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자리에서..
일이 안 풀리면 자리를 옮기고 싶어진다.
사는 곳을 바꾸고, 하는 일을 바꾸고, 만나는 사람을 바꾼다.
바꿀 수 있는 것은 전부 바꾼다.
새 출발이라는 말은 언제 들어도 근사하다.
그런데 바꾸고 나서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예전에 읽은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
옷가게를 하던 남자가 있었다. 옷을 좋아해서 가게를 열었다.
자기가 좋아하는 브랜드를 진열하고, 자기 취향에 맞는 인테리어를 했다.
꿈에 그리던 가게였다.
그런데 손님이 오지 않았다.
빚이 쌓였고, 연인과도 헤어졌다.
밑바닥이었다. 가게를 접을 수도 있었다.
다른 업종으로 전환할 수도 있었다.
보통은 그렇게 한다.
그런데 그 남자는 가게를 접지 않았다.
대신 한 가지를 바꿨다.
진열대에 올리는 옷의 기준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옷'에서 '손님이 원하는 옷'으로.
같은 가게, 같은 위치, 같은 사람이다.
달라진 것은 시선의 방향뿐이었다.
자기 쪽을 향해 있던 카메라를 상대 쪽으로 돌린 것이다.
재고가 줄었다. 매출이 올랐다.
도매처에서는 "당신이 고르는 옷은 독특하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독특한 것이 아니었다.
자기 취향이라는 필터가 빠지자
손님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한 것뿐이었다.
이어서 그는 돈을 들이지 않고 매장을 꾸미는 방법을 연구했고,
낮은 비용으로 손님이 원하는 상품을 개발할 수 없는지 고민했다.
거창한 전략이 아니었다.
눈앞에 있는 것을 하나씩 고쳐나간 것에 가까웠다.
이 이야기를 읽고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내게도 비슷한 시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개업 초기, 일이 들어오지 않던 때.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
상담에서 정확한 답을 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틀린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았다.
사무실 위치 탓인가 싶었다.
홍보가 부족한 건가 싶기도 했다.
머릿속에서 '바꿀 것들'의 목록이 늘어났다.
한때는 진지하게 다른 도시로 사무실을 옮기는 것까지 생각했다.
여기가 아닌 어딘가로 가면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상상이었다.
어느 날 문득, 상담 장면을 되짚어봤다.
상대방의 표정이 상담 전보다 상담 후에 더 어두운 경우가 있었다.
정확한 답을 들었는데 왜 그럴까.
그 질문을 안고 꽤 오래 지냈다.
답은 의외로 단순한 곳에 있었다.
상대방이 먼저 필요로 한 것은 정확한 답이 아니었다.
자기 상황을 누군가가 알아주고 있다는 감각이었다.
나는 내가 아는 것을 보여주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상대방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상담 첫마디를 바꿨다.
설명부터 시작하는 대신, 상대방의 상황을 먼저 정리해서 되돌려주었다.
"지금 이런 상황이시군요."
그 한마디를 앞에 놓았을 뿐이다.
자리를 옮긴 것은 아니었다. 방향을 바꾼 것이었다.
며칠 전, 가까이에서 일하는 사람에게서
비슷한 장면을 봤다.
그 사람은 실력이 좋다.
꼼꼼하고, 준비가 철저하고, 맡은 일의 결과도 대체로 좋다.
문제는 일하는 방식이었다.
상대방에게 필요한 정보를 빠르게 얻어내기 위해
질문을 몰아붙이는 스타일이었다.
본인은 효율적으로 일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런데 상대방은 달랐다.
어려운 상황에서 도움을 구하러 온 사람이었다.
내 편이 되어줄 사람을 찾으러 온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만나보니 자기를 도와주러 온 사람에게서
취조를 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모양이다.
결국 그 사람은 떠났다.
더 비싼 비용을 치르더라도 다른 곳으로 가겠다고 했다.
실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방향의 문제였다.
자기가 해야 할 일에만 집중하고 있었지,
상대방이 지금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는 보지 않았다.
이야기를 전해 듣고 나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예전의 나를 보는 것 같았으니까.
자리를 옮기는 것은 화끈하다.
눈에 보이는 변화가 있다.
주소가 바뀌고, 명함이 바뀌고, 주변 풍경이 바뀐다.
같은 자리에서 방향만 바꾸는 것은 다르다.
바깥에서 보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환경은 그대로인 채 자기만 바뀌어야 한다.
바뀌었다는 증거도 당장은 나타나지 않는다.
옷가게 남자도 그랬을 것이다.
진열대의 옷을 바꾸고 나서 첫 손님이 올 때까지의 시간.
이게 맞는 건지 틀린 건지 알 수 없는 시간.
그 시간이 제일 길다.
가끔 그때를 떠올린다.
첫마디를 바꾸고 나서,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한동안은. 상담 방식을 바꿨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나뿐이었고,
밖에서 보면 여전히 같은 사무실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돌아가지는 않았다.
이게 맞는지 확신은 없었지만,
적어도 이전 방향이 틀렸다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
그 시간을 견디고 나서야 조금씩 사람이 돌아왔다.
극적인 전환 같은 것은 없었다. 그냥 조금씩이었다.
어느 날 상담이 끝난 뒤 상대방이 문 앞에서 돌아서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각도가 이전과 달랐다.
그런 것들이 하나씩 쌓였다.
옷가게 남자와 나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면 하나다.
둘 다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는 것.
그게 옳았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