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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nsom Lee Oct 14. 2015

Carpe The Music / 까르페더뮤직

내 맘이 간 여행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명달리 176-1(상산재 한옥마을)라고 내비에 주소 찍어 오렴."

80년대말 제일기획 공채 동기들 중에서 재기발랄의 대명사이던 박상호군이 양평과 가평의 경계에 펼쳐진 통방산의 한 자락인 삼태봉 계곡 깊숙한 곳에 '음거지(音居地)'를 마련했다. 보름에서 하루 빠지는 달빛 교교한 날, 내달려온 여름날씨를 눅이는 듯 서늘한 산기운이 감도는 명달리, 목재냄새가 아직 감도는 언덕 위의 나무성채 앞에서 30여년 전의 천진한 얼굴을 놓치지 않은 한 사내 서 있다. 차문을 열자, 바로 반말로 호명하는 그 귀익은 목소리가 먼저 닿는다. 

제네시스 몇 대가 30평 남짓한 공간에 들어앉은 셈인, 초고가 음향기기들.(제일기획을 나온 뒤에 그는 돈이 생길 때마다 저 무시무시한 것들을 사들였다. 음반에 대한 욕심도 만만찮아, 10000장을 소장하고 있다.) 주라기 공룡들처럼 앉고 선 천정높은 음악실에서 로시니의 현악4중주와 사라사테의 찌고이네르바이젠(집시의 노래), 루이 암스트롱의 '원더풀 월드',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듣는다. 

1980년대 미성년자 출입금지이던 명동 필하모닉(돌체와 쌍벽을 이루던) 고전음악감상실을 들락거리던 '명필키드'가, 40년 뒤에 양평에 까르페더뮤직이라는 이름의 음악감상실을 차렸다. 까르페 디엠carpe diem(지금 이 시간을 잡아라)에서 인유한 이름으로 '지금 흐르고 있는 그 음악을 잡아라'는 탐닉과 향유의 절박함을 표현한 것이다. 아침10시에서 저녁10시까지 문을 열었던 필하모닉에, 당시 만만찮은 돈인 1000원(음악청취권과 음료권을 겸했던)을 내고 아침 9시부터 달려가 하루 종일 죽치고 앉아 감상실에서 음악을 듣거나, 그 옆에 있는 카페로 나와 시를 읽었던 그는, 옛 기억을 살려 입장료와 커피값을 겸해 10000원을 받는다. 공간 배치도 비슷하게 해놓았다. 음식을 먹으며 수다를 떠는 것은 음악실 내에서는 금지다. 

상호군은 열심히 설명을 한다. 소리의 공명을 위해 천정을 어떻게 설계했는지, 혹은 눈높이의 벽까지는 귀를 편안하게 하기 위해 어떻게 흡음(吸音)을 하고, 그 위의 벽은 소리를 증폭시키기 위한 구조를 갖췄는지, 열정적인 목소리로 풀어준다. 내가 "음향기기들이 정면에 앉아있어 너무 위압적이지 않느냐"면서 "옛날 음악감상실처럼 스피커만 양쪽에 배치하고 앰프나 데크는 한쪽으로 옮겨 그 자리에 DJ부쓰같은 것을 배치해 사람들이 친근함과 편안함을 느끼도록 하는 것은 어떠냐"고, 약간 태클 걸 듯 물었더니, 그는 "앞으로 그런 것들을 조금씩 연구해나가겠다"면서, 뒤에 살짝 이런 얘기를 붙인다. "사실 기기들의 뒤쪽을 오가는 케이블의 값이 장난이 아냐. 1m에 백만원이 넘어. 10m만 연장해도 천만원. 케이블이 중요하거든. 금과 은 소재를 쓰는 경우도 많아, 거의 귀금속 수준이지. 여기가 만약 보통의 음악카페라면 대중적인 케이블을 쓰면서 그렇게 할 수도 있겠지만, 이곳은 사실 나의 음악실 안방을 열어놓은 것과 마찬가지거든. 훌륭한 귀를 가진 사람들이 즐거워하도록 하고 싶고, 또 음악을 제대로 접해볼 수 없었던 사람들이 와서, 감탄과 필을 함께 받아가서 인생이 바뀌도록 해주고 싶어."

한 마디 잘못 붙였다가, 본전도 못찾은 케이스다. 그래도 그 반짝이는 눈과 열정에 가득찬 목소리를 듣게 됐으니 나쁘진 않다. "사실 서울에서 이렇게 제대로 음악을 듣기는 불가능해. 단독주택에 제대로 방음을 한 부잣집이라면 가능하겠지만... 뮤직카페에선 이런 퀄리티의 기기를 내놓기도 어렵고, 아파트에선 이런 기기로 틀다간 베이스 음향의 떨림 때문에 바닥과 벽이 흔들려 아래위층에서 달려올 거니까...이곳에다 이런 것을 지은 것은, 여러 사람이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곳을 만들어보자는 뜻이었지. 사실 헤이리의 황인용씨가 하는 카메라타는 음악감상실이라기 보다는 카페에 가까워. 물론 피렌체의 예술가 집단들의 자유로움을 구가하겠다는 그 취지에는 맞지만, 음악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은 조금 떨어지지. 음악과 카페를 분리해놓은 곳은, 요즘은 어디에고 드물 거야." 

까르페더뮤직 언덕 아래에는 아름다운 한옥 두 채가 있었다. 50년 넘은 인가를 사들여 원형을 유지한 채 보일러와 화장실을 현대식으로 고쳐놓은 집이었다. 그 중 한 곳엔 상호군 내외가 와서 기거하고, 다른 한 곳은 손님을 위해 제공할 모양이었다. "시를 쓰고 작품을 구상할 때 언제든지 와. 여긴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묘처야. 음악도 듣고 글도 쓰고 나랑 얘기도 하고, 그렇게 좀 하면서 살자. 자주 들러." 은근하지만 땡기지 않을 수 없는 유혹이다. 어디선가 봄꽃 향기가 흘러드는 언덕을 내려올 때는 새벽 1시가 다 됐다. 내외는 함께 내려와 차창 안으로 손을 흔들어 배웅한다. 달빛 참 밝다. / 빈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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