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김창열, 정상화, 이강소, 박서보, 윤형근 등 11명
뉴스에서 우연히 정보를 접해서 방문하게 되었다. 호림박물관은 '박물관'이라는 이름처럼 미술보다는 고서, 고화, 자기와 같은 문화유산을 다루는 곳이기 때문에 그런 쪽에 관심이 별로 없는 내가 갈 일이 없었다. 이번에도 TV에서 컴컴한 조명에 도자기 같은 것이 나오는 것을 지나치려는 순간 정상화 화백의 그림이 배경처럼 스쳐가는 걸 보았다.
순간, 그간 단색화를 봐오면서 한 번도 느끼지 못한 새로운 조화와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자기의 새하얀 색과 단순함이 그림의 맑고 깨끗한 푸른색과 어우러져 고요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내는 것이 정말 매력적이었다. 그 화면을 보고 꼭 가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이번 전시는 '자연을 중시한 전통적 창작 행위가 과거의 유산에 머물지 않고 연면히 이어져 현대 작가들의 작품 창작에도 큰 자양분이 되고 있음에 주목'했다고 한다. 그렇기에 '자연'을 매개로 고금이 같은 공간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전시의 제목인 '공명'이란 진동의 진폭이 급격하게 늘어나는 현상이라는 뜻의 과학 용어이지만 일상에서는 '남의 행동이나 사상 등에 깊이 동감하여 함께 하려는 생각을 가짐'을 뜻한다. 현대가 과거에 공감하고 관객이 작가에 공감하고 나아가 우리 삶에서 서로가 공감할 수 있는 바람을 갖고 기획한 전시가 아닌가 싶다.
전시는 세 개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각의 주제는 자연과의 조화라는 큰 틀 안에서 다시 세부적으로 어떻게 그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 보여준다.
1. 자연에 머물다
첫 번째 주제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물아일체'라고 할 수 있다. 여기 전시된 작품들은 자연과 하나가 되고자 했던 작가들의 마음을 대변한다. 주제 자체가 워낙 두루뭉술하고 선문답 같은 면이 있어 각 섹션 간의 작품들이 칼 같은 경계로 나뉘어있진 않지만 마음을 비우고 감상하다 보면 대략 어떤 지점에서 큐레이팅 되었는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어두운 조명을 좋아하지 않는데 이번만큼은 컴컴한 분위기가 사람을 차분하게 만들어주고 작품의 고요함이 느껴지도록 해주어 좋았다.
2. 자연을 품다
첫 번째 섹션이 자연에 녹아 소요하는 선조들과 그 소통을 그린 현대 작가들을 다루었다면 두 번째에서는 '자연물에 고결한 인격을 부여하고 그것을 시각화하는 전통'과 작품에 '선비의 올곧은 마음과 같은 정신성을 부여'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본 이후로 참 오랜만에 보는 그림 둘이 반겨준다. '진정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윤형근, 작업 자체를 수행의 과정으로 생각하는 박서보 화백의 작품은 이번 섹션의 주제를 가장 잘 나타낸다. 후기작인 <묘법 No.971121>은 재료까지 닥종이와 한지를 사용하여 자연을 품었다는 의미를 도드라지게 한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간결한 색과 최소한의 면으로 여백의 미를 살리며 한국적 미니멀리즘의 정수를 보여준다. 그것은 '단순함'이 아니라 작가 개인의 철학과 신념이 오랜 시간 쌓이고 쌓인 단단한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그것들이 놓여있는 구성, 공간과의 조화, 배치 자체도 정말 아름답고 고풍스럽다.
3. 자연에 따르다.
마지막 섹션은 자연에 머물고, 자연을 품는데 이어 자연에 순응하는 미학을 그린다. '자연의 본성을 따르는 '무위'적 행위는 동양 미술 특유의 창작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인위적인 사고나 행위를 최대한 배제하고 있는 그대로의 묘를 긍정한 것이다.' 즉, 인간의 손으로 작업을 시작한 뒤 완성되어가는 과정과 그 결과를 자연에 맡기는 것이다.
다른 공간에서 전시가 이어지는데 통창에 해가 잘 드는 곳이라 이전보다 훨씬 밝다. 여기에 있는 작품들은 오히려 환한 곳에서 더 빛을 발하는 것 같다. 이전보다 더 낯선 작품들이었지만 순수한 자연물 자체에 가공을 최소화하여 예술로 승화시킨 형태를 보고 있자니 그렇게 어렵게만은 느껴지지 않는다.
나오면서 고미술에 대한 감상이 너무 적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회화 작품을 더 감칠맛 나게 해주는 소품 정도로 여겼던 것 같다. 그렇지만 이전에는 크게 와 닿지 않았던 사군자, 백자, 고서와 같은 옛 것들의 아름다움을 조금이나마 배울 수 있었다.
전시의 주제, 구성, 환경, 자세한 설명이 든 책자 등 전반적으로 아주 만족스러웠고 민족문화의 계승과 발전을 설립 취지로 한 호림박물관의 품격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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