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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ncent Jun 15. 2021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정상화. 21년 6월.


2018년부터 우리나라 단색화가들의 개인전들을 눈여겨보아 왔다. 그 이전에도 근대미술 전시나 옥션에서 익히 보았던 작품들이지만 개인전을 보고 난 후마다 여러 작품들을 한 자리에서 본다는 것이 얼마나 겉핥기였는지 깨달았다. 단체전이나 옥션에 나온 작품과 큐레이팅을 폄하할 의도는 조금도 없다. 어떤 전시든 그 목적에 맞는 구성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폄하할 것은 나의 근시안적인 감상 태도가 아닐까.


18년 서울관에서의 윤형근, 국제갤러리의 유영국, 19년 다시 서울관에서 박서보, 20년 갤러리현대의 김창열, 21년 환기미술관의 김환기, 굵직한 전시들이었고 각각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가볍게 넘어가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그렇게 몇 달 전 김환기 작가의 전시를 보고 난 뒤 스쳐가는 작가가 있었다. 정상화와 이강소.



자화상, Oil on Canvas, 1953



정상화 작가는 대학생 때 갤러리 현대에서 개인전으로 접한 적이 있지만 그때는 후기작 위주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내가 글을 쓰기도 전이라 작가 개인에 대해 깊게 알기는 조금 부족함이 있었던 것 같다. 이강소 작가도 강렬한 검정 붓터치로 익히 알고는 있지만 역시 거기까지가 나의 수준이다 보니 그 둘의 개인전에 대한 생각을 품게 되었다.


정말 신기하게도 이런 생각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아 정상화 작가의 개인전이 서울관에서, 이강소 작가의 개인전이 갤러리 현대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내가 마블 코믹스를 잘 몰라서 제대로 된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어벤저스에 푹 빠진 사람이 그걸 본 뒤로 좋아하는 히어로들의 영화가 하나씩 개봉하는 느낌이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어쨌든 너무 반갑고 설레는 마음으로 서울관을 찾았다. 생각해보니 점점 익숙한 작품들만 찾게 되어서인지 마지막으로 서울관에서 제대로 감상을 한 것이 2년 전 박서보 전시라는 것에 좀 놀랐다. 토요일 오후처럼 어딜 가든 사람들이 미어터지는 날에도 서울관은 비교적 한적하고 쾌적하니 좋다. 10년도 더 전에 걱정하던 대로 그만큼 아직 미술의 대중화가 덜 이루어져서 아쉬운지, 아니면 개인적으로 붐비지 않고 좋은 작품들을 볼 수 있어 좋은지 판단하긴 어렵지만 오늘도 조용하고 기분 좋게 감상할 수 있었다. 




정상화 / 박서보 전시장 입구


작가의 시그니처 작품을 형상화한 감각적인 입구가 인상적이었다. 다만 다른 전시도 많이 하고 있어서인지 나에게는 이곳의 주인공처럼 보이는 전시가 이전 박서보 전시 때처럼 으리으리한 인트로를 갖고 있진 않아서 조금 아쉬웠다.





전시는 다섯 개의 섹션으로 나뉜다. 첫 번째 '추상실험'에서는 작가의 초기작들을 볼 수 있다. 1950년대부터 1960년대의 여느 작가들처럼 정상화도 앵포르멜 경향의 추상회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전후 침체된 사회 분위기를 나타내기 위해 어둡고 탁한 색상, 강렬한 질감, 딱딱한 구도를 사용하고 있다.


1. 추상실험


작품들을 보며 들었던 생각은 내가 정상화라는 작가에 대해 그동안 너무나 단편적으로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격자무늬의 작업물 외에는 잘 알지도 못하고 작업 방식도 잘 모르면서 그냥 별생각 없이 단색화가라는 이유만으로 좋아했던 것 같다. 


그러한 생각과 동시에 내가 어떤 사람이나 현상, 사상을 좋아하거나 또는 싫어하는 기준이 얼마나 얕고 편협한가에 대한 반성을 하게 되었다. 내가 누군가를 좋아한다면 그게 무엇 때문이지, 어떤 사상을 싫어한다면 정확히 어떤 점에서 그런 것인지, 나에게 주어진 몇 조각의 정보만으로 순식간에 결정한다. 그러면서 '선입견'이란 판단을 빠르게 해주는 효율적인 것이라는 오만한 생각을 가지며 살아온 내가 부끄러워졌다. 그림 하나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과할 수도 있지만 생각보다 사람의 가치관은 작은 것에서부터 드러난다고 본다.





2. 단색조 추상으로의 전환


시작부터 본의 아니게 조금 무거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두 번째 섹션에서는 서울대학교 회화과를 졸업 후 고베로 이주하여 활동하던 시기의 작품들이 소개된다. 이때부터 앵포르멜 화풍의 어두움과 걸쭉함이 사라지고 담백한 느낌의 단색조 회화의 느낌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정상화 / 윤형근


지난 윤형근 전시 때도 느꼈던 건데 서울관의 전시는 매번 같은 곳임에도 늘 새로운 느낌을 줄 수 있도록 공간 구성에 변화를 다양하게 준다. 또한 단순히 벽을 옮기는 것에서 나아가 이후 섹션의 작품들을 마치 예고편처럼 볼 수 있도록 중간중간 크게 비워놓는 점도 재미있다. 윤형근 전시 때는 이런 설정이 전시의 주제와도 닿아있어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무제 74-F6-B, Oil on Canvas, 226 x 181.5 cm, 1974 / 브라질, 피아우이주, 테레시나의 Pedro II 광장


위의 작품이 단색조로 변화하는 단계에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기하학적 도형과 색의 사용이 줄어들면서 격자무늬를 바탕으로 작품의 일부가 전부가 되고 전부가 일부가 될 수 있는 순환적 구조를 보여준다. 재미있는 점은 작가가 1967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출품하기 위해 브라질을 방문했을 때 넓은 대로를 작고 네모난 돌로 메우고 있는 노동자들을 보았는데 여기서 격자 형태의 영감을 얻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런 격자형 구조를 만들기 위해 캔버스 천에 주름을 잡는 방식은 한국의 전통적인 천이나 한복의 주름을 잡는 방식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4, 3 전시장 도면


옆 전시실로 가면 나머지 세 개의 섹션이 있는데 입구 쪽에 다섯 번째의 작품들을 볼 수 있다. 거대한 작품들을 맞닥뜨리는 순간 이번 전시의 절정을 느끼며 작품 속으로 한껏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내가 왜 단색화를 좋아하는지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다.


정말 아쉬웠던 점은 이 마지막 섹션을 이렇게 앞에 끌어다 놓은 것이다. 영화의 결말을 다 말해주고 나머지는 알아서 보라는 식이었다. 전시장 안쪽의 공간이 적었던 것도 아닌데 차분하게 3번, 4번을 보면서 마지막에 터지는 느낌이 있었다면 참 좋았을 것 같은데...




3. 종이와 프로타주 / 무제 79-4, Acrylic, Graphite and Korean Paper on Canvas, 1979


그래서 한두 점을 보고 멈칫했다가 안쪽의 세 번째 섹션으로 들어갔다. 여기서는 격자 형태에 대한 연구를 볼 수 있다. 캔버스보다는 다루기 쉬운 종이에 했던 이런저런 시도들과 "캔버스 작품 위에 종이를 대고 연필이나 펜 등으로 울퉁불퉁한 표면을 긁어 베끼는 '프로타주(forttage)' 기법을 이용해 화면의 깊이감을 더해"간 작품들을 볼 수 있다.


4. 격자화의 완성


네 번째 섹션에서는 형태가 점점 자리를 잡아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 시기의 작업들은 파리에서 이루어진 것들인데 고베에서 시작했던 단색조 경향의 격자 형태가 색상이나 밀도에 있어서 여러 가지 변주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작업 방식에 있어서도 정상화 작가만의 고유한 방식인 "뜯어내기와 메우기" 기법이 점차 완성되어가는 시기였다.

 

무제, Décollage and Acrylic on Paper, 1983, 1978, 1979 / 무제, Acrylic on Canvas, 1987




드디어 마지막으로 돌아와 다시 최근의 대작들을 본다. 역시 맨 앞의 공간부터 끝까지 보이는 깊이 있는 작품 배치는 정말 훌륭하다. 호기심을 자극하고 입체적인 느낌을 더해준다.


5. 모노크롬을 넘어서


전시장 전경을 찍은 걸 보면 그냥 색종이 몇 장 잘라 붙인 듯 하나 카메라로 찍은 사진은 무색할 정도로 실제 그림의 풍성함을 표현하지 못한다. '모노크롬을 넘어서'라는 소제목처럼 이 곳의 작품들은 단색화, 그냥 색이 하나인 그림, 그 자체를 넘어서 작가가 평생을 일궈온 '정상화의 인생'이 담겨있다. 나는 감상자로서 그 안에서 한 사람의 90년 남짓 인생을 보고, 30년이 조금 넘은 내 인생을 보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고, 바다를 보고, 하늘을 보고, 숲을 본다.



무제 97-10-5, Acrylic on Canvas, 1997
무제 94-2-16, Acrylic on Canvas, 1994


무제 95-9-10, Acrylic on Canvas, 1995


"자신의 작업을 '과정'으로 정의 내리는 정상화의 작품에는 지난한 노동의 행위가 집약되어 있다. 적게는 수개월에서 많게는 1년의 시간이 걸리는 이러한 노동 집약적인 행위는 고도의 정신적 인내심과 육체적 몰입을 요구한다. 지금까지 조수를 한 번도 둔 적이 없다는 그는 작품 제작의 모든 과정을 온전히 본인 스스로 해나간다. 그래서 매일같이 생활 속에서 묵묵히 예술을 실천하며 과정 자체를 반복하는 정상화만의 독특한 창작 방식은 "되풀이되는 일상에 대한 기록"이라고 평가받는다."


무제 07-09-15 / 무제 07-10-13, Acrylic on Canvas, 2007


전시 설명의 마지막 부분은 한 마디도 건너뛸 것이 없다. 예술가로서의 정상화를 너무 잘 정리했다. 자신의 작업을 '과정'으로 정의한다는 작가는 그것을 '수행'으로 정의하는 박서보 작가와 매우 비슷하다. 완성된 결과물만이 작품이 아니라 그것을 만들어내는 과정 또한 예술 활동의 일부라는 것이다. 그 과정을 거쳐 나온 캔버스 위의 작은 공간 하나하나와 그 사이사이의 결에서는 작가의 숨결이 오롯이 느껴진다.


아카이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데 이번 전시는 큰 기대만큼 만족도 컸다. 최근 단색화로 유명한 작가들의 전시를 보며 모아가던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도 들었다. 요즘은 사실 단색화보다는 일반 회화, 일반 회화보다는 아주 다양한 미디어를 사용한 작품들이 넘쳐나고 전시도 순수 회화를 주제로 하는 건 점점 줄어가는 듯한 느낌을 많이 받는다. 나도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그런 트렌드에 부응하고 싶다는 생각은 옛날부터 했지만 마음이 쉽게 가지 않는다. 내가 그만큼 고지식해서인지, 회화에 대한 애정이 너무 커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굳이 부담은 느끼지 않으려 한다. 내가 즐기는 것,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 그거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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