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라, 희망없이
1.
정말 말 한마디가 내 마음의 큰 보물입니다.
당신에게서 받은 이 기꺼운 선물을 난 아직도,
먼지 하나 묻히지 않고 보관하고 있답니다.
어느날 당신은
나를 바라보며 갑자기 말했지요.
당신, 참 좋다.
무가공의 언어들은 스스로 숨소리를
엔진처럼 달고 다니나 봐요.
당신, 이라 말한 뒤 잠깐의 쉼표에서
그 숨소리가 들렸어요.
그것까지 기억에 살아있답니다.
뺨과 입술과 눈매와 약간 벌름거리는 귀여운
콧자리까지, 나에 대한 호의가
온 표정을 감도는 그 순간, 당신 얼굴은
하나의 물방울이 떨어지며 사방에 번져가는
아름다운 수면 같았지요.
당신, 참 좋다.
우린 이 말을 에두르느라
얼마나 많은 말들을 발명해 왔는지요.
이 말을 잘하고자 공들인 말들이
오히려 이 말을 억누르고
이말을 숨기고 이 말을 어지럽히지 않을 까요.
당신은 정말 단박에
이 말을 순정한 첫 언어로 되돌렸습니다.
놀라운 즐거움과 형언할 수 없는
따뜻함이 이 말뒤에 따라왔었죠.
왜 우린 이 상쾌한 언어를
그토록 꽁꽁 처매왔던 걸까요.
힘겨울 때, 외로울 때,
지금 같은 날, 나는 가만히
당신의 입술을 흉내 내서,
중얼거려 본답니다.
눈 지그시 감고 이렇게.
당신, 참 좋다!
2.
마음도 물과 같아서
흐르다 가끔 여울을 이루며
맴돌 때가 있습니다. 가만히 맴돌며 생각할 때
문득 살아있는 일이 고마워질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저런 사람이 내게로 왔는가.
내가 저런 사람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 저렇게
무궁무진한 마음을 가진 사람, 저렇게 따뜻하고
깊은 생각을 가진 사람, 저렇듯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는
희망을 가진 사람, 저렇듯 낮고 어리숙하여
나를 더욱 편하게 하는 사람.
저 사람이 저 넓은 시간과 저 많은 공간 속에서
하필 내게 와 있다니, 나를 위해 이토록
기꺼운 축복을 보내주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당신은 참 불가사의한 선물입니다.
당신으로 하여, 나는 충분히 행복해지고
내 삶은 충분히 아름다워졌지만,
그래도 나는 늘 당신을 고마워하지는 않았습니다.
때로 당신의 관심이 온전히 내게만 머물러 있지 않은 것이 서운했고
때로 당신이 내게서 떨어져 있는 날의 무심을
슬퍼했습니다. 처음과는 달라진 듯한 당신의 마음을
살피고 의심하며 괴로워했습니다. 당신이 그냥 거기 있기에
그토록 좋았던 마음이었는데, 이젠 당신이 그냥 거기에 있기만 해서
섭섭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당신은 내게 끊임없이
마음을 퍼내 쓰고 또 써서 오직 나를 위한 종처럼 되기를
가만히 바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에 대한 갈증이
깊어가면서, 당신이 내게 한 것은 잘 보이지 않고
당신이 내게 하지 않은 것들이 유난히 잘 보였습니다.
당신이 나를 아프게 했던 것들이 쌓여, 처음부터 지금까지
당신이 내게 그토록 고마운 존재라는 사실이
모두 휘발해버리는 날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문득 당신에게 많이 미안해져서
무엇이라도 말하고 싶었습니다.
마음을 멈추고 가만히 깊은 숨을 쉬고는
말을 꺼내려 할 때,
그때 당신이 내 눈을 오래 바라보면서
입가에 깊은 미소를 누르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신, 참 좋다.
내가 말하려던 말이었는데, 세상의 고마움, 세상의 서운함,
세상의 모든 마음의 풍랑을 지나온 배 위에서 맞는
산들바람처럼 기특하고 상쾌한 말,
당신, 참 좋다.
어떻게 이렇게 단순하고 꾸밈없는 말 한 마디가
사람을 깊이 감싸는지, 당신이 말하는 그 고백이 돌아온 길을
나 또한 돌아왔기에 그건 당신 입을 통해서
내가 하고 있는 고백이기도 하였습니다.
고마워서 어쩔 줄 모르던 그 처음의 설렘과 온기로
말하는 그 말.
당신, 참 좋다.
/빈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