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드
바람이 강한 날이었다.
오전 열한 시.
데크 위에 놓인 플라스틱 컵이 옆으로 미끄러져 갈 정도였다.
그런데도 햇빛은 놀라울 만큼 강렬해서, 눈을 뜨고 있기가 힘들었다.
나는 선글라스를 쓰고 덱체어에 기대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사월 초의 일이었다.
풀 주변에는 한쌍의 일본인 부부가 있었고,
혼자 온 듯한 서양인 남자가 하나 있었다.
한국어는 들리지 않았다.
이어폰을 낀 채 눈을 감았다.
그녀는 방에 남아 있었다.
햇빛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싫지 않았다.
적어도 이 며칠 동안은.
관리인이 왔다.
풀 한쪽 끝, 안전요원 좌석에 앉아 있던 남자였다.
현지인이었다.
검은 피부에 커다란 고글을 이마 위로 올려 쓰고 있었다.
키는 크지 않았지만 몸이 다부졌다.
색이 바랜 붉은 폴로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호텔 유니폼인지 사복인지 구별이 되지 않을 만큼 낡아 있었다.
양팔에 문신이 빼곡했다. 어깨부터 손목 가까이까지.
그는 파라솔을 접고 있었다.
풀 한쪽 끝에서부터 차례로.
하나를 접고, 다음 것으로 이동하고, 또 접고.
문신이 새겨진 팔뚝에 힘이 들어갈 때마다
잉크의 윤곽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바람이 세니까 부러지거나 날아갈 위험이 있는 것이겠지.
일곱 개쯤 되는 파라솔이 있었다.
그는 투숙객에게 다가가 짧은 영어로 양해를 구하고, 접었다.
파라솔이 접히면 철제 프레임이 아래로 내려오는 구조여서,
덱체어에 앉아 있으면 머리에 닿을 수 있었다.
그래서 잠깐 비켜달라는 것이었다.
일본인 부부가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났다.
서양인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같은 말, 같은 동작을 반복하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이어폰을 한쪽만 빼고 지켜보았다.
한국인 가족이 있었다.
정확히 언제 왔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눈을 감고 있는 사이에 자리를 잡은 것 같았다.
아내, 남편, 아이 둘.
덱체어를 두 세트 차지하고 있었는데,
아내와 남편이 각각 따로 앉아 있었다.
중간에 한 자리를 두고, 양쪽으로.
그리고 그 빈 자리가 내 바로 옆이었다.
아이들은 물에 들어가 있었다.
관리인이 아내 쪽으로 먼저 다가갔다.
같은 말을 했다.
바람이 세서 파라솔을 접어야 한다, 잠깐만 일어나 달라.
아내가 OK, 하고 일어났다.
관리인이 파라솔을 접었다. 익숙한 손놀림이었다.
아마 오늘만이 아니라 바람이 센 날에는 늘 이 일을 하는 것이겠지.
아이들이 마침 물에서 올라왔다.
아들이 하나, 딸이 하나.
초등학교 저학년쯤으로 보였다.
수영복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아내가 아이들을 보더니 갑자기 말했다.
"얘들아, 저 분한테 영어로 한번 말해봐."
나는 이어폰을 완전히 뺐다.
거리는 2미터가 채 되지 않았다.
아들이 말했다.
"엄마, 내가 뭐라고 해야 되는데?"
잠깐의 침묵이 있었다.
"왜 접어요, 라고 물어봐."
"영어로?"
"영어로."
"영어로 뭐라고 하는데?"
아내가 멈칫했다.
"폴드. 폴드잖아. 왜 접느냐고 물어봐."
관리인은 이미 다음 파라솔로 이동하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아이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멈춰 섰다.
고개를 약간 숙여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었다.
고글이 이마에서 미끄러질 듯 흔들렸다.
아들이 입을 열었다.
"어…"
관리인이 기다렸다.
"엄마, 나 뭐라고 해야 돼?"
아들이 다시 엄마를 돌아보았다.
관리인도 엄마 쪽을 보았다. 나도 엄마 쪽을 보았다.
아내는 남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보, 이거 영어로 뭐라고 해야 돼?"
남편은 내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는데,
아내의 질문에 선글라스를 올리며 이쪽을 보았다.
"뭘?"
아내가 모자 챙을 한 번 만졌다.
"아니, 방금 내가 한 말 안 들었어?"
"무슨 말?"
남편은 아내와 떨어져 앉아 있었다. 바람 소리에 묻혀 대화를 듣지 못한 것이다.
"아이, 됐어."
그 '됐어'의 톤은 결코 된 것이 아니었다.
아내가 다시 아이 쪽으로 돌아섰다.
"빨리 가서 말해봐."
아들은 관리인 앞에 서 있었다.
관리인은 여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문신이 새겨진 두꺼운 팔짱을 풀지 않은 채.
이런 상황이 처음은 아닌 듯한 자세였다.
"어…"
아이의 입에서는 그 이상의 것이 나오지 않았다.
관리인은 잠시 더 기다리다가,
미소를 짓고 아이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크고 검은 손이었다.
그리고 다음 파라솔로 이동했다.
그 다음 파라솔은 남편 것이었다.
관리인이 다가와 같은 말을 했다.
남편이 "OK"라고 말하고 일어섰다.
그 사이, 아내가 남편에게 작은 소리로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남편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관리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글 아래로 눈을 약간 가늘게 떴다.
웃는 것인지 아닌지 구별하기 어려운 표정이었다.
나도 비슷한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그는 다시 안전요원 좌석 쪽으로 걸어갔다.
넓은 등에 바람이 셔츠를 바짝 붙였다.
문신이 새겨진 팔이 느릿하게 흔들렸다.
나는 이어폰을 다시 끼고 물에 들어갔다.
25미터 풀을 4바퀴 돌고 올라왔을 때,
가족은 조용해져 있었다.
아내는 덱체어에 누워 눈을 감고 있었고,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은 다시 얕은 쪽에서 물장난을 하고 있었다.
파라솔은 모두 접혀 있었고,
햇빛이 덱 전체를 덮고 있었다.
관리인은 안전요원 좌석에 돌아가 앉아 있었다.
고글을 다시 내려쓰고,
풀 전체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젖은 채로 덱체어에 누웠다.
바람이 젖은 피부 위를 지나갔다.
등에 닿는 쿠션이 햇볕에 데워져 있었다.
어딘가에서 아이들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한국어였다.
눈을 감았다.
저녁에 방으로 돌아가자 그녀가 물었다.
"수영장 어땠어?"
"좋았어."
"뭐 특별한 일 있었어?"
"아니. 딱히."
"바람이 많이 분다며?"
"응. 꽤 불었어."
"그래서 파라솔은?"
"접혀 있었어."
그녀는 더 묻지 않았다.
태블릿을 집어들고 무언가를 읽기 시작했다.
나는 샤워를 하러 갔다.
뜨거운 물이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루 종일 쬔 햇빛에 피부가 달아올라 있었다.
물줄기가 닿는 곳마다 미세한 따끔거림이 있었다.
샤워를 끝내고 나와 창가에 섰다.
수영장이 내려다보였다.
파라솔은 여전히 접혀 있었다.
덱체어 위에 남겨진 수건 몇 장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그 가족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안전요원 좌석도 비어 있었다.
바람이 유리창을 두드렸다.
나는 한동안 서 있다가, 물을 한 잔 따라 마셨다.
아까 그 아이의 소리가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어.
짧고 당혹스러운 한 음절.
창밖에서 바람이 아직 불고 있었다.
접힌 파라솔의 뼈대가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