경영컨설팅’ 과정을 이수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당시의 교육 내용은 현장의 절박함에 비해 아쉬운 점이 많았다. 쉬는 시간, 답답한 마음에 한 동기가 툭하고 내뱉었다. “이보게들, 우리가 하면 이것보다 더 잘할 수 있겠는데. 우리가 한번 해보자!” 그 한마디는 마른 들판의 불씨 같았다. “맞아!”, “그럽시다!” 여기저기서 많은 동기들이 뜨겁게 동의했다. 우리는 그저 말로만 끝내지 않았다. 그해, 우리는 곧장 뜻을 모아 우리만의 ‘농업경영컨설팅 과정’을 개설했고, 현장의 언어와 실질적인 해법으로 가득 채운 우리의 교육은 놀랍게도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그 성공은 우리에게 더 큰 용기를 주었다. 우리는 그 힘을 모아 ‘(사)농업경영컨설팅협회’라는 사단법인을 설립했다.
당시만 해도 농업 분야에는 ‘경영’이라는 개념 자체가 희박했다. 농사는 신성한 노동이었지만, 체계적인 경영의 대상은 아니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가 설립한 협회는 시대를 앞서가는 중요한 교두보가 되었다. 정부의 ‘강소농 육성사업’을 수행할 전문 조직이 절실했던 상황에서, 우리의 협회는 가장 준비된 파트너였고, 이는 여러 정부 사업을 수주하는 결정적인 발판이 되었다.
이 모든 과정은 나의 회사, 넥서스브레인컨설팅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협회의 성공과 농업 분야에서의 폭발적인 수요를 목격하며, 나는 비로소 내 회사가 나아가야 할 길을 발견했다. 나는 과감하게 회사의 방향을 트는 ‘피벗(Pivot)’을 결심했다. IGM에서 배웠던 가치관 경영이라는 철학적 씨앗이, ‘강소농’이라는 비옥한 토양을 만나 마침내 싹을 틔운 것이다. 그렇게 나의 회사는 도시의 비즈니스 세계를 떠나, 흙냄새와 사람 냄새가 나는 농업·농촌 분야로 그 뿌리를 깊게 내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사업 아이템의 변경이 아니었다. 내 삶의 가치와 회사의 사명이 비로소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다.
[도시에서 흙으로 가는 길]
언뜻 보기에 3장의 이야기는 도시의 직장인이자 컨설턴트로서 보낸 치열한 시간에 대한 기록처럼 보인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이 시기에 겪었던 모든 경험과 깨달음이야말로 훗날 나의 치유농장을 세우는 가장 단단한 주춧돌이 되어주었다. 당시에는 커리어를 쌓는 과정이라 믿었지만, 실은 내 삶의 마지막 과업을 위한 철학과 도구를 하나씩 모으고 있었던 셈이다.
미국 아이오와에서 배운 '공동체의 가치', IMF 격랑 속에서 깨달은 '관계의 힘', 뼈아픈 실패를 통해 체득한 '신뢰의 철학', 그리고 강소농 컨설팅을 통해 마침내 찾은 '나의 밭'. 결국, 도시에서의 그 모든 시간은 흙으로 돌아오기 위한 긴 준비 과정이었다. 나는 그 치열했던 경쟁의 한복판에서, 역설적이게도 사람을 살리고 땅을 살리는 일의 소중함을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