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무장투쟁가 여인 남자현과의 만남
# 1
몇년전 평창동에 살던 시절, 경복궁에서 강남으로 가는 지하철에서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한 남자를 만났다. 나이를 기억하는 것은 나보다는 조금 위일 거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를 만났다기보다는 같은 지하철칸에 우연히 동승하고 있었다는 게 맞을 것이다. 약간 험상궂은 얼굴을 한, 키가 크고 덩치가 실한 사내였다. 그는 같은 칸에 탔지만 상당히 거리를 두고 서 있었고, 내가 그를 주목할 상황도 아니었다. 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말이다.
저녁 8시 무렵이었다. 만취의 취객 하나가 내 앞쪽에 앉아있었다. 문득 그가 내쪽을 노려보며 불쑥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눈을 감은 채 헤드폰을 끼고 있었던 나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취객의 목소리가 사뭇 커졌을 때에야 나는 헤드폰을 벗고 그를 바라보았다. 가만히 보니 나를 겨냥한 건 아니었다. 내 옆에 앉은 여성 한 분이 전화를 걸고 있었는데 그게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집구석에나 처박혀 있어야할 여편네가 어딜 기어다니면서, 수다나 떨고... 서방이 뭘 하는 놈인지 참 궁금하네.” 비아냥을 잔뜩 섞어가며 전화기를 든 여인에게 시비를 걸고 있었는데, 여자는 자못 당황한 듯 하면서도, 목소리만 줄여서 계속 통화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자 취객은 “사람 말이 말같잖나? 어딜 노려봐?”하며 이쪽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이거 뭐하는 겁니까? 이거... 술을 잡수셨으면 곱게 취하실 일이지...웬 행패냐구요?” 내 큰 목소리에 아주 잠깐 움찔하더니, 금방 기세를 회복해 심심찮은 적수를 만났다는 듯 내 멱살을 움켜쥐었다. “니가 뭔 상관이야? 니 마누라야? 엉?” 알콜 냄새가 뒤섞인 침이 얼굴로 튀고, 나는 그가 밀어붙인 힘에 자리에 다시 주저앉을 뻔 했다. 여자는 벌써 저쪽으로 도망쳐서 질린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승객들 중에서 작은 소리로 “왜 그러십니까”하는 항의가 나왔지만, 갑자기 사내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해지면서 이내 사라졌다.
그때 저쪽에 서있던 나이든 남자 하나가 성큼성큼 걸어와, 말없이 취객이 쳐든 손을 붙잡고는 꺾어내렸다. 마치 수갑을 채우듯 두 손을 엉덩이께로 잡아채더니 허벅지 아래를 쳐서 주저앉혀 버렸다. “다음 승강장에서 내리시오.” 그는 단호하게 취객에게 말했다. 마치 오라에 묶인 듯 꼼짝 못한채 무릎을 꿇은 취객의 입에서 신음소리와 함께 “알겠습니다”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다음 정류장에서 취객은 고개를 잔뜩 숙인 채 비틀거리며 문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러자 앉아있던 아주머니 한 분이 박수를 쳤다.
“아유, 수고하셨어요. 이쪽으로, 이쪽으로 와서 좀 앉으세요.”
“아, 예. 고맙습니다.”
사내는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권했던 자리인 내 옆으로 와서 앉았다. 나는 감사의 표시로 고개를 숙여보였다. “저쪽이 큰 봉변 당할 뻔했어. 이 아저씨가 아니었다면...” 이런저런 말을 걸던 아주머니가 내리고, 이쪽으로 쏠린 관심이 시들해질 무렵까지 그는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주위가 다시 평온을 되찾을 무렵, 내가 헤드폰을 다시 끼우려고 했을 때 문득 그가 낮은 목소리로 가만히 말했다.
“오랜 만입니다.”
나는 말을 잘못 들었나 싶어 쳐다보았다. 눈썹이 짙고 콧매가 서늘한 얼굴이었다.
“언제, 저를 본 적이 있었던가요?”
그는 대답대신 웃음을 지어보였다.
“대한민국 사람은 세 다리만 걸치면 다 아는 사람이라고도 하지 않습니까?”
“그렇군요. 위기에서 저를 구해주셨으니, 이제 확실히 아는 사람이기는 한 거 같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진짜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오래 전에 어디선가 저를 본 것 같지 않으신지요? 혜화동 골목에서나, 혹은 경북 영양의 수비마을 어귀에서나, 혹은 만주의 어느 주막에서.”
흠. 혜화동과 경북 영양, 그리고 만주가 어떻게 연결이 되는가. 그리고 내 삶이 얹혀있던 지명들과는 도무지 겹치지 않는다. 나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혹시 시간이 있느냐고 그는 다시 물었다. 초면의 사내에 대한 일말의 불안이 생겨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바쁘게 해야될 일이 있다고...
그랬더니 그는 수첩을 꺼내 자신의 전화번호를 적더니 그 페이지를 찢어 내밀었다. "당신을 위해서라도 연락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늦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불쑥 낯선 이에 대한 경계심이 커졌다.
“그런데, 누구시며,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저...남자현씨 아시죠? 그분의 당부로 왔습니다.”
남자현? 내가 얼마전 잡지에 기고했던 인물스토리의 주인공 그 독립운동가 여인? 그분은 1933년 하얼빈에서 돌아가신 분인데? 나는 당황하고 있었다.
“그분이 내게 무슨 당부를? 마치 남자현선생이 지금 살아계시는 듯 말씀하시는군요?”
그는 미소를 크게 지으며 웃었다. “물론 살아계십니다. 곧 선생님을 만나게될 겁니다.” 그 말과 함께 전철이 멈춰섰고, 그는 손을 들어 인사를 하고는 그 정류장에서 내렸다. 쪽지를 다시 펼쳐보며 나는 혼란스러웠다. 쪽지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010-####-0239, 蔡瓚” 다시 깜짝 놀랐다. 전화번호의 끝자리가 나와 같지 않은가. 나는 내 이름(이상국)의 소릿값을 따라 0239를 즐겨 써왔고, 가족들이 쓰는 폰의 전화번호까지도 모두 뒷자리는 그 번호를 쓰고 있었다. 蔡瓚(채찬)? 어쩐지 익숙한 이름이었다. 채찬이 누구더라?
# 2
그해 여름, 비가 잦았다. 나는 20년간 다니던 직장에서 벗어나 비로소 백수의 자유로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못가던 여행도 다녀오고, 습한 그 주택의 지하 골방에 들어앉아 허리가 아프도록 글을 썼다. 자주 보던 사람들과도 연락이 뜸해졌고, 혼자 있는 시간들이 주체할 수 없이 많아졌다. 그런 시절인지라 누구에게 연락을 하는 일이나 사람을 만나는 일이 성가시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지하철에서 만났던 흑기사 사내의 전화번호는 그해 9월까지 내 수첩 속에서 잊혀진채로 접혀있었다. 그해 여름 책 한권을 써서 출판한 뒤 기념회를 열기 위해 전화번호들을 뒤지던 끝에, 나는 낯선 필체의 그 쪽지를 다시 만났다. 위기에서 구해준 은인이기도 한데, 너무 무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출판기념회에 초청해야겠다.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짐작할 수 없는 행색을 하고 있었기에, 혹시 그런 자리를 좋아하지 않으면 어쩌나 싶기도 했다. 몇 번의 신호음이 갔는데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마침내 저쪽에서 수화기를 들었을 때 그때 그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많이 늦게 전화를 주셨군요. 내일 저녁 바쁘지 않으시면, 홍대 부근으로 좀 나오시기 바랍니다. 몹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는 거절의 말을 하려다가, 워낙 단호하게 그가 말하는 바람에 그냥 듣고 있었다. 출판기념회 초청의 말을 꺼낼 시간도 없었다.
“근데, 누가 기다신다는 겁니까?”
“선생님을 잘 아시는 분입니다. 물론 선생님도 그 분을 잘 아시고요.”
“혹시 다른 사람과 착각을 한 건 아닌지요? 저는 채찬선생님을 잘 모르는데...그리고 80년 전에 돌아가신 분을 살아있다고 말하는 것도 상식적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예. 그 당혹감은 충분히 이해를 합니다. 하지만 선생님도 삶의 이면이랄까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많은 생각을 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실 속에서 드러난 것들도 있지만, 그것의 원인을 이루는 것들, 그리고 보다 호흡이 긴 시간 속에서 인연으로 얽히고 풀리는 것들이 드러나지 않은 채 질서를 만들어내고 세상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에도 관심을 많이 가지신 분이 아닌지요?”
“그러면 채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비현실적으로 들릴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하시는군요?”
“하하. 물론입니다. 저는 다만 현실이란 말이 매우 협소하고 잠정적이며 진실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조금만 마음을 열고, 선생님이 이미 지어놓으신 길로 들어오시면, 오랫 동안 자라고 있던 큰 진실들을 발견하게 되실 것입니다.”
“홍대 어디로 가면 됩니까?”
그는 길을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광야1933’.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곳이었다. 이튿날 나는 40년지기 시골친구와의 선약을 미루고, 채찬이 말한 그 약속 장소를 찾아갔다. 오후 네시, 비가 내리고 있었다. 21세기에 남자현이 살아있다는 그의 말이 떠오르면서 어쩐지 오싹한 느낌도 들었다. 뭔가에 홀린 기분이었다.
홍대입구의 번화가와는 상관없이 주택가 저쪽 끝으로 올라가 주변을 몇 번이나 돈 끝에, 철제 대문에 한뼘도 안되는 목제 현판에 흘려쓴 글씨, 광야1933을 찾아냈다. 물을 먹은 나무에 글씨가 번져 얼핏 보면 알아보기도 어려웠다. 대문은 열려 있었다. 생각했던 카페가 아니었다. 키 큰 꽃들이 비를 맞고 있는 정원을 지나 현관 앞에 섰다. 그때 안에서 문이 천천히 열리더니 한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채찬이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내 우산을 받아 한쪽으로 세우면서 말했다. 실내는 조금 어두웠다. 제법 널찍한 거실이 펼쳐져 있고, 벽 주위에는 몇 개의 간소한 고가구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 청동제 촛대 두 개가 불꽃을 물고 서 있었다. 채찬이 방석을 가져다주며 앉기를 권했다. 대학생처럼 보이는 여인 하나가 안쪽 어딘가에서 작은 찻상을 들고 나타났다. 생활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그는 내 앞에 그것을 높더니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났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내 등 뒤에 서 있던 채찬은 그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갔다. 혼자 있는 틈을 타서 나는 찬찬히 벽을 둘러보았다. 한쪽 벽에는 무궁화나 진달래, 국화 그림이 걸려 있었고 또다른 쪽에는 졸업 기념 사진인듯한 단체사진이 확대되어 걸려 있었다. 내가 들어온 현관 옆에는 남자현 여사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그녀가 남긴 유일한 사진이라는 그 얼굴 사진.
# 3
아까 들어갔던 개량한복 여인이 찻상을 봐왔다. 이 여인이 채찬이 말하던 그 사람인가. 보얀 얼굴에 복숭아 체취가 풍긴다. 그녀는 차를 따르고는 다시 일어나 나붓나붓 사라진다. 도심 한 복판인데도 집안은 산중처럼 고즈넉하다.
따라놓은 차를 들고 마시며, 지금까지 일어난 일의 갈피를 생각한다. 아주 우연히 지하철에 채찬이란 사람을 만났고 그에게서 전화번호를 건네받았고, 통화를 한 끝에 낯선 집에 오게 되었다. 누군가가 나를 기다린다고 한다. 그 사람이 내가 일전에 기고한 적이 있던 80년 전 인물 스토리의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차 맛이 좋다. 눈을 감으며 남자현을 생각한다. 그녀는 경북 영양군 석보면 지경리라는 곳에서 1873년 12월 7일 태어났다. 131년 전의 일이다. 그리고 1933년 8월 22일 만주 하얼빈의 조선인 여관에서 돌아간 것으로 알고있다. 옥중 단식 투쟁으로 스스로 죽음을 맞았다. 이는 75년 전의 일이다.
향년(享年) 61세로 기록된 그의 생은 파란만장했다. 1896년 7월11일 남편 김영주가 의병 전쟁에서 사망함으로써 스물 네 살에 청상과부(靑裳寡婦)의 운명을 맞는다. 몸 속에는 아이가 자라고 있었기에 더 애통했던 일이었다. 이때 태어난 김성삼을 기르고 교육시키는 일에, 그녀는 미망(未亡)의 삶을 다 바치기로 다짐했다. 그리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고, 영양 시골의 촌부(村婦)는 홀연히 서울로 날아와 독립만세를 외치는 시위에 가담한다. 마흔 일곱 살 때의 일이다. 그해에 그녀는 만주로 갔고 목숨을 걸고 일제와 투쟁을 벌이다가 환갑의 나이에 장렬한 죽음을 맞는다.
스물 네 살까지의 삶과, 마흔 일곱 살까지의 또다른 삶, 그 이후의 전혀 다른 삶. 식민지의 고난 위에 펼쳐진 이 세 가지 삶은 한 사람을 관통한 운명이라고 보기엔 너무나 수수께끼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맛이 괜찮습니까?”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채찬의 목소리였다. 그는 차(茶)를 ‘타’라고 발음하고 있었다. 중국의 차의 고장인 복건(福建) 지방에서 그렇게 부른다는 얘긴 들어본 적이 있다.
“예. 아주 좋습니다.”
내가 다시 찻잔을 들며 대답을 하자, 그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중국에서 어렵사리 가져온 타입니다. 먹을 만 하실 겁니다. 그리고 남선생이 곧 나오실텐데, 혹시 궁금하신 사항이라도?”
궁금한 사항이야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다이겠지만, 그냥 나는 미소 지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혹시 선생님 자신에 대해 생각을 해보신 적은 없으신지요?”
“.......”
“예.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는 존재이기에, 자주 시공(時空)으로만 규정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같은 초인간의 눈에는 여러 시간에 걸쳐서 인간이 뿌리깊게 진행되고 있는 보다 큰 양상이 보입니다.”
“초인간? 초인간이라고 하셨습니까? 그게 어떤 의미입니까?”
나는 황당한 기분이 커져서, 급히 질문을 끼워넣었다. 그는 다시 웃으며 나를 부드럽게 바라본다.
“그건 차차 알게 될테니... 오늘은, 선생님의 초시간적 자아에 대해 제가 아는 만큼만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선생님은 1870년에 경북 영양에서 태어난 적이 있습니다. 우리 남선생과는 깊은 인연이 있었습니다. 세상의 입들과 기록들은 그런 흔적을 모두 지워버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겠지요. 선생님은 남선생님의 부친인 수회(守晦)영감(令監, 정3품 이상의 벼슬을 한 사람에 대한 호칭)의 칠십고제(七十高弟) 중에 일등 제자이십니다.”
“수회선생이라 하시면...통정대부 남정한선생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나는 형언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히면서, 그렇게 물었다. 채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영양 독립운동사에서 숨은 대공(大功)을 세우셨던 실천적인 지식인입니다. 선생님은 그 제자 이상국(李相國)이란 사람입니다.”
이상국? 그건 현재의 내 이름이 아닌가. 누군가가 장난을 치고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 표정을 짓자 채찬은 가만히 말했다.
“세상의 진실은 너무나 정교하여, 가끔 우연의 남발처럼 느껴질 때가 있는 법입니다. 선생님은 오래 전 그 이름을 다시 한번 살고 계신 것입니다.”
여기로 올 때부터, 많은 일이 정상적이지 않아보였다. 이건 꿈일 수도 있다. 어이없어 보이는 일들도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좀 덤덤해졌다. 그때였다.
“아, 남선생님이 나오십니다.”
낮고 긴박한 채찬의 목소리.
# 4
나는 고개를 들어 문이 열리는 안쪽을 보고 있었다.
이십대 중반쯤 되었을까. 눈이 크고 서글서글한 눈매를 지녔고 귀여우면서도 건강해보이는 체구를 지니고 있었다. 환하게 웃음을 지으며 다가와 찻상 저쪽에 있는 방석에 가만히 앉는다. 그리고는 나를 향해 손을 내민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악수라도 한번 해야죠?”
머쓱한 표정으로 나도 손을 내밀었다. 손매가 통통하고 온기가 느껴진다. 나도 그냥 이의없이 상황을 수용하기로 했다.
“예, 오랜만입니다.”
“그때와 다름없네요. 옷차림과 머리매무새, 그리고 수염이 없어진 것만 빼만 똑같으십니다.”
문득 그녀가 낯익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지금은...학생이신가요?”
“아, 아뇨. 작년에 졸업을 했고...지금은 방송사 취업 준비를 하고 있어요.”
“이름이, 남자현인가요?”
“예. 그래요. 자현이죠.”
“해방전 돌아간 독립운동가 남자현선생은 아시나요?”
그녀는 웃었다.
“그럼요. 저인 걸요. 저는 지금 그분의 스물 네 살로 화현(化現)해있는 셈이죠.”
“아, 왜 하필 스물 네 살로?”
“남자현에겐 스물 네 살이 아주 중요한 때였지요. 1891년 결혼을 했고 5년 뒤인 1896년에 남편을 잃었습니다.
그때 나이가 지금 저와 같았던 거죠. 나라가 타이타닉호처럼 침몰하고 있던 무렵, 산골까지 번진 의병전투에서 국오(菊塢)는 아름다운 목숨을 내놓고 말았습니다.”
“남편 김영주선생의 호가 국오였군요.”
“예. 의성 김씨로 전서(典書)를 지낸 매은공(梅隱公)의 12대손이었죠. 서릿발을 견디는 국화밭(菊塢)을 사모한 사람이었습니다. 도연명을 좋아했기에 다섯 말의 봉급과 호연(浩然)한 뜻을 어찌 바꾸겠느냐며, 벼슬 하기를 일찌감치 포기했었지요. 저물어가는 국운에 통음하면서도 내게는 항상 희망을 잃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를 잃은 건 큰 충격이었겠군요.”
“그는 저보다 11살이 많아, 제겐 큰 의지가 되었던 분입니다. 워낙 학문에 열심이었는지라, 불매서원(不賣書院)에서 손꼽히는 고제(高弟)였죠. 그 분은 7월 진보 전투에서 돌아갔는데, 얼마 있지 않아 무서리가 내리고 담밑에 소복같이 흰 국화들이 돋아났습니다. 저는 그 국화를 껴안고 흐느끼기도 했습니다.”
“그 말씀 들으니 여기 국화향이 감도는 듯 합니다. 그런데 불매서원은...?”
“아, 아버지가 경영하시던 학원이었지요. 원래 안동에서 열었는데, 그곳에 일본의 압박이 거세지자 영양으로 옮겼습니다. 아버지는 난초가 평생을 추위 속에 지내도, 향기를 파는 법이 없다(蘭一生寒不賣香)는 시에서 ‘불매(不賣)’ 두 글자를 취해, 현판을 걸었습니다. 어려운 시절에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에 대한 웅변이었죠. 실제로 수회재(守晦齋, 남정한)는 퇴계 이후 영남사림의 기풍을 지킨 일대 양심(良心)이었습니다. 많은 의병운동이 아버지의 휘하에서 전개되었고, 수회의 제자들은 모두 의병이기도 했습니다. 불매서원의 지하에는 의병무기고도 있었습니다.”
“수회라는 호는 주자학을 개창한 주희(晦)선생의 뜻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인 듯 합니다.”
“아버지는, 성인의 꿈을 낮에도 밤에도 꾸고 있어야 성인에 가까워진다고 하셨습니다. 성인이란 슈퍼맨이 아니라, 자기에게 성실하고 타인에게 공경을 지닌 마음 바탕을 티없이 실천하는 사람이라고도 말씀하셨지요. 아버지가 주자에 대해 이런 얘기를 해주신 기억이 납니다. ‘그분은 몹시 부지런히 공부하는 사람이셨다. 그가 공자의 뜻을 체계화한 것은, 불교의 화엄사상을 체계를 보고난 다음이었다. 가르침이란 우주와 인간의 이치를 설명하는 큰 틀을 짜는 게 필요하구나. 이렇게 생각하신거지. 그래서 주자는 이치와 현상을 나눠 생각하고 설명하는 이(理)와 기(氣)를 사유하기 시작하셨다네.’ 어린 저는 불매서원 뒷자리에 있던 기둥 뒤에 붙어서서 아버지의 강의를 들었답니다.”
# 5
“그랬군요. 저 이상국은 그럼 그때 어디에 있었습니까. 불매서원에서 공부할 때도 함께 하였습니까?”
“호호. 좀 이상한 질문이군요. 그럼요. 항상 앞자리에 앉아계셨죠. 선생님의 호는 공서(空嶼, 빈섬)라 하였지요. 쇠잔한 국운을 슬퍼하며 이 땅을 다시 새롭게 갈아엎어 오래전 연암(燕巖)이 ‘허생전’에서 갈파했던 ‘무인공도(無人空島, 유토피아)’를 만들고 싶다는 뜻을 담았다 하였습니다. 공서는 나보다 세 살이 많았는데, 수회스승이 분신처럼 아꼈던 제자였습니다. 공서는 어느날 학우들에게 자신이 가장 좋아한다는 시를 읊었습니다. 매죽헌(梅竹軒, 성삼문)의 임사부(臨死賦(죽음에 부쳐 시를 쓰다))였습니다. 절명시(絶命詩)라고도 하더군요. 모두가 의병 참전을 놓고 논의가 분분할 때, 불매서원이 떠나가도록 목청을 돋워 그는 이 시를 읊었습니다.
擊鼓催人命(격고최인명) : 둥둥둥 북소리 사람 목숨을 재촉하고
回首日欲斜(회수일욕사) : 고개 돌리니 해는 서산으로 지는데
黃泉無一店(황천무일점) : 황천가는 곳 주막 하나 없을텐데
今夜宿誰家(금야숙수가) : 오늘밤 누구 집에서 잠들리오
세조를 나으리라 부르며 저항하다가 몸이 찢기며 숨을 거두기 전에 고개 들어 읊었다는 시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에는 지켜야할 것이 있고 그것을 위해 기꺼이 육신을 버려야할 때도 있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나는 그날 그 열변을 듣고 그만 그를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사모하게 되었다고요?”
나는 어리둥절했다.
“예.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오랫 동안 끙끙 앓던 나는 부친에게 이 말씀을 드리고 말았습니다. 수회스승은 가만히 나를 들여다보며 말했습니다. ‘네가 그를 사모하는 뜻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이 지극한 것이리라. 오빠와 두 언니에 비해 유독 총명하여, 어린 시절부터 공부에 크게 뜻을 두었던 너였으니, 오죽하랴? 공서의 강지(剛志)와 혜안은 우리 서원의 자랑인 것을. 하지만 그가 기혼(旣婚)하여 솔가한 몸이니 더 이상 마음을 두지 않는 것이 옳겠구나.’”
“이미 결혼을 했었다고요?”
“예. 1889년 공서는 결혼을 했고 이미 자식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지요?”
“18살이 되던 해 내가 마음이 만든 병으로 시름시름 앓자, 아버지는 서둘러 혼처를 찾았습니다. 안동에서부터 집안끼리 잘 알았던 의성김씨 집안과 혼담이 오갔습니다. 내 나이 스물 한 살의 그 가을, 내 가마가 그 집에 당도했을 때 살짝 젖혀진 비단 가리개 틈 사이로 소담하게 피어오른 흰국화를 보았습니다. 햇살이 담장에 쏟아져 내려 그 꽃이 어찌나 눈부시던지...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내가 국오를 만나게 되는 인연입니다.”
“부군인 김영주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학문에서는 그대가 불매학원의 으뜸이었으나 스승의 가장 충직한 제자는 국오였습니다. 워낙 과묵하였으나 수회 선생의 창의(倡義)에는 언제나 그가 앞장 섰습니다. 안동 유림들은 영양의 거사(擧事)를 보잘 것 없다 하였으나 그것은 내막을 모르는 말들이었지요. 국오는 영양, 봉화 일대를 넘어 동해안의 삼척 일대까지 활동한 의병대의 중요 간부였습니다. 저 또한 남편의 뜻을 좇아, 의병들을 돕고 밀계(密計)를 전하는 일을 맡았었지요. 국오는 신혼 때에도 집에 머무는 일이 드물었습니다. 공부를 하러 불매서원에 가 있거나 병사들을 훈련하는 곳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국오는 6척 장신에 힘이 장사였습니다. 전투에서 총알이 떨어졌을 때 곡괭이로, 무장한 왜경을 쓰러뜨리기도 하였습니다.”
“국오와 공서는 서로 친했습니까?”
“친하다 마다요. 서로 죽고 못사는 친구였습니다. 나이 차이는 제법 났으나, 연장자인 제 남편이 공서를 깍듯하게 대했습니다. 학문에 대한 존경이기도 했고, 또 국오가 워낙 겸손한 사람이라...... 사랑에서 공서와 술잔을 기울이는 날에는, 늘 시를 읊으며 시국을 걱정하였습니다. 공서는 술이 약해서 몇 잔만 들이켜도 얼굴이 붉어졌는데. 그래서 두 분이 함께 마신 뒤에는 오직 공서만 취한 얼굴이 되어, 국오가 놀리기도 하였더이다. 어느날 두 분의 대화를 기억합니다. 국오가 물었습니다. 양혜왕(梁惠王)이 맹자에게 내 나라를 이롭게 하는 방법이 뭐냐고 물었을 때, 맹자는 ‘어찌 이로움’을 말하느냐고 꾸짖어 그 질문을 꺾어버렸소이다. 대학의 평천하(平天下) 장에 보면 이(利)로써 이(利)를 말하지 않고 의(義)로써 이(利)를 말해야 한다고 했으니, 양왕의 질문은 개인의 사사로운 이(利)가 아니라 나라를 생각하는 의(義)가 아니었는지요? 그런데도 맹자는 어찌 그것을 이로움을 취한다고 반박하였을까요. 이렇게 묻자 공서가 술잔을 기울이고는 대답하더군요. 국오, 맹자는 이로움 자체가 잘못이라고 말한 게 아닙니다. 양혜왕은 이오국(利吾國)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중간에 들어있는 오(吾)자에 들어있는 이기심을 나무란 것입니다. 나라에는 왕 말고도 대부와 선비와 서인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오로지 개인소유로 나라를 들먹이며 그것이 이롭게 되는 것을 물었으니 성인이 적당하지 않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것이 단순한 이로움이 아니라 나라를 위한 의로움이 되려면, 더욱 치열하게 무사(無私)와 공평(公平)의 대의를 지녀야할 것입니다. 나라가 침탈당한 데 대한 우리의 울분도 개인적인 원한이나 불편에 대한 분개나 외세에 대한 경멸 따위에 그쳐서는 안됩니다. 큰 명분을 지니고 하늘에 합당한 이치로 싸워야 맹자같은 성인도 박수를 칠 것입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이 말씀을 가슴에 새겼습니다.”
“김영주선생을 여읠 당시 상황을 좀 말씀해주실 수 있으신지...”
대화가 진행되다 보니 인터뷰처럼 되어가는 걸 느꼈다. 남자현은 나의 물음에 말을 멈추고는 가만히 손수건을 꺼내 눈자위를 닦았다. 곁에 있던 채찬이 가만히 내 빈 찻잔에 차를 따랐다. 그제서야 나는 남자현이 아래위로 검은 옷을 입고 있음을 깨달았다. 상중(喪中)이라는 의미일까.
“김도현 의진(義陣)과 영양 불매비밀단(不賣秘密團)이 청송 일대를 지나가는 왜적을 협공하기로 한 것은 공서의 아이디어였습니다. 그리고 불매 쪽의 타격선봉장을 맡은 사람도 공서였고요. 그런데 거사를 앞두고 공서가 뱀에 물리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아버지는 급히 국오를 내세워 영양의군을 지휘하게 했습니다. 서른 명의 비밀단이 진보의 골짜기에서 왜적 10여명을 만났습니다. 이 정도면 우리 병력으로도 해결할 수 있겠다. 김도현 의진과 협진을 차리러 청송으로 가던 비밀단은, 굳이 그럴 필요까지도 없겠다는 판단을 했던 모양입니다. 국오가 신호를 하자 총성이 울렸고 왜적 수명이 그 자리에서 쓰러졌습니다. 그러자 큰 바위 뒤에서 벌떼같이 많은 적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순식간에 우리 의병들을 쓰러뜨렸습니다. 겨우 두 명이 살아남아 강으로 도망쳤습니다. 그 전투의 참담을 이루 말하지 못합니다. 스승은 이 충격으로 큰 병을 얻었습니다. 한꺼번에 제자 스물 여덟명을 잃었으니 오죽하겠습니까. 거기에 사위이자 애제자인 국오까지 끼어있었으니... 그날 김도현 의진은 이쪽으로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뭔가 작전에 차질이 생긴 것입니다. 공서는 다행히 사고 때문에 목숨을 잃지 않았지만, 국오를 자신이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며 비통하게 울었습니다. 못먹는 술을 마시고 대취해, 우리 집앞 국화밭에 쓰러져 있는 것을 제가 간호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전투 이후에 영양의 의병활동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당국에서 비밀단을 색출하는 작업을 시작했고, 마을사람들 속에도 간첩을 심어 동태를 파악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긴 뭐, 수회재 남정한선생이 자리에 누우셨기에 실질적인 전력 복원도 어려웠습니다.”
갑자기 죄책감이 몰려왔다. 결국 나의 부재 때문에 그가 전사했다니...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기 어려웠다. 그녀는 다시 손수건으로 뺨 주위를 닦아냈다.
“하지만, 국오가 돌아간 건 운명이었습니다. 나라가 사라지는 판이니, 선비된 자로서 마땅히 해야할 일을 하였던 것이니까요. 그 전날밤 저는 꿈을 꾸었습니다. 남편과 함께 산꽃이 만발한 고개를 넘어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큰 바위 쪽에서 공서가 나타나 이쪽으로 뛰어오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바라보니 공서 뒤에는 거대한 구렁이 한 마리가 달려들고 있더군요. 남편은 칼을 뽑아 구렁이에게로 달려가 그 목을 깊이 찔렀는데 그만 칼이 부러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세 사람은 혼비백산하듯 달음질을 쳤는데 문득 모두 벼랑에 서게 되었지요. 그런데 달려오던 구렁이가 우리 바로 앞에서 고개를 푹 꺾고 죽어버리더군요. 그제서야 살펴보니 남편의 가슴께에 큰 상처가 생겨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 꿈을 저는 국오에게 얘기하지 못했습니다. 전투를 치러야할 사람에게 어찌 괴이한 흉몽을 꺼내겠습니까.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때 꿈이야기를 했던들, 왜적을 만난 순간에 좀더 신중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싶은 통한이 앞섭니다.”
“당시 유복자(遺腹子)가 있었는데...”
“예. 일곱 달 쯤 되었을 겁니다. 겨울 무렵이었는데 통 들르시지 않던 국오가 화차(花茶)를 마시고 싶다면서 들렀습니다. 그날 밤 그는 내게 이런 시를 읊어주었습니다.
겨울은 겨움이니
지겨움 역겨움 힘겨움의 시절이로다
지겹지 않고 역겹지 않고 힘겹지 않다면
어찌 희망을 품으리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겨움과 역겨움과 힘겨움이 없다면
어찌 죽음의 선을 넘으리 넘어서 다시 살아오리
추운 날 국화차 마시며 생각하네
지난 가을을 마시며 생각하네
지금이 춥지 않다면
추워서 얼어죽지 않는다면
어떤 꽃이 다시 보이리
봄은 보는 일이니
오롯이 보기 위하여 이 겨울 이토록 겨움이니
유란(幽蘭)아
겨운 네 속에서 이미 봄을 본다
이런 노래를 불러준 것은, 유복자의 운명을 예감했기 때문일까요? 나는 겨울과 봄을 이렇게 가슴 떨리게 말해준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유복자의 아잇적 이름을 동춘(冬春)이라고 지은 것은, 저 시 때문이었습니다.”
“남자현을 남편은 유란이라 불렀군요. 국오와 유란. 참 잘 맞는 별호(別號)입니다. 그후 공서 이상국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나 자신의 안부가 문득 궁금해져서 물어보았다. 그러자 남자현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저는 여기까지 밖에 모릅니다. 저는 스물 네 살이고, 막 국오를 잃은 슬픔에 찬 미망인이니까요. 임신한 몸으로 통곡하며 남편상을 치르는 때이니까요.”
그때 채찬이 나서서 말했다.
“오늘 두 분의 대화는 이쯤이 좋겠습니다. 이후 다시 만날 일이 있을 것입니다.”
내가 일어서서 나올 때 남자현은 내게 반지 하나를 내밀었다.
“남편이 그날 대장이 되어 전투를 치르러 갔을 때 스승이 끼워주었던 반지입니다. 이 반지는 원래 의병장이던 공서가 끼고 있던 것이었죠. 불매단의 전통으로, 의병장의 무사를 빌며 서원에서 이 반지를 전달했지요. 국오가 돌아간 뒤 뒤 반지를 제가 따로 보관하였는데, 원래 이것을 끼고 있던 당신에게 돌려주라는 스승의 말씀이 있었기에 지금 드리는 것입니다.”
그녀는 내 손가락에 그것을 끼워주었다. 신기하게도 딱 맞았다. 채찬은 홍대입구 전철역까지 나를 배웅해주었다. 전철을 타려고 지하로 내려왔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홍대입구’라고 씌어진 역 명칭 옆에 ‘239’라는 숫자가 씌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239? 채찬의 전화번호 0239가 떠올랐다.
집으로 돌아와 채찬을 만난 날짜를 따져보았다. 8월11일은 음력으로 7월11일. 바로 김영주가 진보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그날이었다.(일제는 1896년 1월1일 을미개혁으로 음력 대신 양력 날짜를 강제로 쓰게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당국의 시책에 저항해, 여전히 음력을 썼다. 하지만 곧 양력 날짜가 대중화된다.)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가만히 만지작거린다.
# 1
2009년 1월에 월간중앙의 대표를 맡고있던 선배가 지리산 자락에서 문득 전화를 했다. “여기, 칠불사 절 부근의 호젓한 산장인데, 후배 올 수 있겠어?” 백수 시절인지라 경주 고향에 내려가 있던 나는, 그 말 한 마디에 부산, 마산, 진주를 거쳐 하동으로 달려갔다.
눈발이 부슬거리는 계곡에서 그와 나는 문사철(文史哲)을 넘나들며 밤 깊도록 얘기를 나눴다. 내 블로그를 드나드는 오랜 팬이었다는 그가 나를 부른 건, 단순히 글에 대한 관심 뿐만은 아니었다. 내게 역사와 관련한 기획 취재를 맡아달라는 당부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그리고 조선여인 스토리인 ‘미인별곡’의 연재도 주문했다. 그 분야에 몇 권의 책을 낸 적이 있는데다가 딱이 다른 일도 없었던 나로서는 고맙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일을 맡고 보니 작년에 겪었던 기이한 스토리가 생각났다.
1933년에 돌아간 사람이 젊은 여인으로 환생해있는 이 사실을 생생하게 다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홍대입구의 그 집으로 찾아가보기로 했다. 저녁 나절 나는 익숙한 길을 지나 그때 내가 꺾었음직한 좁은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그곳은 주택가가 아니었다. 주택들이 늘어서있던 자리에는 유리문으로 된 상가들이 늘어서 있었다.
한 가게로 들어가 상인에게 물어보았더니, 여긴 수십년 전부터 상가 거리였다고 대답한다. 무엇인가에 홀린 기분이었다. 그때 내가 들어가서 중국 복건의 ‘타’를 마셨던 것은 그럼 뭐란 말인가. 내 손가락에 여전히 끼워져 있는 이 반지는 뭐란 말인가. 그때 남자현의 집이 있었던 것 같은 길 앞에서, 채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거신 전화번호는 없는 번호이오니 다시 확인하시고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 2
그해 2월 나는 3.1절 90주년을 기념해 유관순 취재를 맡았다. 충남 천안시 병천면의 생가와 매봉교회를 둘러보고 그의 부모(유중권, 이소제)가 처참하게 살해되는 4월 1일 아우내장터의 시위현장을 가만히 재구성하고 있었다. 숙부인 유중부와 유관순은 시신을 떠메고 헌병 주재소로 달려가 강력하게 항의하다가 마침내 투옥된다. 17세 소녀가 가슴 속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화가 난 헌병이 칼을 뽑아 뺨을 찔러 피가 흐르는 그 상황에서도, 그들을 꾸짖고 있는 무서운 소녀. 들끓는 격정을 식히려 자하문 터널 위쪽의 부암동으로 산책을 나갔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잘 지내셨습니까?”
채찬의 목소리였다.
“혹시 지금 부암동 쪽이라면 삼청감리교회로 오실 수 있겠습니까? 거기 오시면 ‘꿈과 쉼’이라는 어린이도서관이 있는데 거기로 오시면 됩니다.”
일거수일투족을 꿰뚫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지난번 그들을 만날 때도 그랬듯이 이 상황이 상식적인 것은 아니기에 그걸 화낼 형편도 아니었다. 혹여, 좋은 스토리감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교회로 가보기로 했다. 고졸(古拙)한 서양식 건물이 인상적인 교회였다. 도서관 문은 열려 있었는데,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잠시 뒤에 채찬이 들어왔다. 그 뒤에 한 여인이 따라왔는데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분명 남자현이었는데, 몇 개월 전과는 달리 중년의 여인이 되어 있었다. 이런 일도 있을 수 있는가. 채찬이 처음 봤을 때 꺼냈던 ‘초인간’에 대한 얘기가 떠올랐다. 여러 시간에 걸쳐서 인간이 뿌리깊게 진행되고있는 보다 큰 양상을 보여주는 차원에서라면, 그 ‘영화’를 연출하는 감독이 시간을 압축했다고 해서,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는가.
잠깐 있으니 한 여인이 차를 들고 왔는데, 일전에 홍대입구에서 보았던 그 개량한복 여인이다. 반가운 눈짓을 했더니 살풋 웃으며 답례를 한다. 채찬과 한복 여인은 나와 같이 몇 개월 전과 별 다름이 없다. 오직 남자현만 바뀌어 있었다.
# 3
“그간 잘 계셨습니까?”
나의 인사에 남자현은 입을 깊이 다물면서 웃었다.
“그 말씀이 맞네요. 23년 동안 저는 잘 지낸 듯 합니다. 집안의 남자들이 사라지고 난 뒤, 반가(班家)의 여자로서 품격과 살이를 함께 지키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쓴 것 같습니다.”
“수회 남정한선생은 언제 돌아가셨습니까?”
“아들을 잃고나신 이태 뒤(1897년)였습니다. 동춘(김성삼의 아명)을 얻고나서 병석에서도 뛸 듯이 기뻐하셨는데... 영양 의병전투가 있고 난 뒤 일제의 압박을 받은 당국에서 기동도 못하는 아버지를 잡아가 고문을 하였습니다. 스승의 제자가 대대적으로 참여한 전투였기에, 일제의 눈초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지요. 저 또한 위태로운 지경이었기에 한 동안 시어머니를 모시고 영양을 떠나 잠적하였습니다. 그때의 상황이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수회선생의 생몰(生沒) 시기에 대한 자료가 전혀 남아있지 않던데요?”
“일제가 아버지의 시신조차 가져가지 못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헌병대 주위에 가묘로 묻혀있던 것을, 몇 달 뒤 남은 제자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파내서 수비면 계동의 아주 깊은 산자락에 묻었습니다. 아버지처럼 동네에서 존경받던 오빠 남극창은 부친이 돌아간 뒤에 의문의 죽음을 당했습니다. 어느날 술을 먹고 돌아오다가 누군가의 칼에 찔렸습니다. 오빠에게는 두 살 난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남훈오라고 하였지요. 훈오는 자라나서 수비면에서 대서방(代書房)을 하였습니다. 내가 결혼도 시켜주고 살이도 보아주고 했는데...”
영양 남씨 집안이 피폐해진 것은 남극창의 손자인 남재각씨(88세)의 증언으로 들은 바 있다. 훈오는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그가 재각이다. 재각이 돌을 지날 무렵, 어머니가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갔다. 남자현이 만주로 떠난 뒤 이 집안에 대한 일제의 핍박은 더욱 심해졌다. 견디다 못한 훈오는 세 살바기 재각을 버리고 야반도주를 했다. 그 또한 만주로 갔는데, 그곳의 척식회사(拓植會社)에서 글씨 쓰는 일을 했다. 졸지에 고아가 되어버린 어린 남재각은 동네 젖동냥으로 간신히 살아났다.
“진보면에서 효부상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만...”
“생각하면 쑥스러운 일입니다. 그런 것을 받는 일이 가당키나 한지...청상과부로 아들을 키워온 시어머니는 졸지에 아들을 보내고나서 정신이 그만 이상해지고 말았지요. 근 이십년 동안 망령이 들어 저를 무던히도 괴롭혔지요. ‘내 아들을 잡아먹은 것’이라며 밤마다 달려들어 머리칼을 쥐어뜯을 때마다, 제 마음 속에 숨어있던 죄책감이 떠올라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동춘을 껴안고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릅니다. 동춘아, 언제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오느냐. 그렇게 물었지요. 1915년에 돌아가셨으니 짧지 않은 세월이었습니다. 마을사람들은 우리집을 가리켜 ‘눈물집’이라 하였지요. 남편 잃고 망령 시모 모시느라 날마다 흐느낀다 하여 그렇게 붙였다 하더이다. 그 시모상을 당하여 3년간 묘소에 여막을 치고 통곡을 하고 나오니, 진보면에서 상을 주었습니다. 그 상 덕분에 집안이 감시받는 것이 면제되고 살이가 나아졌습니다.”
# 4
“저는 어디로 갔습니까?”
조금 질문이 이상하긴 했지만, 그쯤에서 궁금증이 일어 견딜 수 없었다.
“아, 공서. 그분은 항상 제 곁에 있어 주셨지요. 그 또한 영양 전투 이후에 늘 감시받는 사람이었는데, 그래도 불매서원을 지키려고 무던히 애를 썼습니다. 스승의 남은 제자들을 모아 다시 강의를 시작했지요. 공서는 어느날 밤의 까닭 모를 화재를 겪게 되었는데 이 때 그의 부친과 아내를 잃고 말았습니다. 국오가 간 빈 자리에 공서는 제게 큰 힘이었습니다. 집안의 사사로운 문제를 모두 도와주고, 아이의 교육도 맡아주었습니다. 그일만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삶도 많이 달라졌을지 모릅니다.”
“그일이라면?”
“눈물집에서 청상과부로 살고있는 내게, 일본 헌병 하나가 관심을 가졌던가 봅니다. 후지와라라고 했는데... 이 사람이 어느날 밤 집안으로 숨어들었습니다. 며칠 전부터 후지와라가 나를 노린다는 소문을 들은 공서는, 혹시나 하고 집 근처에서 지키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가 담장을 뛰어넘자 공서도 함께 뒤따라 왔습니다. 나는 밖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듣고는 장도를 꺼내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후지와라는 총을 빼들고 문을 열었습니다. ‘쉿.’ 그는 검지손가락을 들어 입술에 갖다 대고는 군화를 신은 채 마루를 밟고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때 공서가 달려들어 총을 나꿔채려고 했습니다. 총은 마루에 떨어졌고 곧 두 사람은 뒤엉켰습니다. 후지와라는 체구가 건장한 사내로, 공서가 감당하기엔 어려운 사람이었지요. 엎치락뒤치락하던 끝에 후지와라가 공서의 멱살을 쥐고 내리누르며 허리춤의 칼을 뽑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때 내가 뛰어내려가 그의 등을 은장도로 깊이 찔렀습니다. 공서는 몸 위에 축 늘어진 후지와라를 제치고 일어섰습니다. 그와 나는 그저 눈만 마주 보며 한참 동안 말없이 서 있었습니다. 한참 후에 죽은 일본인을 업고 걸어나가며 그는 말했습니다. ‘나는 간도로 갈 겁니다. 이름은 개명을 할 것이고... 239라는 비밀번호를 쓸 것이니, 혹시 만나게되는 상황이면 그것으로 연락을 합시다. 건강하시오.’ 이것이 영양에서 그를 본 마지막이었습니다. 후지와라의 시신은 찾을 수 없었고, 결국 실종 처리되었던 것으로 압니다.”
나는 괜히 목이 칼칼해져왔다. 그게 정말 나였다면 그 긴박했던 날들의 기억은 모두 어디로 가버린 것인가. 마음을 진정시키며, 물었다. “그 뒤에는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힘겹게 어머님을 모시느라, 의지할 곳이 필요해서 교회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세상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요. 교회에 다니면서 일본어도 조금 배웠고, 또 양잠 기술에 대해서도 알게 되어, 영양에서는 처음으로 뽕밭과 누에농사를 시작하기도 하였습니다. 원래 수비교회를 다녔는데, 나중에 목사님이 계동교회를 만드실 때, 내가 발벗고 나섰지요. 1911년쯤의 일이었는데, 당시 교회는 만주 독립운동과 연결하는 중요한 고리이기도 했습니다. 아버지의 남은 제자들은 상당수 만주로 건너갔습니다. 석주 이상룡선생은 부친이 안동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분이고, 일송 김동삼선생은 시댁 쪽의 친척이었기에 연락이 오갔습니다. 하루는 서울의 한 교회를 다니던 한 신도가 고향인 영양에 찾아왔습니다. 그 여인은 3월 첫날에 큰 만세운동이 일어날 것이라는 얘기를 해주었고, 그때 서울에 올라오면 손정도목사를 소개시켜주겠다고 하였습니다.”
# 5
“만주로 간 공서는 그뒤 기별이 없었습니까?”
그 말에 남자현은 빙긋이 웃었다. 그러면서 옆에 서 있던 채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비밀명 239를 쓰는 채찬으로 변신하였지요.”
나는 너무 놀라서 순간적으로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그럼 당신이 나였던 말이오?”
채찬은 가만히 대답했다.
“불매서원에서 함께 공부했던 최영호와 나는 이름을 각각 김찬, 채찬으로 바꿔 만주에서 활동을 하였습니다. 이후에 많은 동지들이 들어왔지요. 안동에서는 한일합방 후 세 차례에 걸친 만주 대이동이 있었는데, 1피(避)가 1911년 1월 석주(이상룡)선생이 인솔한 대열이었고, 2피는 1912년, 3피는 1913년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떠난 건 3피 때였는데 만주행 기차를 타고가서 단동에서 내려, 다시 그곳에서 마차를 타고 통화현으로 가서 이미 연락을 취해놓고 있던 동지를 만나 활동을 시작하였지요.”
내가 전시대의 나를 만나다니... 그렇다면 이 사람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이 서울에서 활동하는 ‘내’가 둘이란 말인가. 그런 나의 눈빛을 읽기라도 했는지 채찬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늘 당신을 만난 것이, 내가 할 일의 끝입니다. 이제 더 이상 나타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당신도 나를 보며 놀랐겠지만, 나 또한 당신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살았던 세상으로는 도저히 짐작할 수도 없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아쉽지만 이만 해야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교회를 나왔을 때 채찬은 전처럼 배웅하지 않았다. 문을 닫고난 뒤 문득 다시 열어 안을 보고 싶은 충동이 생겼지만, 참았다. 왠지 그래서는 안될 것 같았다.
# 1
월간 잡지에 8.15 기획으로 ‘여자 안중근, 남자현을 아는가’라는 기사를 커버스토리로 싣기 위해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마침 7월에 한 경북지역 신문에 ‘영양 지역 스토리텔링’으로 그를 다룬 바 있기에 이번에 한 작업은 보강취재였다. 영양군 생가와 사당 일대를 돌아보고 서울의 월곡동에 살고 있는 친손자 김시련선생, 또 상주에 살고 있는 친정 손자 남재각선생, 그리고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또다른 친손자 김시복선생과도 인터뷰를 했다. 워낙 자손이 귀한 집이라 그분들을 찾아낸 것만도 무척 다행한 일이지만, 사실 그들에게서도 기존의 성긴 자료 이외에 별로 추가할 만한 내용들을 취재해내지 못했다. 역사의 먹먹한 단절감같은 것이, 중언부언하는 기억들 너머에서 가물거렸다.
지난번 삼청감리교회에서 남자현을 만났을 때, 정작 중요한 것을 묻지 못했다. 어떻게 47세나 된 시골의 보통여인이 목숨을 걸고 만주에까지 뛰어들게 되었는가. 무장투쟁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이 코페르니쿠스적인 인생 대전환을 설명할 키워드는 무엇인가. 남자현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이 부분이 아닐까 싶다. 일제에 목숨을 잃은 남편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이렇게 설명하면 간명하긴 하다. 하지만 무려 23년이나 지난 뒤에 그런 결심을 한단 말인가? 3.1운동이 그녀를 각성시켰는가.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 또한 한 시골여자를 총을 든 전사로 바꿀 전적인 계기로 보기에는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점이 있다. 아이도 대강 다 키웠고, 이제는 인생에 못다한 미션을 할 시간이 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것도 후세에서 편안히 앉아서 늘어놓는 풀이일 뿐이다. 아기를 다 키우면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할 순 있는 건 아니다. 3.1운동 직후 왜 영양으로 돌아가지 않고 만주로 갔는가. 그러나 그 질문을 받아줄 그녀는 연락이 없었다.
8월22일 새롭게 개통한 스마트폰의 ‘카카오톡’에 새 친구 하나가 등록됐다. 유란이라는 이름이었다.
유란?
유란이 누구더라?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그런 이름은 없었다. 잠깐 뒤에 메시지가 날아왔다.
“안녕하세요. 절 기억하지요?”
“누구...”
그렇게 대답하려다가 잠깐 스치는 것이 있었다. 지난번 얘기에서 남자현의 남편 국오가 아내에게 주는 시에서 쓴 호칭이 아닌가! 나는 썼던 메시지를 다시 지우고 썼다.
“남자현선생이군요. 이번엔 연세가 어떻게...?”
이상한 질문이지만, 그렇게 물을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대답 대신 프로필 사진을 바꿨다. 그녀의 사진으로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영정 사진’이었다.
아, 8월22일.
그녀가 하얼빈의 조선인 여관에서 눈을 감던 바로 그날이었다. 임종 직전 남자현선생과의 카카오톡 대화라... 하지만 그도 자판을 타이핑하는 하는 일이 쉽지 않은 듯 답신이 느렸다. 몇 마디 얘기를 나누던 끝에, 이렇게 말했다.
“실례가 되지 않으면 지금 계신 그 서재를 방문해도 될지요.”
“지금요?... 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30분쯤 뒤에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소리. 조금 수척하지만 여전히 강해보이는 그녀가 들어왔다.
“여기 앉으시지요.”
의자를 내밀자 깊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천천히 앉았다. 감옥에서의 고통이 육신 속에 가득 배어있는 듯 했다. 그녀를 위해 차를 내오게 했다. 찻잔을 들면서 그녀는 나를 천천히 응시했다. 나 또한 61세의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이보다는 훨씬 젊고 단단했다. 투쟁가라고 하기엔 너무나 얼굴이 평온하고 따뜻해보였다.
# 2
“공서, 당신을 이렇게 오랫 동안 다시 볼 수 있어서, 참 좋습니다. 운명에게 고맙기 그지없어요.”
“유란이 그렇게 말하니 나도 기쁩니다.”
나도 모르게 그녀를 유란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나는 몇 가지 궁금했던 것들을 질문하기 시작했다.
“만세운동 때 갑자기 서울로 올라오게된 까닭이 무엇이었습니까? 또 만주로 갈 결심을 한 계기같은 게 있었습니까?”
“교회에 다니게 되면서 삶에서 중요한 것이 현실의 복락(福樂)이 아니라, 옳은 일을 하는 신념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옳다고 여기는 것을 그저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궁행함으로써 옳지 않은 것을 옳게 만드는 일이, 참으로 귀한 가치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만난 많은 분들과 이런 문제에 관해 난상토론을 하였습니다. 그간에 나는 내 삶을 이토록 피폐하게 만든 왜적에 대한 분노가 늘 들끓고 있었고, 또 아버지와 남편을 앗아간 원수에 대한 증오가 소용돌이쳐서, 이런 것들이 생겨나는 원인을 직시하지 못하였습니다. 그제서야, 공서가 오래 전에 맹자를 인용해 한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보다 큰 것을 위한 의로움에 매진하는 것이, 나를 덜 공허하게 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지요.”
“아, 그랬군요. 그렇다고 해도, 나이가 적지않은 여자의 몸으로 그런 결심을 내리기엔...”
“그때 나는 무엇인가 깊이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것이 없었습니다. 무엇을 해도 나라가 없이는 아무 것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내가 왜의 헌병을 찔러죽이고난 뒤 내 꿈에는 그자가 두억시니처럼 쫓아다녔습니다. 공서가 만주로 떠나고난 뒤 문득 뱀을 잡으러 다니던 땅꾼들이 산 속에서 헌병의 시신을 찾아냈습니다. 물론 공서가 내가 꽂은 장도를 빼냈으리라 생각하지만, 헌병이 나를 쫓아다니는 것을 아는 이들이 있는지라 내심 불안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다 붙잡혀 죽느니 차라리 가치있는 무엇을 하자. 그런 생각도 하였습니다.”
“만주의 생활은 어땠습니까?”
“거기는 기본적으로 사람이 살 데가 아니었습니다. 법도 치안도 없는 정글같은 곳이었습니다. 마적떼가 돌아다니며 약탈을 일삼았고, 농토는 거칠었고, 의지할 동지도 많지 않았습니다. 안동서 먼저 들어온 선배들이 여러 가지 배려를 해주고, 또 같은 조선인들끼리 뭉쳐서 농사도 짓고 서로 의형제, 의자매를 삼으면서 낯선 땅에 정을 붙이려 애썼던 것 같습니다. 가장 문제는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끼리도 서로 반목하는 일이었습니다. 교회에서 배운 간호와 간단한 의료행위는 그곳에서 참 요긴했지요. 아픈 병사들을 치료하고, 또 고독과 불안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위로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필요하였습니다.”
“그곳에서 농사도 지었습니까?”
“물론이죠. 독립투쟁을 하는 동안에도 한쪽에선 그 전투식량을 대는 농사일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특히 이앙을 하고 농토를 비옥하게 유지하는 기술은, 조선인이 간도에 퍼뜨렸다고 할 만합니다. 농사를 짓는 틈틈이 선교 활동과 교육, 의료를 병행했습니다. 처음에 간도에서 내가 생각한 것은 ‘살리는 전쟁’이었습니다. 먹여 살리고 가르쳐 살리고 치료해 살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또 분열한 동족들에게는 서로 손을 잡게 하여 모두를 살리는 일을 하고 싶었지요. 위기에 처한 도산(안창호)을 구하고, 일송(김동삼)의 구명운동을 펼쳤던 일이 큰 보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엔 무장투쟁에 더욱 힘을 썼는데...?”
“그랬지요.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고 교묘해지면서, 치명적인 타격이 필요해졌습니다. 여성이라고 그냥 앉아있기에는 너무 중요하고 위태로운 순간이었습니다. 1909년의 도마(안중근의 세례명, ‘토마스’) 의거가 우리의 행동점을 시사하는 모델이었지요. 요인 암살이야 말로, 조직적인 힘을 갖춘 일제를 일거에 굴복시킬 수 있는 타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3
“공서와는 언제 다시 만났나요?”
“독립투쟁을 좀 더 무섭게 하자는 논의가 내부에서 나오고 있을 때였습니다. 1926년 당신과 나는 무기를 구해 조선으로 잠입했지요. 사이토 조선총독을 저격하여 식민정책 자체를 뒤흔들어보자는 전략이었습니다. 총독을 노린 저격 작전은 그 전해에도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다만 내가 갈 때 만주의 투쟁가들이 상당히 기대를 지녔던 대목은, 내가 여성이기 때문이었을 거예요. 이것은 일제의 허를 찌르는 전략이 될 수도 있거든요. 독립군들 사이에서 나는 임기응변이 뛰어나고, 간담이 커서 상황을 잘 활용해 큰 일을 해낼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죠. 그래서 ‘간도의 여호(女虎)’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내가 선발되어 갈 때 공서도 동행했습니다. 중요한 순간에 나의 결행을 잘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공서는 내게 말했습니다. ‘이번의 조선 여행이, 우리 생의 마지막 길이 될 가능성이 크니, 기분 좋게 다니러갑시다.’ 그러면서 껄껄 웃었지요. 나도 살아 돌아오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혜화동에서 기회를 엿볼 때, 문제가 생겼죠?”
“예. 그것 참 공교로운 일이었습니다. 요즘처럼 정보 유통이 빠른 때라면 그런 우행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을. 그때 그 스물 아홉 살의 송학선이라는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었어요. 순종황제 조문행렬이 이어지던 4월 28일 창덕궁의 서남문인 금호문에서 세 명이 타고오는 무개차를 습격했지요. 사이토의 차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주위에 있던 일본인 세명을 순식간에 죽이고 총독처럼 보이는 인물의 가슴에 칼을 꽂았죠. 불행히도 그는 죽지 않았는데다가, 총독도 아니었습니다. 이때 우리는 혜화동 28번지 고석태의 집에서 총기를 확인하며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송학선 의거가 실패로 돌아간 뒤 일대의 경비가 삼엄해졌고, 불심검문과 가택수색이 잇따랐습니다. 5월 중순까지 그 집 널빤지로 된 지하실에서 기거하면서 꼼짝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냥 만주로 돌아갈 수도 없고, 여기서 그냥 붙잡히는 것도 억울하고...그래서 ‘누구라도 한 명 죽이고 가자’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경계가 삼엄하던 5월21일, 우리는 인시(仁寺) 마을을 지나던 경성부회 의원 하나를 습격해 처단했습니다. 내가 그에게 말을 걸었고, 맞은 편에서 오는 행인처럼 가장한 공서가 칼을 던져 그를 쓰러뜨렸습니다. 이날 밤 우리는 경성을 떴습니다. 국경을 넘은 뒤 집결하기로 하고 각기 흩어졌습니다. 총독을 죽이지는 못했지만, 훗날을 기약했습니다. 이튿날 다시 경성이 발칵 뒤집혔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 4
“시인 고정희는 ‘남자현의 무명지’라는 시를 썼습니다. 사람들이 유란의 행적을 잊어버렸거나 모르고 있었을 때, 한 시인이 역사의 몰이해를 깨고 가장 인상적인 장면 하나를 끌어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역사는 승자의 편이며 기록자의 편이기도 하지만, ‘결과’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가 사이토총독도 죽이지 못했고, 국제연맹 단체에게 대한독립의 염원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지만, 나의 기상(氣像)만큼은 어느 누구도 꺾지 못할 만큼 사납고 뜨거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얼빈 마디얼 호텔에 영국의 리턴경을 단장으로 한 ‘일제 탄압 조사단’이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탄원 혈서를 직접 들고 그들을 찾아갈 작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조선인 김곡이 편지를 들고 그곳을 서성거렸다가 붙잡혀 처형됐고, 중국인과 러시아인들도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들의 눈길을 붙잡기 위해서 폭탄을 거기에 던지는 방법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오히려 탄압을 합리화하는 역효과를 자아낼 수 있다는 지적에 따라, 투쟁적인 방법은 삼가기로 하였습니다. 그 대신에 60세나 된 할머니가 제 손가락을 두 마디나 끊어 그것으로 붉디붉은 ‘조선여인한 대한독립원(朝鮮女人恨 大韓獨立願)’ 열 글자를 써서 보내면, 눈길이라도 오래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이미 그간에 찢어진 독립진영들의 통합을 외치는 단상에서 두 번이나 단지(斷指)를 한 바 있었기에, 엄지와 검지는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네 번째 손가락을 택했지요. 너무 깊이 잘라서 그런지 피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손가락이 사라진 손에 붕대를 감기 전에, 손가락을 넣고 종이를 말아 편지부터 쌌습니다. 호텔에 드나드는 인력거꾼이 그것을 가지고 들어갔으나, 그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발각되어 처형된 모양이었습니다. 그의 피맺힌 ‘조선여인한’은 호텔 어디에서 펼쳐지기나 했는지, 아쉽고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만주의 일제전권대사 부토 노부유시 암살계획은 유란의 마지막 미션이었습니다.”
“일제의 대륙지배는 점차 노골적이 되고, 조선의 독립 가망은 자꾸만 멀어져가고 있었지요. 환갑을 넘긴 이 할머니독립군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조직의 활동을 하기에는 이미 버거워졌습니다. 이 몸이 부토를 죽일 수 있다면, 이 먼 만주 땅으로 건너와 십여년을 활약한 보람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부토는 식민 침탈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일본의 경계는 물론 엄중했지만, 할머니라는 점을 잘 활용하기만 하면, 거사가 성공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문제는 내 얼굴이 하얼빈 일대에서 상당히 알려져 있는 점이었습니다. 무기 접선 날짜를 받은 뒤 나는 변장에 공을 많이 들였지요. 칼끝으로 곳곳에 흉터를 내서 동지들조차도 알아볼 수 없을만큼 괴이한 얼굴을 만들었습니다. 사실 공서는 이 계획을 말렸습니다. 거사를 진행하기에는 조선인 배신자들이 너무 많아 밀고의 우려가 크고, 또 여성 혼자서 단독으로 일을 치르기엔 전권대사 주변 경호원들이 너무 많다는 점을 들었지요. 그때 나는 그렇기 때문에, 나같은 노파 하나가 감히 그런 일을 꾸미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할 거라고 했지요. 그는 내게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때를 기다리자고 했습니다. 나는, 우리가 기다릴 수 있는 ‘때’는 갈수록 사라져가고, 지금이 그래도 뭔가를 해볼 수 있는 때라고 반론을 했지요. 공서와 내가 이토록 서로를 반박하며 논쟁했던 때는 그때가 처음이었을 겁니다. 나의 기세에 공서도 뜻을 접고, 무기 지원을 돕기로 하였습니다.”
“어디서 문제가 생긴 겁니까.”
“중국인 무기 중개상에게 돈을 건네주고 밀고를 부탁한 조선인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의열단원으로 행세하면서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들이는데 귀신이었던 밀정 이종형이 끼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우린 대머리인 그를 독(禿)종형이라 불렀습니다. 1930년 3.1운동으로 오랫동안 복역하다가 풀려났다면서 만주로 온 사람이었는데, 말과 행동이 달라 만주에서도 경계할 인물로 손꼽혔지요. 그가 나의 계획을 알게된 뒤 일제와 결탁하여 사전에 망을 쳐놓고 기다렸던 것 같습니다만.”
“체포되는 날의 상황을 좀 구체적으로...”
“1933년 2월27일이었죠. 오후에 하얼빈 도외정양가(道外正陽街)에서 탄약을 받기로 되어 있어 길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그때 호각소리가 들렸고 경찰들이 튀어나왔습니다. 그들은 나를 붙잡아 엎드리게 한 뒤 손가락부터 확인했습니다. 왼손에 손가락이 두 개밖에 없는 것을 확인한 순간, ‘남자현을 잡았다’고 소리쳤습니다.”
“그때 옷 속에 국오가 전사할 때 입었던 군복을 껴입고 있었다고 하던데...”
“허허. 그건 만주에 갈 때부터 항상 입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한 남자에 대한 뿌리깊은 순정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 내 인생의 큰 전환을 이룬 ‘큰 가치에 대한 신념’을 일깨워준 것이기 때문이지요. 왜인들은 그 옷을 빼앗아가서 목숨을 보존하는 부적같은 것으로 인식해 토막토막 찢어 가슴 안에 넣어다녔다고도 하더군요. 정신을 모르는 자들의 우스운 일일 뿐입니다.”
“하얼빈 감옥에 투옥되었을 때 처음엔 순응하는 듯 하다가 나중에 단식투쟁을 시작했는데...어떤 계기가 있었는지?”
“사실 나는 그때 최후의 거사를 실행도 못해보고 좌절한 것에 대해 몹시 화가 나 있었습니다. 이 일을 밀고한 자에 대한 분노도 차올랐고요. 한동안 나는 이곳에서 다시 나가, 꼭 부토를 죽이리라고 마음 먹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고문을 당하고 몸이 망가지면서 그런 임무를 수행하기에는 힘겨울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된 겁니다. 다시 부토를 죽이는 일이 아니라면 살려고 하는 일이 구차하고 무의미한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 뒤 단식을 결심했습니다. 나는 너희가 마음대로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노예가 아니다. 내 목숨은 내가 결정하며 내 운명 또한 내가 결정한다. 그런 선언이었습니다. 처음에 단식을 시작하니 간수가 일부러 옥에다 넣어두며 희롱을 했습니다. 음식이 쌓여 있어도 거들떠 보지 않았지요. 열흘이 넘어갔을 때 간수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눕지도 않았고 꼼짝않고 앉아있었습니다. 보름이 지나자, 감옥 당국에 책임이 돌아올 것을 우려한 그들이 서둘러 나를 병보석으로 풀었지요. 나를 일본인이 경영하는 병원으로 데려가 진찰을 받게 했습니다. 나는 그 병원에서도 눕지 않은 채 말을 했습니다. 이제 나는 시간이 얼마 없으니 조선인 여관으로 옮겨 가만히 죽게 해다오. 그 후 나는 인근의 여관으로 옮겨졌지요. 내가 굳이 장소를 옮겨달라고 한 이유는, 후손에게 꼭 전해야할 말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 말을 하지 않고는 도저히 죽을 수 없을 것만 같았어요.”
“그 유언은 아마도 이 땅의 역사상 가장 신념에 넘치고 애국적인 위대한 언어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행낭 속에 있던 249원 80전은 3.1운동 때 경성에서 만난 해석(海石) 손정도목사와 함께 개간지를 일구는 사업을 통해 벌어들인 수익의 일부를 나눈 것입니다. 살아있는 동안 이 돈으로 무기를 사서, 저격활동을 펼치리라고 마음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죽게 되었으니 내 꿈은 이제 후대에 미뤄야 하는 상황이 되었던 것이지요. 안타까운 일이지만 하는 수 없었습니다. 49원 80전을 손자와 친정 오빠의 손자에게 똑같이 나눠주라고 한 것은, 이 혈육들이 나의 독립활동 때문에 교육의 기회를 제대로 누리지 못한 채 허덕이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을 공부시켜, 할머니가 평생을 추구한 일의 가치를 이해하게 하는 것이 생의 구차함을 극복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200원을 조선이 독립되는 날 그 독립정부에 축하금으로 내놓으라고 한 것은, 얼마 안 있어 독립이 올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기에는 너무나 상황이 암울했습니다. 조선독립이 오지 않으면 세대를 물려서라도 그 돈을 넘기고 넘겨 반드시 독립의 그날에 내놓으라고 당부를 한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것이 내가 지닌 마지막 소원이었고, 희망의 원천이었기 때문입니다.”
# 5
“어느 시인의 시보다도 울림있는 그 말씀이 왜 겨레의 정신자산으로 귀하게 여겨지지 않고 파묻힌 채 누더기역사와 함께 넘겨져야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돌이켜 보니, 역사는 기록하는 사람이 중요하더이다. 많은 지식인들이 스스로의 입장을 체계적이고 설득력있게 기록하여 놓았기에, 시간을 건너 후세에서도 그를 기리고 아끼는 것입니다. 기록되어지지 않은 언행은 역사의 소외를 받기 쉽습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나, 유성룡의 징비록이나 정약용의 책처럼 스스로 남긴 기록도 생명력이 있지만, 제자나 주위 사람들이 그 사람을 살펴 기록해둔 평전이나 실기(實記) 또한 가치있는 자료가 됩니다. 나의 경우, 투쟁의 일선에서 숨가쁜 삶을 살았고 오직 가치의 실천과 실현만을 목표로 하였기에, 그것들이 기록으로 남지 않은 것입니다. 남편 국오가 돌아간 뒤, 나의 언행을 평생 읽어준 이는 오로지 공서 밖에 없거니와, 그대 또한 만주의 어떤 객사에서 정체모를 자의 습격을 받아 불시에 돌아가니 스스로의 기록조차도 남길 수 없는 처지였지요. 이것은 나와 공서가 지닌 공동의 불행입니다. 큰 운명이 문득 이런 일을 바로잡고자 세 번에 걸쳐 그대와 나의 기외(其外)의 만남을 만들어주었으니, 이것은 또한 두 사람 공동의 행운이기도 할 터이지요. 이 고마운 재회에서, 지난 생에서 기록으로 남기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그나마 온기를 지니고 전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공서. 당신이 이번 생에서 그토록 기록에 매진해야 하는 이유를 아시오? 허허. 지난 생에서 그럴 힘이 있으면서도 그걸 게을리 했던 업보가 아니겠습니까?”
남자현은 웃으면서 두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았다. 왼손에 손가락 세 개가 빠진 일곱 손가락이 따뜻한 체온과 함께 떨리며 내 손 속에 들어왔다. 그 험하고 거친 시대를 이토록 깨끗하고 아름답게 산 사람이 또 있었을까. 내 손에서 일곱 손가락이 빠져나가며 문이 닫혔다.
새벽 두시. 컴퓨터의 문서 속에는 아직도 한 글자도 씌어지지 않은 채 ‘소설 남자현’의 첫 커서가 깜박거리고 있다.
/빈섬 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