빡빡한 일정 끝에서 알게 된 것
전날 잠을 많이 잔 것 같다.
여행을 오기 전부터 피곤했고,
오는 길도 피곤했고, 와서도 계속 피곤했다.
그래도 바다에 들어가고, 몸을 움직이고,
오랜만에 맥주도 한 잔 했다.
그래서인지 깊게 잤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이 “투어 마지막 날”이라는 사실이었다.
오후에 반나절 투어가 잡혀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까지의 경험상
별로 재미있지는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분명했다.
- 지난 한 달의 피로를 풀 것
- 다음 한 달을 차분하게 계획할 것
내일 저녁에는 출국을 해야 하니, 쉬는 시간이 너무 없었다.
“그냥 오늘 투어를 빼버릴까?” 잠깐 고민했다.
하지만 이미 비용을 지불한 상태라, 결국 가기로 했다.
원래 이곳처럼 낮에 더운 지역에서는
주로 아침에 가볍게 뛰거나 걸으면서 동네를 훑는 편이다.
(저녁에는 일찍 자는 편이라 잘 돌아다니지 않는다)
오늘은 늦게 일어나 시간이 촉박했지만, 그래도 나갔다.
처음 파타야에 도착했을 때와 같은 코스로 걷기와 뛰기를 반복했다.
다만 오늘은 조금 더 달려서 '워킹스트리트 끝'까지 가보기로 했다.
아침이지만 기온은 벌써 높았다. 숨이 막혔다.
해변가를 걷다가, 탁발하는 스님을 봤다.
누런색 천을 두르고 맨발로 걸어가며, 상인들에게 다가가자
그들은 음식을 건넨 후 합장을 하고 허리숙여 인사를 했다.
그 옆에서는 누군가가 통을 끌며 스님이 받은 것들을 담았다.
“불교 국가”라는 말이 현실의 풍경으로 보이는 순간이었다.
오전 8시인데도 역시 유흥으로 유명한 '워킹스트리트' 답게
일부 술집에서는 여전히 젊은 사람들이 취해 떠들고 있었다.
아직 문을 열지 않은 가게 앞에는
야하게 차려입고 짙은 화장을 한 채 하이힐을 신은 여성들이 앉아
도시락을 먹거나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밤새 놀던 사람이라기보다,
“오늘의 일을 시작하는 사람들”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들 중 몇몇은 손짓을 하며 나를 부르기도 했다.
어느 클럽의 문 앞에는
밤을 새운 듯한 청년들이 술에 취해 소란을 부리고 있기도 했다.
아침부터 분위기는 요란했지만,
내 마음은 이상할 정도로 덤덤했다.
30년 전의 나였다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이제는 그냥 “좋을 때다. 저 에너지가 부럽다** 정도의 감상만 남았다.
그리고, 거리 곳곳엔 대마 마크가 보였다.
이곳 태국은 대마가 합법적으로 거래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속지주의와 더불어 속인주의의 적용을 받는 우리나라 형법상
한국인은 해서는 안된다. 형사처벌감이다.
그것도 그거지만 개인적으로 대마 등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담배도 거의 피지 않으니 더더욱 그랬다.
그냥 '대마' 마크는 화려하게 치장한 여성들과 더불어
“이 거리의 표지”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결국 목표한 대로 워킹스트리트 끝까지 갔다.
그랬더니 어제 산호섬행 보트를 탄 그 항구가 나오는게 아닌가?
뭔가 새로운 사실을 알게되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여행지에서는 이런 작은 에피소드들이 기억에 더 오래 남는다.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렀다.
이번엔 호텔 조식을 예약하지 않았고,
가사 조식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이 숙소 상황을 종합해 봤을 때
굳이 식당을 이용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편의점에 들러 간단히 샌드위치와 과일, 우유를 샀다.
이번 파타야에서 가장 맛있게 먹은 건 과일이었다.
사과, 그리고 자몽 비슷한 어떤 과일.
그 단순한 단맛이, 피곤을 잠깐 잊게 해줬다.
아침시간이라 편의점 주류 코너는 은색 차단막으로 가려져 있었다.
아침을 먹었다. 투어까지 몇 시간 남았다.
호텔 수영장이나 가볼까 하고 수영복을 챙기려 했다.
아. 그런데 수영복이 보이지 않는다. 래쉬가드도.
어제 분명히 산호섬 액티비티 할 때 입었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다.
보통 바다를 다녀오면
샤워하면서 수영복 등을 손으로 세척해서 말리는데
어제는 너무 피곤한 나머지 비몽사몽간에 샤워만하고 잠이 들었었다.
30분 후, 결론을 내렸다. 수영복과 래쉬가드는 분실했다고.
아마도 산호섬 덱체어에 놔두고 온 것 같았다.
일단 투어를 진행한 업체에 이메일로 사정을 설명하고
좀 알아봐달라고 했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가사 찾았다고 하더라도 내일 출국이니 내가 받기도 어렵다.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갑자기 긴장이 풀리면서 피곤이 몰려왔다.
나도 모르게 침대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자. 그런데 또 다음 이벤트가 시작되었다.
눈을 떴는데 11시 50분이었다.
내 기억에는 투어 출발이 1시쯤이었다.
“이제 준비해도 되겠네.” 싶어서 욕실로 향하면서
휴대폰을 확인해봤다.
어제, 투어진행업체로 부터 이메일이 와 있었다.
확인해보니 투어 시작시간이 1시간 당겨져 있었다.
12시에 호텔앞에서 픽업. 10분 내에 안나오면 노쇼로 간주.
입국 전 받은 바우처에는 분명히 오후 1시부터라고 되어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현지 사정’이라는 이름으로 시간이 바뀌곤 하나 보다.
물론 하루 전날 통보를 해줬으니 뭐라 항의하기도 애매하다.
뭐. 하여튼. 중요한 건 5분안에 내가 나가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샤워도 못 하고 허겁지겁 옷을 챙겨 입고 로비로 뛰쳐나갔다.
다행히 차는 떠나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에는 한국인 가족 한 팀이 타고 있었다.
가이드는 겸 드라이버 1명이었는데,
놀랍게도 영어가 거의 되지 않았다.
관광 대국인데도 이런 경우가 실제로 있더라.
역시 예상대로 관광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었다.
-티켓 사준다
- 내려준다
- “몇 시까지 나와라” 그게 전부였다.
(심지어 '몇 시까지 나와라'도 영어가 되지 않아 휴대폰 계산기로 숫자를 찍어가며 소통을 했다)
첫 목적지는 농눅 빌리지(대형 식물원/테마파크)였다.
1시쯤 도착했고 3시까지 나오라고 했다.
사람이 정말 많았는데, 관광객의 대부분이 중국인이었다.
곳곳에 어떤 왕족으로 보이는 여성의 추모 영상과 음악이 흐르고 있었고
(이번 여행에서 나는 이 인물과 장소의 직접적 연관은 확인하지 못했다),
그 장면 자체가 “여긴 지금 이런 분위기”라고 말하는 듯했다.
식물원 규모는 컸다.
다만 시간이 빡빡해 “정원”을 감상할 여유는 거의 없었다.
쇼(‘농눅 쇼’)는 태국의 역사와 다른 여러 나라의 문화를
뮤지컬처럼 보여주는 형식이었다.
한글 자막은 없었고,
영어 자막과 중국어 자막이 아주 짧게 스쳐 지나갔다.
아울러 태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중국풍이어서
“중국인을 위해 급조한 느낌”이라는 인상이 강했다.
뭐. 그래도 그냥 볼 만했다.
하지만 이어진 ' 코끼리 쇼' 는 확실히 재미있었다.
코끼리 여러 마리가 나와 묘기를 부리고, 축구도 하고,
다트도 하고, 코로 그림을 그려 티셔츠를 만들기도 했다.
무엇보다 가까이서 보니 코끼리는 생각보다 영리하고, 표정이 풍부했다.
관객 쪽으로 코를 내밀며 돈을 받는 장면도 계속 반복됐고,
“이게 관광이구나.” 싶은 순간이 많았다.
시간이 부족해 쇼 중간에 나와야 했다.
원래 시간에서 1시간 앞당긴 게 “그쪽 사정”이었겠지.
나는 그저 3시까지 나가야 했다.
다음은 바위산 한 면을 깎아 금색으로 크게 부처상을 새긴 곳이었다.
농눅빌리지를 나와 차로 10분 정도 이동했고, 작은 공원 형태였다.
사실상 “멀리서 보고 돌아오는” 장소였다.
입구에서 내려 조금 올라가면 앉을 자리가 있고,
거기서 부처상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된다.
공원 한 바퀴는 10분이면 충분했다.
나는 그냥 앉아 있었다.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마음을 조금 정리했다.
“오늘 투어를 빼버릴까” 했던 고민이 다시 떠올랐지만,
그래도—오긴 잘 왔다 싶었다. 다만 두 번 올 곳은 아닌 것 같다.
마지막 코스는 "파타야 플로팅 마켓"이었다.
강가(혹은 저수지 같은 물, 깨끗하다고는 할 수 없다) 주변에
나무 데크를 세우고 상점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형태였다.
공연도 있고, 카약 같은 배도 운행하는 것 같았다.
나는 여행지에서 쇼핑을 잘 하지 않는다.
여행의 목적이 “기분 전환”이고, “비우기”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책이나 물건은 그곳에 두고 온다.
마음을 가볍게 만들려고.
그래서 살 건 없었다.
그냥 구경만 했다.
점심도 제대로 못 먹은 상태라, 100바트짜리 망고 스무디를 마셨다.
너무 맛있었다. 피곤할 때는 이런 단맛이 바로 “살아나는 느낌”을 준다.
돌아다니다가 피쉬 스파(fish spa)를 발견했다.
100바트를 내면 시간 제한 없이 앉아 있을 수 있다고 해서, 그냥 들어갔다.
처음엔 간지럽고 이상했는데, 시간이 지나니 괜찮아졌다.
다만 숙소로 돌아와 보니 발이 달라진 건 딱히 없었다.
결국은 “효과”보다 “경험”을 사는 거겠지.
옆에 앉은 관광객들이 내 발을 가리키며 뭔가 말하길래,
‘내 발이 더 잘 먹히나?’ 같은 혼자만의 상상을 하며 웃었다.
그때 마침 배 한 대가 지나가며 작은 공연을 하더라.
이런 게 여행의 작은 즐거움이다.
문제는, 집합 시간이 임박한 순간 또 시작됐다.
'나가는 길이 안 보였다.'
마음이 급해지면 방향감각이 더 사라진다.
뛰어다니다가 겨우 맞춰 나왔다.
그런데 이번엔 드라이버가 없었다.
“어딘가 갔다”는 말만 듣고 10분을 더 기다렸다.
소규모 일정이라 그런지 전체 운영이 매끄럽지는 않았다.
결국 5시 30분쯤 호텔에 도착했다.
너무 배고프고 힘들었다.
몸도 지쳤지만, 마음이 더 지쳐 있었다.
원래는 파타야에서 혼자 식당도 가보고, 저녁도 먹어보려 했다.
그런데 그날은 가까운 편의점도 가기 싫었다.
결국 또 한국 음식을 배달시켜 먹었다.
족발이었다. 비싸긴 했지만, 맛있었다.
낯선 곳에서 지쳐 있을 때는,
익숙한 맛이 생각보다 강한 ‘안전지대’가 된다.
다시 한 번 확실해졌다.
- 다음 여행에서는 숙소를 더 신중하게 잡아야 한다
- 위치가 애매하면, 피곤한 날엔 모든 게 더 어려워진다
- 투어는, 특히 마지막 날엔 절대 빡빡하게 잡지 말자
가져온 책도 읽지 못했고, 글도 제대로 쓰지 못했다.
피곤해서. 그리고 그렇게 먹고, 또 잠이 들었다.
반나절 투어를 두 번 갈 일은 없을 것 같다.
다만 한 번쯤은 괜찮았다.
- 코끼리 쇼는 확실히 즐거웠고
- 바위산의 부처상 앞에서는 마음이 잠깐 정리됐고
- 플로팅 마켓에서는 단맛과 물 위의 풍경이 남았고
- 무엇보다 “내가 지금 얼마나 피곤한지”를 정확히 알게 됐다
이 여행의 목적이 ‘쉼’이었다면,
오늘은 ‘쉼이 무엇인지 다시 정의하는 날’이었다.
쉰다는 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더 이상 무리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것”에 가깝다는 쪽으로.
내일은 출국이다.
오늘의 피로가, 내일의 정리로 이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