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작단편] 허기

새벽 네 시 오십 분, 그가 캔맥주를 땄다.


프쉬, 하는 소리에 그녀가 눈을 떴다.

커튼 사이로 빛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에어컨이 낮게 돌고 있었고,

리조트의 이불은 면 특유의 차가운 촉감 그대로였다.

그녀는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린 채 그를 보았다.


그가 발코니 쪽에 앉아 있었다.

커튼을 반쯤 젖혀놓아서

유리 너머로 아직 어두운 바다가 보였다.

그는 캔을 한 모금 마시고 가만히 바깥을 바라보았다.


"지금 마셔요?"


"응."


그녀는 일어나 앉았다.

괌의 새벽은 생각보다 서늘했다.

생리 중이라 더 그런지도 모른다.

어젯밤에도 담요를 두르고 잤는데도 추웠다.

이 호텔 이불은 처음 닿을 때 몸이 움츠러들 정도로 차갑다.

촉감이 따뜻한 것이 아니면 잠이 오지 않았다.


그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가 자는 동안 추워서 깬 것이 아니라,

그보다 먼저 깨어 있었다는 것.

그가 캔을 따기 전부터 어둠 속에서 천장을 보고 있었다는 것.




그는 변호사다.

지방에서 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십 년이 넘었다.

한때 다른 삶이 있었지만

그것은 길고 소모적인 과정을 거쳐 끝났고,

끝난 뒤에는 한동안 술에 의존했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다시 일상을 만들어왔다.

그녀를 만난 것은 그 과정 어딘가에서였다.


"꿈을 꿨어"


그가 말했다. 두 번째 모금을 마시고 나서였다.


"어떤 꿈?"


"어른들이 나를 둘러싸고 잔소리를 하는 꿈."


그녀는 이불을 어깨에 두르고 발코니 쪽으로 다가갔다.

바닥 타일이 맨발에 차가웠다.


"어떤 어른들이요."


"원장, 엄마, 아버지. 그런 사람들이야.

어떤 큰 저택 같은 곳에 다 같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정한 규칙이 있어.

아침에 일어나면 어디에 앉아서 차를 마시고,

식사 후에는 뭘 하고,

길을 걸을 때는 여기를 찍고 저기를 찍고

이렇게 가야 한다는 거야."


"세밀한 규칙."


"응.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거야.

나는 그냥 쭉 가면 안 되냐고 하는데 안 된다는 거지.

나보고 불성실하다며 손가락질을 하는거야.

근데 꿈속에서 웃긴 게 뭐냐면,

내가 계속 그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하고 있더라고.

시알도 안 먹히는데."


"설득을 했어요?"


"계속. 왜 내가 불성실하냐고. 도대체 내가 뭘 잘못하고 있느냐고."


그는 캔을 내려놓았다. 어둠 속이라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말하는 거는,

내 나이에 보통 남자가 하고 있어야 할 것을 안 한다는 거겠지.

가정도 없고. 아이도 없고."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맨 마지막에 그냥 안 할란다, 했어.

설득하는 거. 아예 안 한다고."


"그래서 깼고."


"응."



침묵이 흘렀다. 에어컨 소리만 낮게 이어졌다.


"근데 깨기 직전에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더라고.

왜 지금까지 저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했을까.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는데."


그녀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가만히 들었다.


"무의식이지. 결국."


"무의식이 많이 반영돼요. 당신 꿈은."


"그래?"


"응. 꿈에 엄마가 나오는 걸 보면."




그녀는 그의 어머니를 만난 적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만난 것이 아니라 스쳐 지나간 것에 가깝다.

명절에 갈 뻔하다가 가지 않았고,

전화를 할 뻔하다가 하지 않았다.

그 사이에 들은 이야기들만으로도 충분히 윤곽은 잡혔다.


어렸을 때 그의 어머니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너도 꼭 니 같은 놈 놔봐라. 한번 해 봐라.


그 말은 저주처럼 느껴진다고 그가 말한 적이 있다. 지금도.


꼭 나 같은 자식을 낳아봐라, 가 문제가 아니라 — 너도 아이를 낳으면 꼭 이런 상황이 올 거다,

라는 저주. 그렇게 들린다고.



그녀는 그 말을 들었을 때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신 팔 년 전의 일을 생각했다.


그녀에게도 팔 년을 만난 남자가 있었다.

고등학교를 나오고 바로 일을 시작한 사람이었다.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사랑도 했다.

하지만 그 사람과 함께한 시간 동안

그녀는 늘 어떤 종류의 부족함을 느꼈다.

무엇이 부족한지를 알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나트랑에 갔을 때," 그가 말했다.

세 번째 캔이었다.

바깥이 아주 조금,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밝아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하루키 선생 소설을 다시 읽었거든."


"댄스 댄스 댄스."


"응. 군대 있을 때 한번 읽고 감동받았는데,

30년만에 다시 읽으니까 다른 게 보이더라고."


"뭐가."


"열 살짜리 여자아이가 나와.

엄마가 천재적인 사진작가인데, 아이를 놔두고 작업하러 가버려.

호텔 바에 애를 앉혀 놓고 그냥 가는 거야.

자기한테 사진이 탁 떠오르면."


"방치."


"근데 그게 단순한 방치가 아니야.

이 엄마는 아이를 사랑해. 아이도 그걸 알아.

하지만 이 엄마는 아이하고 부모-자식이 아니라 친구가 되려고 하는 거지.

열 살짜리한테.

자기 사정을 이해해달라고. 자기도 힘들다고."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 아이가 작중에서 하소연하는 대목이 있어.

엄마가 나를 사랑하는 건 안다,

나하고 친해지고 싶어 하는 것도 안다,

하지만 나는 아이고 엄마는 어른 아니냐,

힘의 차이가 너무 크다 — 이런 얘기를."



"나이 오십에 그 부분을 다시 읽었을 때 아, 이건가 싶더라고."


"뭐가."


"우리 엄마도 그랬던 거야. 자식이자 친구이자 남편이자 — 자기한테 없는 것을 전부 아이한테 투영하는 거지. 아이는 내 배로 낳은 새끼니까 내 편 들어주겠지, 라는 전제가 깔려 있는 거야.

그래서 어린 자식인데도 불구하고 다 쏟아내는 거지.

나한테 이렇게 해줬으니 너도 이해해줘야 하지 않겠냐,

그게 당연하지 않겠냐."


그는 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마치 날씨 이야기를 하듯이.



"용서했어요?"

그녀가 물었다. 조심스럽게.


"모르겠어. 노력은 하고 있고. 이해도 하고 있고.

사정이 어땠을지, 엄마도 처음 부모였을 테니까, 그런 것들.

아버지가 항상 중간에서 그랬었거든.

니 엄마는 너를 정말 좋아하는데 너는 왜 자꾸 이러냐고.

그 말 듣고 나도 노력을 많이 했어."


"근데."


"근데 안 되더라고. 그러니까 안 되니까. 납득도 하고 다 알겠는데,

이렇게 꿈에 올라와. 아직도. 엄마라는 상징이 무의식에서 이렇게 올라오는 거야."



그녀는 이불을 더 끌어올렸다.

서늘한 바람이 발코니에서 들어왔다.


"미워하고 이런 건 없어 사실. 근데 또 미워. 물론 미운데.

그냥 용서가 아니니까. 애정이 남아 있으니까. 근데 어떻게 해."



그녀는 생각했다.

이 사람이 아이를 갖지 않는 이유에 대해.


한번도 직접 물어본 적은 없다. 하지만 짐작은 있었다.


그것이 이 사람의 지하에 깔려 있는 것이다. 밖으로 꺼내진 않지만.

그리고 가끔, 이렇게 꿈이 되어 올라온다.




"나는요," 그녀가 말했다.

"꿈에 옛날 애인이 나오면 그게 신호예요."


"무슨."


"내가 지금 행복하지 않다는 신호.

뭔가 어긋나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나타나거든. 그 사람이."


그녀는 팔 년을 만났던 그 남자에 대해 길게 말하지 않았다.

이미 여러 번 한 이야기였으니까. 대신 이렇게만 말했다.


"요즘은 안 나와요."


그리고 덧붙였다.


"그것도 언제 나오는지를 알고 나니까 좀 마음이 편해요."



캔을 다 비운 그가 네 번째를 열었다.

그녀는 그것을 보았다.

새벽 다섯 시에 네 번째 맥주.

예전 같으면 건강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이 사람과 오래 가야 하니까, 아프면 안 되니까.


지금은 하지 않는다.


나에게, 자고 일어나자마자 맥주를 마시라고 하면 못 한다. 1억을 줘도.

몸이 안 따라주니까.

하지만 이 사람은 된다.

이 사람의 몸이 따라주니까 이렇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받아들여졌다.




"이런 이야기 할 수 있어서 좋아요."


그녀가 말했다.


그는 바다를 보고 있었다.

수평선 너머로 밤의 색이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다.

아직 해가 뜬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둠의 질이 달라지고 있었다.


"당신이 제일 좋은 점이 이거예요.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거."


"그래?"


"팔 년 만났던 그 사람 옆에서요, 밤마다 울었거든.

그 사람이 코 골면서 잠들면. 왜 우는지 몰랐어요.

이 사람이 나를 안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나도 이 사람을 싫어하는 것이 아닌데."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나중에 알았어요. 배가 불렀는데 허기진 거였어요.

밥을 엄청 많이 먹었는데 먹고 나니까 그렇게 허기진 거야.

정신적인 대화가 없었던 거예요."


그가 그녀를 보았다.


"당신하고 밥 안 먹어도 괜찮아요. 솔직히.

당신하고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거 자체가 나를 충만하게 해주니까.

당신이 안 좋을 때도 있었고 다투기도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이게 제일 크더라고."


그녀는 그 말을 하고 나서 잠시 바다를 보았다.



"하루키 선생 소설에 이런 장면이 있어요," 그가 말했다.

"양을 쫓는 모험이라고. 맨 마지막 클라이맥스에서

주인공이 죽은 친구를 만나.

어두운 방에서. 캔맥주를 마시면서

둘이 되게 진지하게 이야기를 해."


"죽은 친구."


"응. 주인공이 물어. 너 이미 죽은 거지? 그러니까 친구가 그래, 나는 죽었어, 라고 해.

그래서 불을 켤 수가 없는 거야. 불을 켜면 끝나니까."


그녀는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근데 주인공이 딱히 놀라지 않아.

그냥 앉아서 같이 맥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해.

그 장면이 한번 해보고 싶었거든."


"불을 켜면 끝나는 대화."


"응."


그녀는 웃었다. 소리 없이.

그리고 발코니 너머의 바다를 보았다.

수평선이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다.

아직은 어둠 속이었지만,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서 새벽부터 맥주를 마시는 거예요?"


"그것도 있고."


"평범하지는 않지. 자고 일어나자마자 맥주 마시는 건."


"알아."



그녀는 그의 옆모습을 보았다.

어딘가에서 새 한 마리가 울었다.

짧고 높은 소리.

그의 윤곽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 사람은 자기 컨디션이 먼저 서야 하는 사람이다.

자기 상태가 온전해야 비로소 다른 사람한테까지 손이 닿는 사람.

그것을 이해하려고 하면 이해할 수 없다.

이 사람은 그런 사람이다, 라고 인정하면 된다.

거기까지 오는 데 꽤 오래 걸렸지만.



"나 어제 당신이 그 사람하고 통화하는 거 들었는데요."


"누구?"


"조 변호사. 대학 동기."


"어. 왜."


"여자야?"


그가 그녀를 보았다.


"뭐?"


"아니, 목소리만 들었을 때 — 마치 오래된 여자친구랑 통화하는 줄 알았어요.

아주 편하고. 자연스럽고."

그가 웃었다. 짧게.


"그 친구하고는 이십 년이 넘었어.

대학 기숙사에서부터야. 밤에 맥주 한 캔 들고

서로 방 왔다 갔다 하면서 막 이야기하고.

공부 이야기, 사는 이야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로 밤새고.

그때 같이 있던 사람이야."


"알아요. 이름은 들었으니까. 근데 다른 사람하고 통화할 때랑 느낌이 완전 달라요."


"그래?"


"응. 목소리가 달라. 나한테도 그렇게 해줘요."



그녀는 그것을 말하고 나서 스스로 좀 웃겼다.

질투라기보다는 — 부러움에 가까운 것이었다.


오래된 친구란 그때 그 시절의 감성으로 돌아가는 통로 같은 것이다.

지금은 서로 다른 삶을 살고 있다.

그 친구는 곧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고 했다.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

서울에 와서 한번 보고 나면, 죽기 전까지 다섯 번은 볼 수 있을까.


그런 종류의 쓸쓸함이 이 사람 안에도 있다.

꺼내 보이지 않을 뿐.




바다 위로 빛이 번졌다.


아직 해가 수평선 위로 올라오지는 않았지만

하늘의 색이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그가 빈 캔을 내려놓았다.

네 개의 빈 캔이 발코니 난간 아래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고마워요."

그녀가 말했다.


"뭐가."


"괌에서 이렇게 또 하나 좋은 기억이 생겼으니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바다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이불을 좀 더 끌어올렸다.

추웠지만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이 사람 옆에 이렇게 앉아 있는 것.

깨어 있는 채로 나란히 같은 바다를 보는 것.

아무 말 없이.


팔 년 전, 코를 골며 잠든 남자의 등을 바라보며 울던 밤과 이 새벽은

같은 시간대에 있지만 전혀 다른 곳이었다.


그때는 옆에 사람이 있는데 혼자였다.

지금은 옆에 사람이 있고 혼자가 아니다.


그 차이가 뭔지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이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부모에 대한 이야기, 어린 시절의 상처, 꿈에 나타나는 무의식의 의미,

아이를 갖지 않는 이유, 새벽에 맥주를 마시는 이유. 그런 것들을.

그리고 나의 이야기도 할 수 있었다.

코를 골며 잠든 남자의 등을 바라보며 울었던 밤의 이야기를.


서로의 이야기가 겹쳐지고 갈라지고 다시 만나는 곳에서 무언가가 채워졌다.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것이.


적어도 허기지지는 않았다.



"들어가서 좀 더 자요?"


"응. 근데 한 개만 더."


프쉬, 하는 소리가 새벽 공기를 갈랐다.


그녀는 웃었다. 이번에도 소리 없이.

그리고 차가운 이불이 싫어서 그의 팔에 자기 이불째 기대었다.


바다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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