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병산서원

그리움이 낸 길

by Binsom Lee

오래전, 문화면 편집을 할 때 안동 병산서원을 맨 앞면의 전부를 병산서원 이야기로 다룬 적이 있다. 그때 입교당의 기둥들과 지붕과 마루가 이룬 네모 공간에 들어있던 풍경을 도려내고 거기다 기사와 제목들을 넣었다. 기사가 마치 병산서원 안으로 들어간 것처럼 말이다. 사실 이 서원은 풍경을 각각의 기둥들과 마루로 수직및 수평분할해서 그 면면을 즐기는 맛이 괜찮다. 옛 사람들이 그런 착안을 했다면 그 착안을 일부를 신문 편집에 빌려와 병산서원의 공간구획법으로 기사를 읽도록 만든 셈이다. 동기인 편집기자는 이때의 지면을 아직도 기억한다. 편집이 파격적이었기도 했지만, 마루의 정갈한 느낌과 지붕의 기와선이 주는 기하학적 미감, 그리고 기둥들의 투박하면서도 묵직한 기운이 거대한 사이즈로 돌진해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때의 기사 내용은 당대의 내로라 하는 건축학자들이 이 병산서원 앞에서 감격하여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는 얘기였다. 자연과 건축이 완전하게 조응한, 소박하면서도 절묘한 이 공간운용과 건축미학에 절로 난 감루(感淚)였겠다. 제목은 '병산서원 앞에서 함께 울었습니다'였던가 그랬다. 이 지면을 편집하던 시절의 나는 아직 이 서원에 가본 적이 없었다. 그저 일선기자가 취재해온 '감동'을 전달받아 그렇게 표현했을 뿐이었다. 말하자면 짐작 뿐인 가짜였다.

병산서원을 처음 맛보게 된 건 회사에서 몇몇 동료가 이벤트 삼아 가는 여행에 끼어서였다. 그동안 비교적 잔잔하던 산세가 내가 보기엔 갑작스럽게 우람해지면서 울컥 솟아오른 병풍산(그래서 屛山이다) 아래로 눈부신 흰 모래살과 청록의 암영이 부끄러운 그리움처럼 녹아 흐르는 낙동강을 보지 않고서 내가 병산서원을 말하다니...부끄러워졌다.

동료들은 신발을 벗고 입교당 맞은 편 만대루로 올라가 이 가람과 뫼를 한눈에 바라보았다. 넋을 잃었다고 해도 좋았다. 오월의 따스한 햇살 속에서였다. 시원서늘한 마루 기운이 엉덩이와 무릎, 종아리들로 가만히 스며 올라온다. 양옆에 펼쳐진 동재와 서재 사이를 지나온 달콤한 바람이 귓전을, 아니 목뒤 어디쯤으로 느긋이 밀려나있는 정신의 골짜기를 스친다. 우린 눈을 저 고요한 풍경에 붙박았다가 불현듯 서로를 바라보았고 덥썩 어깨를 껴안았다. 그건 이런 풍광을 함께 보고 있다는 것에 대해 실감하고자 함이었고 함께 보고 있음에 대한 감사함이었기도 했다. 이랬으니 그후 내내 눈에 이 만대루가 아른거렸을 수 밖에. 부석사에서 내려다본 소백산봉 만큼이나 내 눈에 곱게 차올랐던 이 풍경이 보고 싶어 늘 눈이 아렸을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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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서원이란 요즘으로 말하자면 사설학원이다. 학원을 차리려면 일정한 자격증이 있어야겠고, 그보다 중요한 건 재력이겠다. 학원이 잘 되려면 괜찮은 교사들이 많아야 하고 그 학원에 가면 대학에 척척 잘도 붙는다는 성가가 있는 게 좋으리라. 옛날에야 '쯩'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명망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벼슬을 하기 위해선 지육(知育)과 덕육(德育)의 커리큘럼을 중시했던 사회였기에 관직을 물러나는 사람들이라면 요즘 학원의 명강사 뺨치는 한 가락씩의 지식 노하우를 가지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벼슬을 한 사람 뿐만 아니라 지방 산골짜기에 처박혀 가만히 공부만 한 서생들도 경전과 문학에 관한 한 오늘날의 대학공부를 웃도는 준렬한 학습과정을 거친 사람들이 많았기에, 초야의 명강사들도 널널하던 시절이었다.

서원은 후학을 양성하여 좀더 건실하고 아름다운 지식사회를 건설하려던 당시 학자들의 꿈의 공간이었다. 나 또한 지금도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일에 대한 유혹과 매력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자격이 시원찮아서 그렇지 기회만 되면 그런 일을 하고 싶다. 그것은 내 속에 가진 것이 많아서 굳이 그러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학문을 통한 교유(交遊)와 토론을 통한 동반성숙에 목말라하기 때문이다. 서원은 나의 목마름을 해갈하던 전시대의 지식 공간이다.

그래 봤자 서원이란 학교이거나 서당일 뿐이다. 거기다 유교가 지닌 종교적 빛깔 살짝 입혀 뛰어난 유학자를 모시는 리추얼을 성대하게 행함으로써 약간의 신비화를 꾀하기는 한다. 물론 죽은 자에 대한 인간적인 애도를 위한 형식이기도 하였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학덕에 대한 세대를 넘은 추앙과 사모가 그런 리추얼에 담겨있지 않나 싶다.

병산서원도 그런 사설학원이나 지방의 개나리분교 쯤 되는 학교일 뿐인데, 지었으면 얼마나 잘 지었을 것이며, 또 학교에 관해 건축 미학부터 운위되는 것이 어쩌면 공부라는 컨텐츠를 도외시하고 겉멋에 치중한 관점일 수도 있겠다. 그 건물의 아름다움은 조선시대 임진란 무렵 어느 이름없는 목수의 빼어난 안목과 기예를 증명하는 것일 뿐일지도 모른다. 도대체 이 집을 지은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에 관한 정보는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이 서원은 원래 인근 마을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을 1572년에 이곳 병산리로 옮긴 것이라 한다. 이때는 임진란이 발생하기 20년 전이었다. 풍악서당은 고려 말 무렵에 만들어진 유림의 학교였다. 공민왕은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이곳을 지나다가 난리 통에도 열심히 공부를 하는 학생들을 보고는 감명을 받아 책과 땅을 지원해주었다고 한다. 그런 폼나는 전통을 가지고 있는 학교라서 200여년을 번창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유림들은 이 풍산의 학교가 점차 늘어난 인근의 집과 길들로 소란해지자 옮길 방안을 찾고 있었다. 그때 마침 당대의 지식인인 서애 류성룡선생이 부친상을 당해 하회에 와있을 때여서 그에게 학교 입지에 관해 자문을 구했던 모양이다. 서애는 선뜻 이 병산을 제안했다. 과연! 서애는 산수를 보는 안목이 뛰어났던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이 대목에서 약간의 의심을 매달아본다. 서애는 당대 지식인 관료로서 안목이 좀 귀족적이지 않았나 싶다. 내가 보기에 이곳은 시를 짓기엔 적당한 장소이지만 공부를 하기 위해 앉아있는 장소로는 어울리지 않는다 싶다. 뛰어난 풍광과 탁트인 전망에 괜히 싱숭생숭해지는데다 아무리 사방을 건물로 꽁꽁 싸놨지만 내부가 여전히 밝고 화사해서 명명(冥冥)한 고요 속에서 섬세하고 치밀한 학문을 묘득하는 데는 적절치 않다는 게 내 생각이다. 풍수지리에선 안산인 병산의 산세가 육중하고 가파른데다 강물이 사나울 만큼 급류로 흘러서 땅의 기운이 쌓일 틈이 없이 흘러가는 곳이라 한다. 병산서원 자리에 살림집을 썼다면 딱 말아먹기 좋은 자리라는 얘기다. 그러나 이곳이 학교이기에, 요즘 교육의 속성재배 풍토처럼 '빨리빨리' 많이 배워서 쑥쑥 속속 출세시키는데는 알맞는 곳이라는 해석은, 어쩐지 군색해보이고 다소 천박해보이기도 한다. 물론 이런 절경 속에 공부방을 제안한 서애를 굳이 미워할 필요야 없다. 고시생들이라고 때절고 먼지 냄새나는 골방만 사용하란 법이 어디 있으랴. 그들도 우아하게 공부하면 좀 좋으랴? 아무리 꽃놀이가고 싶은 분위기의 학교라 하더라도 우등생은 공부를 잘 하는 법이다. 게다가 이렇게 낯모르는 후손까지 잠깐씩 찾아와 살아온 땀을 식히고 가지 않는가. 그만 하면 됐지 뭘.

이 학교는 서애 류성룡의 명망과 지적 카리스마를 십분 활용한 듯 하다. 장소를 점지해준 공로 이외에는 이렇다할 기여를 한 점을 찾기 어려운 서애였는데도 병산 이전 41년 뒤인 1613년 이곳의 유림들은 서애를 기리는 사당을 짓는다. 입교당 뒤쪽에 있는 존덕사가 바로 그것이다. 괜찮은 인물과의 인연을 부각시키고 그 학덕과 이 학교를 결연시킴으로써 생기는 시너지 효과가 컸으리라.

존덕사에는 서애의 세째아들 류진의 위패도 모셔져 있다. 이분은 고관대작까지는 아니었지만 봉화현감, 형조정랑, 청도군수를 역임했으며 성실하며 강직한 삶을 살았다. 아버지와 함께 이곳에 모셔지는 영광을 누린 것은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존덕사 창건때 그의 나이는 31세였다. 28세에 사마시에 합격을 한 뒤 막 청운의 꿈을 펼칠 무렵 그는 누군가의 무고로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그때가 1612년이었으니 이듬해 존덕사를 지을 때는 고향에 머무르고 있었을 것이다. 이때 어떤 형태로든 병산서원 측에 기여를 하지 않았나 싶다. 아버지를 배향하는 사당을 짓는 일이니 고시를 패스한 그가 관여하는 일이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는 서애와 함께 배향(配享)되고 있다.

서애 류성룡에 대해서는 임진란 당시 권율과 이순신을 천거한 사람이라는 점이 부각되어 있다. 사람보는 안목이 밝은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고위 관료로서 그런 장점을 지닌 것만도 뛰어나다고 할 만하다. 게다가 전쟁에 좀더 튼실하게 대비해야 한다는 주장을 여러번 내놓은 점도 상황을 꿰뚫는 그의 혜안을 증명한다 할 만하다. 그러나 조선의 정부가 집요하고 포악한 침략에 맞선 전쟁을 치르던 무렵의 재상이었고, 그때의 권력집단들이 벌였던 근시안적이고 치졸한 당파싸움을 기억하는 뒷사람들로선, 그 정쟁의 한 축이었던 서애를 반드시 곱게만 볼 수 없는 입장도 있다. 병산서원이 서애의 위패를 모심으로써 후광을 겨냥한 것은 요즘 학교들이 누구누구를 배출한 명문이라든가, 그 학교 교장으로 어떤 유명인사가 있었다는 자랑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서애에게 굳이 흠잡을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병산서원이 지향한 높고 아름다운 뜻을 훼손하진 않을 것이며, 더구나 만대루나 입교당에 앉으면 절로 느껴지는 풍광의 아름다움과 빼어난 건물구조가 그로 인해 달라질 리는 없다. 다만 서원에서 봉헌하는 인물이라고 해서, 그를 완전무결의 삶으로 신격화하는 건 옳지 않다는 견해만 덧붙이는 게 바람직하리라.


요즘 잘 뚫려있는 중앙고속도로를 한참 달리다 서안동 인터체인지를 내려오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하회마을이 뒷짐진 포즈로 걸어나온다. 병산서원은 하회마을이 도포자락을 드러내려는 순간에 왼쪽으로 살짝 곡좌(曲坐)를 하시면 된다. 안동길에는 입간판이 인색해서 하회마을은 자주 보이지만 병산서원이란 표지는 찾기 어려운데, 그래서 긴가민가 하던 마음은 이쯤에 보이는 큼직한 표지판이 무척 반갑다. 병산서원 3점 몇 킬로미터. 4킬로미터도 안되는 길이라고 얕봤다가 큰코 다친 게 나다. 정성껏 길을 정리하고 있다는 게시물도 읽긴 했지만 그 '정성껏'이란 것이 예전에 비해서 달라진 정도를 얘기하는 것이지 일반적인 기준과는 거리가 멀다. 이제야 녹아흐르는 얼음물과 며칠 내내 내린 빗물이 어우러져 진창이 된 비포장길을 고물 자동차로 덜컥거리며 가는 일은 어느 때고 차가 서버릴 것 같은 불안을 느끼게 했다. 뒤따라오는 동행자인 처제네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뒤통수로 날아와 꽂히는 듯도 했다. 그러나 나나 그쪽이나 결코 투덜거릴 일은 아니었다. 애당초 사람을 피하여 지은 집이 아니던가. 그나마 차가 다닐 만한 큰길을 낸 것만도 고마워부터 해야할 일이다. 저 병산의 아름다운 기색을 온몸으로 느끼려면 최소한 하회마을에서 좌회전할 무렵부터는 차를 던져놓고 천천히 걸어서 들어가는 것이 지당한 일일 터이다. 그것이 한 시대 지식의 전당을 찾으며 옷깃을 여미는 태도가 아니겠는가.

차에서 내렸을 때 아내는 이렇게 말해서 나를 흐뭇하게 했다. "이런 놀랍고 아름다운 곳으로 우릴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그때 그가 눈길을 준 것은 꽃뫼라 불리기도 하는 화산의 무릎에 이미 커버린 아이처럼 정좌하고 앉은 병산서원에 떨어진 오후햇살이었다. 다시 그의 눈은 아이들이 이제 막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가고 있는 낙동강 넓은 백사장으로 옮겨간다. 피로한 겨울 녹색을 벗고 생기를 회복하고 있는 솔빛산이 강을 거울삼아 화장을 고치는 2월말의 병산은 청초하고 애틋하다. 얘들아, 물에 들어가면 안돼. 아직 추워. 서원 앞을 의식해서인지 한참 데시벨을 낮춰 지르는 엄마의 소근거림이 아이들에게 들릴 리 없다.

병산서원 앞의 가람뫼를 제대로 즐기려면 입교당에 앉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게 내 생각이다. 거기 앉으면 입교당의 두 기둥 사이로 만대루 지붕의 3분의 2가 들어오고 그 아래 앞뒤 짝으로 여덟개의 기둥이 들어온다. 중간의 네 기둥은 겹치고 바깥쪽 네 기둥은 살짝 엇갈려 틈새 공간을 낸다. 그래서 만대루 안쪽으로는 세개의 잘생긴 직사각형 공간과 네 개의 좁직한 틈 공간이 생겨난다. 병산의 끝자락과 낙동강의 수면은 그 일곱 공간 사이에서 저마다 섬세하게 다른 느낌으로 분할된다. 일곱개의 캔버스를 덧대어 만든 연작같기도 하고, 공간 분할 자체도 서구의 추상화를 방불하는 미학이라 할 만하다. 만대루는 눈 앞 풍경의 절반 이상을 가리고 있는 셈이지만 결국 중요부위는 다 드러내고 있다. 게다가 건축물이 내는 고풍창연한 맛은 풍경의 유장하고 쓸쓸한 맛을 더욱 강화시킨다.

마루로 무릎 꿇고 들어온 햇살이 내는 청정한 윤기와 기둥 그림자가 만든 어둑한 낌새가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마당에 선 꽃나무(나는 그게 뭔지 모른다)들이 젖몸살 앓는 여인처럼 불어난 망울들에 허리를 뒤튼다. 이곳에서 가르침을 바로세우는(立敎) 일이 잘 되었을까. 눈은 그윽해지고 귀가 평안해지기는 한다. 스승의 강의를 듣는 어느 학생의 나른한 봄을 잠깐 느껴본다. 선생님, 강변에 가서 야외수업하면 안될까요? 그런 제안이 절로 나올 법하다. 그러나 병산서원 와서 입교당에 가부좌하고 앉는 일 만큼 나를 기분좋게 하는 일이 있을까. 거기엔 한 순간 속진을 터는 개운함같은 것이 있다. 눈을 감으면 풍경은 사라지고 환한 어둠이 내 안에 내려와 깔린다. 좋다, 참.


병산서원으로 들어가는 정문은 북례문은 굳게 잠겨있었다. 우린 예(禮)를 지키지 못하고 쪽문으로 들락일 수 밖에 없었다. 병산서원이 예를 강조하는 뜻은 짐작이 간다. 어지러운 민심을 수습하여 어진 관습을 정착시키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예의범절이다. 전란을 겪으면서 피폐해진 질서의식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지식인 조상을 경배하는 행사도 필요했을 것이며 또한 학문적 기율 또한 중요했을 것이다. 학문과 지식이 존경받아야 한 사회의 질서가 수립될 수 있다는 생각은, 오늘날에도 깊이 공감이 간다. 저 북례문은 학문의 가치에 관한 준렬한 질문이기도 하다. 나는 닫힌 북례문에 서서 잠깐 헛기침을 한다. 인기척을 내어 사람이 왔음을 알리는 옛 습관을 빌려온 것이지만 잠긴 자물쇠가 내 뜻을 알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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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례문 안쪽 그러니까 만대루 아래에는 작은 연못이 있었다. 이끼가 끼어 푸르게 변해있는 이 연못에 비친 나무의 실가지 그림자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모른다. 그 연못에 고인 빛깔들을 그냥 종이에 옮겨 담기만 하면 세상사람들이 흉내낼 수 없는 놀라운 풍경화가 되리라.

입교당이 경학(經學)을 하는 독서와 논리공부의 장이라면, 만대루는 시작(詩作)을 하고 풍류를 즐기는 흥취의 장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곳은 이 학교의 대강당이다. 많은 유생들이 함께 모여 토론도 하고 소담도 나눴으리라. 만대루는 오후 늦게 보는 것이 제격이다. 마침 내가 갔을 때는 햇살의 각도가 서쪽으로 기울어져 깎아지른 산빛을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딱 정시도착이다. 만대루(晩對樓)란 이름은 두보의 시 '취병의만대(翠屛宜晩對)'에서 빌렸다고 한다. 푸른 병풍산은 오후 늦게 마주하는 것이 딱 좋다란 의미다. '백제성루'란 시라고 하는데 원문을 찾으려 애써봤으나 찾지 못했다. 저녁의 느긋한 햇살에 푸른 산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말한 두보의 섬세하고 예민한 감각을 경탄하고 싶을 정도로, 오후의 병산은 사람의 눈과 정신을 흡인하는 기운이 있다. 방정맞은 핸드폰이 허리춤에서 세속의 기별을 품고 진동을 울리지 않았더라면 난 저 푸른 풍경은 나를 놔주지 않을 뻔 했다. 전화를 받는 동안 저쪽에선 키큰 병산이 고개를 쑥 뺀 채, 그리고 이쪽에선 꽃뫼가 서원을 품에 안은 채 오래 살아서 닮아있는 부부처럼 물끄러미 강 속에 비친 한 사내를 내려다본다. 입과 귀에다 뭔가를 대고 중얼거리는 모습이 신기하다는 듯이. /빈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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