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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랑 작가 Apr 07. 2023

길을 가다

쓰러지지 않고 일어서야 하는 이유

새벽 5시에 버스 첫 차를 타면서 나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버스를 세 번 갈아타고 도착한 그곳은 칠곡 관음동이다. 초등학교 4학년의 큰 아이와 유치원에 다니는 7살의 작은 아이의 아침을 챙겨주기 위해서 매일 새벽 첫 차를 탔다. 당시 내 작업실은 대명동에 있었다. 칠곡 가람 유치원에 미술전담교사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침에 아이들에게 갔다가 8시 10분까지 출근을 해야 했다. 하지만 하루가 내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매번 시간이 부족했다. 아이들을 보내고 나면 다시 버스에 몸을 싣고 출근을 하는 그 시간은 화살 같으면서도 느리게 돌아갔다. 버스가 태전교를 지날 즈음이 되면 도로는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했다. 출근하려는 차들이 한 번에 몰려들면서 정체되었던 것이다. 태전교를 지나서 곧바로 내리면 길 건너 한참을 걸어 들어가야 유치원이 나온다. 입구를 들어서면 원장님과 6명의 선생님들이 회의하기 위해 원을 그리며 서있다. 최선의 노력으로 도착하는데도 난 늘 지각이었다. 쭈뼛거리며 틈에 끼여 서면 원장님의 짧은 잔소리 들려왔다. 


오전 타임엔 4세 반 교사를 도와 보조 역할을 하면서 각 반에 들어가 미술수업을 해준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4세 아이들의 하원을 돕고 나면 비로소 오롯이 나만의 시간이 찾아왔다. 지하로 내려가면 방과 후 미술수업하는 방이 나오는데 그때 하루의 피곤과 설움이 한꺼번에 북받쳐 오른다. 책임감이 강했던 난 지각으로 원장님에게 한 소리 듣는 것이 정말 싫었다. 면역질환으로 몸이 아파서 그랬는지 새벽부터 정신없이 보내는 시간들이 그랬는지 나도 모르는 설움으로 지하에 내려가는 순간 눈물을 울컥 쏟아내었다. 그때는 그랬다. 버스를 타면 떨어지는 햇살에도 눈이 부시다는 이유로 눈물을 흘렸다. 가슴이 미어지게 아팠다. 아이들과 함께 하지 못하는 시간들이 미안하고 서러웠다. 하고 싶은 게 많은데 참아내느라 서러웠다. 시간은 부족한데 해야 할 일들을 다 못해내면 또 서러웠다. 자존심을 냉장고에 처박아두고 나오는데도 이 자존심은 매번 고개를 치켜들고 나를 마주 본다. 쓰러질 듯 아슬하고 위태로운 순간들이 많았다. 그래도 난 나의 길을 걸어가야만 했다.


당시엔 수도꼭지가 고장 난 것처럼 눈물을 매일 달고 살았다. 





2004년, 작은 아이가 4살 때 이혼을 결심했다. 합의 이혼이었고 아이들은 아빠가 데리고 살기로 했다. 시댁과의 갈등으로 여러 가지의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원인은 내가 아프기 시작하면서였다. 원치 않는 결혼 생활로 잊고 있었던 나의 존재감이 나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혼이라는 제도에 맞춰 나의 역할은 착하고 순종적인 아내였지만 내 존재감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살아 있어도 죽은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그제야 느꼈다. 아파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음습해 오면서 진정 '살아 있음'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 가난과 가족의 무관심 속에서도 미대를 꿈꾸며 열심히 그림을 그렸던 내가 사라지고 없었다. 어쩌면 병이 난 이유가 꿈이 많았던 나를 억누르고 살아서 생긴 건 아닌지 돌이켜 보게 되었다.


                                           너에게 가는 길_종이에 볼펜_82x122_2007


친구처럼 지내면서 아이들은 끝까지 책임지겠다고 약속을 했고, 우린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지냈다. 아이들은 중학생이 될 때까지 우리가 이혼한 사실을 모르고 자랐다. 단지 엄마는 그림을 그리고 일을 하느라 바쁜 줄만 알고 있었다. 어느 날엔 큰 아이가 학교에서 가족을 동물에 비유하는 그림을 그려 왔는데 나를 문어로 표현했다. 왜 문어로 그렸냐고 물어보니 엄마는 바쁘니까 손이 여러 개 달려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매번 아이들 학교는 내가 찾아갔다. 미술선생님이라는 직함을 내밀어 교실 환경정리를 해주거나 미술 일일 교사를 해주기도 했다. 그리 많은 시간은 허락되지 않지만 아이들과 자주 대화를 나누려고 노력했고 아이들도 나에게 정신적으로 의지를 많이 했었다. 그렇게 이혼 후의 내 생활은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지경에 이르렀다.


작가의 이름으로, 엄마의 이름으로 여태껏 바쁘게 살아오면서 쓰러지지 않은 이유는 나 자신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비록 남들보다 늦게 가더라도 절대 포기는 하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이혼을 결심하면서 동시에 아이들에게 소원해진 책임에 대한 벌을 달게 받겠다고 신에게 말했다. 그리고 아이들을 당신 뜻대로 하시라고 신에게 맡겼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고 뜻은 하늘에서 이룬다고 했던가. 난 한치의 부끄럼 없이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겠다고 다짐했다. 예술은 자유로워야 하고 예술가는 진실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혼을 후회하지 않기 위해,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기 위해, 진심으로 고민하는 예술가가 되기 위해 난 길 위에 서 있기로 했다. 비록 비바람을 맞고 태풍을 맞을지라도 길은 잃지 않을 거라 확신하면서 난 오늘도 길을 걷는다. 


나의 길은 소명의 길이자 곧 영혼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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