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3시. 오늘의 공부를 끝냈다.
중학생 때부터 틈틈이 일기를 써왔다.
한창 <프린세스 다이어리>가 유행했었는데,
주인공을 따라 한다며 나도 일기장에 온갖 말들을 다 적어온 것이다.
방 정리를 하며 발견한 그 시절의 나는 어쩌면 지금보다 더 많이 나를 알고 있는 듯하다.
이런저런 경험과 시간을 지나 현재의 나는 이런 모습으로 바뀌어 버렸지만
그 본질-무어라고 딱 집어 말할 수 없는 그 무언가는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어쨌든, 종종 그 시절의 나를 기억하며, 또 여전히 그곳에 머물러 있기도 한 나를 바라보며.
새벽 3시. 오늘의 공부를 끝냈다.
의도하지 않게 낮잠을 3시간이나 자버렸던 터라 실질적으로 공부한 시간은 별로 되지 않는다.
그새 겨울이 되어버렸다. 분명히 수요일까지는 더웠는데 비가 한 번 오더니,
가을도 안 오고 바로 겨울이 되어버렸다. 싫다. 가을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학교에서 벌레가 나왔는데 모두가 합심해서 별 짓을 다해 죽여 버렸다.
차라리 한 번에 죽이는 것이 덜 고통스러운 것을... 인간은 역시 잔인하다.
요즘 살아있는 것이나 고통에 대해 부쩍 생각을 하곤 하는데,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어쩌면 큰 행운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
이것저것 느낀 것은 있었던 것 같은데 생각을 하다 보면 끝이 안 난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것이 우주까지 뻗쳐 나가 버리면 답답하다.
내가, 내가 있는 이 시대가 과거가 되어버린다는 것이 너무 신기하고 안 믿겨서.
영원히 이 모습일 것 같은데, 그게 아니니까.
어떻게 하면 현재를 가장 잘 보낼 수 있을지 몰라서.. 슬프다.
하루라도 더 어릴 때를 간직하고 싶다. 공부는 미래를 위한 거지만, 과거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없을까?
아, 일기장이다. 지금이다. 바로 지금.
내일도 아니고, 어제도 아니고 지금이다. 방금의 1초가 과거가 되었다.
그때를 모방할 순 있어도 돌아갈 순 없다.
좀 더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는 시야와 마음가짐을 갖고 싶다.
꼼꼼히 무언의 흔적을, 누군가 깨뜨린 병의 파편이나 지루한 하굣길까지도,
구름의 모습, 친구들, 가족들, 하나하나 되새기면서, 잊지 않도록.
그들의 지나간 시간인 전체의 과거를, 그리고 과거가 될 지금까지도.
긴장되지도 않는데 왠지 손에서 땀이 난다. 너무 조용해서 시곗 소리밖에 안 들린다.
시험기간이라 교과서가 책상 위에 쌓여 있고, 크런키 초콜릿 포장지가 구석에 박혀있다.
완전히 쉬어버린 우유가 뜯기지도 않은 체 책장에 놓여있고,
나는 다리를 굽혀 의자 위에 올리고 앉아 있다.
책장에는 2살, 초등학교 1학년 때 사진이 있고,
오른쪽 벽에는 만화 공연 포스터 5개와 영화 식객 포스터, 그리고 내 미술 작품들이 붙어 있다.
커튼은 반 접어서 내가 묶어놨다.
침대 위에는 티셔츠 2장이 널브러져 있고 방안은 떨어진 머리카락들로 가득하다.
책장에 기타가 기대어 서있고 난 노란색 우리 반 티셔츠를 입고 있다. 내일은 놀토라 학교에 안 간다.
다 기억할 수는 없을까. 평생 다시 돌아오지 않을 지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