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출산과 양육이 가지는 의미
아무도 내게 부모가 되는 건 이런 거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나는 준비 없이 부모가 되었고, ‘부모 역할을 해낸다’는 건 결국
내 일상에서 나를 얼마나 지워낼 수 있는가의 문제였다.
나에게 부모가 되는 것에 대한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은 사실 해주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할 수 없어서 였던 게 분명하다. 그들 역시 준비 없이 맞닥뜨렸을테니까.
엄마라고 불리기 전부터 나보다 약자인 내 팔뚝만한 어린 아이를 돌보기 위해 잠과 제때 끼니 챙기기를 포기하고 심지어 화장실의 그 '일'보기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상을 반복하다보면 그 작던 아이는 입을 열어 말을 하고 걷고 뛰어다니며 스스로 성장한다.
이 시대에서 한 인간의 부모가 되는 것은 근본적인 종족유지를 위한 번식 외에 '나'에게 어떤 의미가 되어야 할까. 단순히(절대 쉽지 않지만) 아이가 장성하도록 보살핀다는 것 말고 그 과정 중 양육자인 나와 배우자의 삶에서 그저 시간과 돈과 체력을 갈아넣어 독립시키는 것 외에 개개인의 삶에서 한 인간을 온전히 독립시킨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고민하게 된다.
한가지 발견한 것은 양육의 과정 중 대다수의 시간은 기다림의 시간이며, 이 기다림을 견뎌내는 것이 우리가 삶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가장 중요한 능력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것들에 의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결정하고 실행한다. 이런 우리의 행동으로 만약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나 결과가 벌어졌을 때, 우리는 그 일들이 지나가도록 인내하고 그 모진 시간들에게 사사건건 반응하지 않도록 잠잠히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기다리기보다는 어떻게 해서든지 해결하고 싶고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기 때문에 조급한 마음으로 바뀌지도 않을 상황에 정서적 에너지, 육체적 에너지를 모두 낭비한다.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아이가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부분이 있고, 그리고 기다리고 지켜보아야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우는 아이가 어떤 불편함을 호소하는지 알기 위해서 울음소리를 기다려야 하고 아이가 스스로 숟가락을 떠 먹겠다고 해서 숟가락을 건네주면 사방으로 흩어지는 음식들을 지켜볼 수 있어야 한다. 아이가 스스로 해보겠다고 하고서 양말이 뒤집혔다던지, 왼발오른발이 바뀐 신발, 그리고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아 불편하고 싫은 감정을 소리지르기와 드러눕기로 표현할 때, 그것들을 지켜보기 힘들다면, 물론 어른이 해주면 그 행동들과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아이는 절대로 성장하지 않는다.
관점을 어른인 나에게로 돌려보면, 나 자신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내가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 나의 감정이 싫다고 소리지를 때, 내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해소가 될지언정 나는 성장하지 않는다.
내가 선택한 모든 변수 중, 가장 불확실한 존재.
그 존재가 내게 가르쳐준 건 기다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