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툴렀던 여행의 마지막 페이
드디어 2월 16일, 마지막 날이다.
솔직히 말하면, 아쉬움이 컸다.
투어를 다니느라 원래 하려던 것들을 거의 못 했다.
쉬러 왔는데, 몸도 마음도 '일정'에 끌려다녔다.
그러다 보니 마지막 날이 됐는데도 여행이 끝난다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야 좀 쉬어볼 수 있겠는데?" 같은 뒤늦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늘 하던 습관이 또 나왔다. 숙박을 하루 연장해 둔 것이다.
나트랑에서는 그 방식이 꽤 합리적이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가 새벽이라,
전날 하루를 더 잡아 두면 체크아웃 이후의 공백이 사라졌다.
낮에는 호텔에서 쉬고, 밤에 공항으로 이동하면 됐다.
그렇게 몇 번 하다 보니, 별 생각 없이 파타야에서도 같은 선택을 했다.
문제는 파타야가 나트랑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항공권 시간을 다시 보니 '20:50'처럼 보였다.
눈이 피곤했던 탓인지, 숫자가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정리됐다.
게다가 파타야에서 공항까지는 20~30분이 아니라
한 시간 반, 길면 두 시간이었다.
"그럼 더더욱 하루 연장이 의미가 있나?" 하는 질문이 출국 당일에야 떠올랐다.
계산해 보면 간단했다.
21시 50분이면 밤 9시 50분,
2시간 전 도착 기준으로 7시 50분에는 공항에 있어야 했다.
이동에 한 시간 반을 잡으면 6시쯤에는 출발해야 했다.
그렇다면 하루 연장은 '늦게까지 호텔에 있는 여유'를 주는 게 아니라,
그냥 비용만 늘리는 선택이 되기 쉬웠다.
그 순간, 솔직히 짜증이 났다.
숙소가 좋았다면 "그래도 하루 더 쉬지 뭐"라고 넘겼을 텐데,
숙소가 애매하니 모든 게 더 예민하게 느껴졌다.
'이래서 이번 여행에 실수가 많았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작은 착각 하나가 줄줄이 이어지는 날들이 있다.
이번 여행이 꼭 그랬다.
하루 더 머무는 상상도 해봤다.
다음 날 11시까지 방에 있다가, 마사지를 받고 일찍 공항에 가도 됐다.
그런데 항공권이 걸렸다.
항공사 홈페이지가 아닌 대형 예약 플랫폼을 통해 구매했더니,
일정 변경이 즉시 되지 않았다.
문의하고 답을 받고, 그쪽에서 처리해줘야 하는 구조였다.
게다가 이날 출국편은 '가장 저렴한 날'을 골라 잡은 티켓이었다.
하루를 미루면 가격이 뛰었을 가능성이 컸다.
촉박한 타이밍에 그 부담까지 안고 싶지 않았다.
결국 연장 계획은 접었다.
설 연휴도 겹쳐 있었고, 돌아가서 챙길 일들도 머릿속을 스쳤다.
현실적으로는 '그냥 가자'가 답이었다.
아쉬움은 아쉬움대로 두고, 아침엔 늘 하던 대로 했다.
편의점에 가서 매일 사 먹던 과일 팩을 하나 샀다.
이 과일이 참 묘했다.
자몽과 비슷한데 더 깔끔했다.
쓴맛이 없고, 향만 남았다.
검색해 보니 폼멜로, 태국어로는 솜오라고 했다.
감귤류인데 자몽보다 크고, 자몽보다 덜 쓰다.
태국에서는 고급 과일로도 취급된다고 했다.
어쨌든 '맛있다'가 전부였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확실하게 맛있었던 건 과일이었다.
아침을 먹고 또 잠들었다.
마지막 날인데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모기도 문제였다.
동남아를 여러 번 다녀봤지만 호텔 방에서 모기를 만난 적은 거의 없었다.
예전에는 훈증기, 바르는 기피제, 물린 데 바르는 약까지 꼬박꼬박 챙겼다.
그런데 몇 년을 가지고 다녀도 "정작 모기는 없네" 싶었던 경험이 쌓이면서,
이번에는 대부분 빼고 왔다.
위탁수하물 없이 다니다 보니 더 덜어낸 것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 처음으로,
챙겨 온 '물린 데 바르는 약'을 실제로 꺼내 썼다.
많이는 아니었지만, 확실히 물렸다.
베란다 문으로 들어왔는지, 어디로 들어왔는지는 끝내 몰랐다.
이쯤 되니 결론이 하나 떠올랐다.
돈이 중요하다.
비싼 곳이 늘 좋은 건 아니지만, 싼 곳이 좋은 경우는 드물다.
지금까지 내가 묵었던 숙소들은 최소한 평균 이상이었다.
내가 고른 게 아니라 누군가 잘 골라준 것들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 돈으로 내가 골랐다.
저렴한 곳을 잡았다.
결과는 딱 그만큼이었다.
'싸고 좋은 건 없다'는 말을, 이번에는 몸으로 확인했다.
점심 무렵, 배가 고팠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김치찌개 한 그릇이 먹고 싶었다.
배달을 시켰다.
'문 앞 배송'이라고 적혀 있어서 그대로 믿었는데,
막상 도착하니 문 앞까지는 들어오지 않는다고 했다.
내가 직접 내려가야 했다.
배달을 가져온 사람은 한국인으로 보였는데,
오히려 나를 타박하는 말투로
"원래 이런 데는 못 들어간다"고 했다.
나도 그걸 모르는 게 아니었다.
'문 앞 배송'이라고 써 있으니 기대하고 물어본 것뿐이었다.
마지막 날, 그런 사소한 마찰이 기분을 더 상하게 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맛도 별로였다.
지금까지 동남아에서 먹어본 김치찌개 중 가장 입에 맞지 않았다.
단맛이 돌았다.
밥은 먹었지만, 기분이 풀리는 한 끼는 아니었다.
그 뒤에는 책을 조금 읽다가 또 잠들었다.
마지막 날인데도 결국 나는 '쉬는 법'을 제대로 찾지 못했다.
하지만 그게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었다.
피곤하면 자는 게 맞다.
어쩌면 그게 이번 여행의 가장 솔직한 결론이었을지도 모른다.
나갈 시간이 됐다.
나는 여행지에서 뭘 많이 사지 않는 편이다.
오히려 가져간 것들을 놓고 온다.
다 읽은 책, 더 이상 필요 없는 물건, 무겁기만 한 것들.
여행을 '비우는 시간'으로 쓰고 싶어서다.
남은 맥주 한 병, 음료수, 물도 다 두고 나왔다.
들고 돌아갈 이유가 없었다.
끝까지 다 읽지 못한 책도 그냥 버렸다.
아깝기도 했지만, 그 순간엔 '가벼워지는 편'이 더 중요했다.
그런데 짐을 싸는 과정이 생각보다 힘들었다.
위탁수하물 없이 여행하는 건, 나에게는 꽤 버거운 방식이라는 걸 실감했다.
젊을 때는 "그냥 몸으로 버티면 되지"였는데,
이번엔 그게 통하지 않았다.
다음 여행 티켓에는 다행히 위탁수하물이 포함돼 있다.
이번 여행이 준 작은 교훈이었다.
그리고 다시 실수가 시작됐다.
첫 번째 착각. 비행기 출발 시간을 한 시간 빠르게 잘못 봤다.
전자항공권에 왕복 일정이 함께 표시되는 형태였는데,
동남아 노선은 시간대가 헷갈리기 쉽다.
도착 시간과 출발 시간이 엇갈려 보이기도 한다.
나는 그걸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아, 20:50 출발이겠지"라고 머릿속에서 임의로 정리해버렸다.
그 기준으로 2시간 전 도착을 계산해 그랩을 불렀다.
공항에 도착하고 나서야 알았다.
시간이 너무 남아 있었다.
여유가 과할 정도였다.
나는 한 시간을 그냥 허공에 던진 셈이었다.
두 번째 실수는 더 컸다. 공항 선택이었다.
그랩 앱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파타야에서 이용 가능한 공항이 두 곳이었다.
내가 가야 했던 곳은 수완나품 공항인데,
그랩 앱에서 목적지를 고르다가 비슷해 보이는 다른 항목을 눌렀다.
화면에 더 자세하게 적힌 항목이 있었다. 국제선 몇 번 출구, 이런 식으로.
나는 그게 더 정확한 안내라고 착각했다.
결과적으로 가장 먼 구간을 선택한 꼴이었다.
가격이 2,000바트. 한국 돈으로 9만 원에 가까웠다.
항공권 가격과 맞먹는 수준의 택시비였다.
그 순간엔 어이가 없었다.
파타야는 혼자 움직이는 여행자에게 친절한 도시가 아니었다.
적어도 나같은 초보여행자에게는 그랬다.
그랩 기사가 도착해 "공항 맞냐"고 물었다. 맞다고 했다.
출발하고 시간이 좀 지난 후, 혹시나 해서 다시 확인했다.
그때 잘못 눌렀다는 걸 알아챘다.
급하게 "수완나품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기사는 잠깐 웃더니 환하게 "괜찮다"고 했다.
계약은 더 먼 거리로 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덜 가면 되니,
기사 입장에선 이득이었던 것이다.
통행료는 또 통행료대로 꼬박꼬박 냈다.
그 후로 한 시간 반쯤 달려 공항에 도착했다.
다행히 시간은 충분히 남아 있었다.
내가 '한 시간 빨리 출발'이라고 착각한 덕분이었다.
웃기게도 실수가 실수를 덮어준 셈이었다.
공항은 컸다. 부산김해공항에 비하면 면세점 규모가 압도적이었다.
예전에 한 번 왔던 공항이었다.
입국할 때의 동선도 대충 기억이 났다.
출국 수속도 큰 문제 없이 넘어갔다.
이제 남은 건 하나였다. 짝지의 선물.
원래 부탁받은 건 버버리 향수였다.
공항이 큰 만큼 오히려 찾기가 어려웠다.
향수 매장은 많은데 버버리 매장은 구석에 작게 있었다.
결국 찾아서 하나 샀다. 가격은 한국 돈으로 20만 원 정도였다.
그리고 이번 여행 내내 쓸 일이 없던 GLN을
여기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용했다.
파타야에서는 아무도 몰랐다.
오히려 내가 꺼낼 때마다 "이거 어떻게 쓰는 거냐"고 되묻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래서 현금을 쓰고, 편의점에선 카드를 쓰고, GLN은 그냥 묵혀뒀다.
그런데 면세점에서는 됐다.
"사용법이라도 익혀 간 것만 해도 다행이다"라는 말이 그때만큼은 진심이었다.
시간이 남았으니 밥을 먹었다. 마지막 한 끼였다.
본촌치킨이 해외에서 꽤 유명하다는 말을 들은 적 있는데,
공항에서도 눈에 띄었다.
라면 세트를 시켰다.
한국에서 먹는 라면과 느낌이 약간 달랐다.
맛은 나쁘지 않았다.
다만 "여행 마지막 날에는 뭘 먹어도 그냥 정리하는 기분이구나" 싶었다.
기다리는 동안 이상한 장면도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 카메라를 세워두고 라이브를 하고 있었다.
공항은 늘 그런 곳이다.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도착하고,
누군가는 자기 하루를 콘텐츠로 만들고 있다.
그 틈에서 나는 그냥 앉아 있었다.
탑승 시간이 다가왔다. 이번에는 미리미리 움직였다.
마지막까지 뛰고 싶지 않았다. 수속도 여유 있게 마쳤다.
그리고 여기서, 여행의 신이 마지막으로 선물을 하나 줬다.
비상구석이었다.
세 자리짜리 비상구석에 주변 승객이 없었다.
혼자 앉아 왔다.
올 때는 비상구석이 오히려 불편했는데,
돌아올 때는 달랐다. 넓었다. 숨이 트였다.
다만 비상구석은 팔걸이가 올라가지 않아,
완전히 누워서 오기는 어렵다.
'무조건 좋은 자리'는 아니었지만, 이날만큼은 충분했다.
해프닝도 있었다.
탑승할 때 작은 가방을 허리에 살짝 받치고 있으려 했다.
전부 머리 위 선반에 올리면 불편할 것 같았다.
그런데 승무원이 와서 다 올리라고 했다.
"허리에 받치면 괜찮지 않냐"고 말하자, 그쪽은 정색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허리가 좋지 않으시면 비상구석에 앉으시면 안 됩니다. 자리를 바꿔드릴까요?"
젊은 승무원이 규정대로 움직이는 모습이 오히려 인상 깊었다.
괜찮다고 하고 가방을 올렸다.
여행의 끝에는 늘 '규정'이 남는다.
한국에 도착했다. 잘 내렸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놓친 것들이 있었다.
안경통과 유선 이어폰을 잃어버렸다.
안경은 당연히 내 얼굴에 있었다. 안경통만 사라졌다.
이어폰도 오래돼 테이프로 붙여 쓰던 물건이라 큰 손실은 아니었다.
대체품도 있었다. 그래도 잃어버린 건 잃어버린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 잃어버린 물건이 꽤 된다.
수영복, 래쉬가드, 안경통, 이어폰.
돈도 쓸데없이 더 나간 것들이 있었다.
공항을 잘못 설정해서 추가로 낸 택시비 같은 것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지막 문장을 쓰려니 이렇게 된다.
재밌었다.
완벽해서 재밌었던 게 아니다.
서툴러서 재밌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끝까지 가서 결국 돌아왔기 때문에 재밌었다.
공항으로 출발하기 전 로비에서 그랩을 기다리며 잠깐 앉아 있던 순간이 떠오른다.
그때 이미 마음의 절반은 "빨리 집에 가고 싶다"였다.
돌아오는 길에 문득 이런 생각도 했다.
여행이 늘 계획대로 흘러가면, 그건 여행이 아닌 것 같다고.
어디선가 읽은 기행문에서 비슷한 문장을 본 기억이 난다.
여행이 계획대로만 흐르면, 그건 여행이 아니라 일정이다.
이번 여행은 일정이 아니었다.
실수도 있었고, 짜증도 있었고, 허탈함도 있었다.
그런데도 돌아보면,
그 모든 것이 합쳐져 "한 번쯤은 해볼 만한" 경험이 됐다.
다음 여행이 남아 있다. 다음엔 더 잘하겠지.
적어도 오늘의 실수만큼은 반복하지 않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