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가 곰을 죽였다.
몇 해 전,
홋카이도 시레토코 국립공원에서 불곰 한 마리가 사살되었다.
원래 산속에서 살던 녀석이었다.
관광객들이 먹이를 던져주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다가왔고,
먹이를 받아먹었고, 인간의 음식에 맛을 들였다.
야생의 경계심이 사라졌다.
공포탄을 쏘며 쫓아도 물러가지 않았다.
결국 마을까지 내려왔고, 관리 당국은 사살을 결정했다.
사살 후, 공원 관계자가 말했다.
"악의는 없었겠지만,
곰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의 태도가 곰을 죽게 만들었다."
그 기사를 읽고 한참 화면을 보고 있었다.
곰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깃집 기억 하나가 있다.
넷이서 갔다.
환풍기 소리, 된장찌개 끓는 소리.
계산대 앞에서 누군가 말했다.
"형이 내면 되지." 장난 섞인 말투였다.
나도 웃으며 카드를 꺼냈다.
그 사람이 먼저 문을 열고 나갔다.
집에 돌아와 그릇을 닦는데,
수세미를 쥔 손이 멈췄다.
금액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 문장의 구조가 걸렸다.
거기에는 요청도 협의도 없었다.
이미 결정된 것을 통보하는 문장이었다.
언제부터 이 사람의 말에서 물음표가 사라진 걸까.
그릇을 다 닦고 불을 껐다.
어둠 속에서 오래된 것들이 떠올랐다.
적당한 거리에 있는 사람들과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가까운 사람들에게서만 상처를 받았다.
내가 가장 많이 베푼 사람들이 나를 가장 가볍게 대했다.
한동안은 그들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분노를 정당화할 수 있었고,
그 분노는 꽤 오래 유효했다.
그런데 같은 일이 세 번째 반복되었을 때,
세 명이 모두 같은 방식으로 변한 거라면,
공통분모는 나였다.
되짚어보았다.
처음에 그들이 정말 그런 사람이었는지를. 아니었다.
내 무리한 양보에 미안해하는 표정이 있었다.
고맙다는 말이 있었다.
그것이 열 번, 스무 번 반복되면서
표정이 사라지고,
고마움의 자리에 "원래 그런 거지"가 들어섰다.
내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이 사람은 뭘 해도 받아준다는 인식을.
선이 없다는 것을.
시험하지 않아도 결과가 뻔하다는 확신을.
왜 그랬을까.
부딪히는 것이 무서웠다.
거절하면 공기가 무거워진다.
상대의 표정이 변하면 그 무게를 내가 안아야 한다.
차라리 들어주는 편이 빨랐다.
그게 오래되니까 습관이 됐고, 습관이 성격처럼 굳었다.
그것을 배려나 책임감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부끄럽다.
나는 상대를 위해 양보한 것이 아니라
피곤한 상황을 모면하려고 양보했다.
그리고 그것을 친절이라고 포장했다.
나는 관계를 돌본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나를 지우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성경에 돼지에게 진주를 주지 말라는 구절이 있다.
오랫동안 단순하게 읽었다.
가치를 모르는 자에게 낭비하지 말라는 뜻으로.
지금은 다르게 읽힌다.
준비되지 않은 상대에게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주면,
그것은 선물이 아니라 관계를 망가뜨리는 장치가 된다는 뜻으로.
시레토코의 곰이 다시 떠오른다.
그 곰은 나쁜 곰이 아니었다.
주어진 환경에 적응했을 뿐이다.
관광객들은 선의로 먹이를 던졌지만,
그 선의가 곰의 야생을 지웠다.
야생을 잃은 곰은 사살되었다.
잘해준 사람이 곰을 죽인 셈이다.
지금은 그때보다 만나는 사람이 적다.
전화도 줄었고, 약속도 줄었다.
이상한 것은,
남은 관계들이 대부분 전보다 편하다는 점이다.
상대도 무리한 기대를 하지 않고,
나도 실망하지 않는다.
안부를 묻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
서로의 말에 물음표가 남아 있는 관계들이다.
약에는 적정량이라는 것이 있다. 넘기면 독이 된다.
사람 사이의 호의도 비슷할 텐데,
약과 달리 어디에도 적정량이 쓰여 있지 않다.
나도 아직 모른다.
모르지만, 예전처럼 무한대를 기본값으로 놓지는 않으려 한다.
싱크대에 물기가 남아 있다.
행주로 닦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