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랑

by Binsom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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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존재의 집인 게 맞나 봐. '첫 사랑은 헤어지는 법이야'라고 말하던 누군가의 말이, 내게서 첫 사랑을 떼어갔다고 나는 생각해. 그 뒤 나는 영원히 옛사랑을 짝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지. 문득, 멀리 뒤돌아 저기 시간의 소실점까지 보고 있노라면, 눈자위가 늘 무거워지는데, 이건 미련도 후회도 아닌 자기에 대한 깊은 연민같은 것이란 생각이 들곤 해. 새삼 해보는 얄궂은 질문. 그때 당신, 날 좋아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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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는 날은, 당신을 맞는 날이지. 당신을 만나던 날 맞았던 그 비를 맞는 날이지. 그때 비를 맞으며 당신도 나를 맞았을까. 당신 삶의 문턱에 서성거리는 나를? 당신은 늘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무런 분명한 말도 해주지 않았고 당신의 단호한 침묵과 나의 기다림 사이로 늘 장대비 내렸던 기억. 당신은 자꾸 미안해 했고, 나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손을 내저었지. 미소를 지어주었지. 당신은 늘 모호하고 당신은 흐릿해서, 지금도 아마 그런 일이 내게 일어난 것 같지 않아. 다만, 그날 비가 왔을 뿐. 지금처럼 비를 맞으며 서 있었을 뿐. 내가 너무 젊었기에, 세상에는 없는 아름다운 헛것을 보았을 뿐. 당신의 눈물을 본 건 아니었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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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늙어가겠지. 약속들이 생기고 그 약속들을 지켜야 하는 시간들로 달력이 가득 차 있겠지. 그리워 하는 일도 아마 짬을 내기 어려울 거야. 추억이란 어쩌면 한가한 사람 만이 가질 수 있는 슬픔의 질료들인 것을. 당신을 가뒀던, 토끼풀 반지같이 스르르르 풀어진, 나를 당신이 나만큼 기억할 순 없겠지. 그때 나는 거의 죽을 지경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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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이름을 몰래 불러보는 일, 당신이 불러주던 노래를 나즉히 읊조려 보는 일, 당신과 걷던 길, 당신이 준 시(詩), 당신의 집으로 가는 철길 건너 그 길, 당신과 함께 피처럼 붉던 5월 장미와 당신의 빗소리. 이건 이제 당신의 것이 아니라 내 것이지. 당신은 내게 늘 미안해 했지만 난 당신이 고마워. 늘 고마워. 내게 많은 것을 줬잖아. 당신의 인생, 당신의 시간, 당신의 곁만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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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는 길은 혼자였지. 아아, 당신과 그때 헤어진 날은, 당신과 잠깐 헤어져 돌아오는 것 같았어. 당신은 내게 이렇게 말했지. "우린 만난 적도 없는데 헤어질 일이 있나요?" 나는 픽, 웃었어. 그래. 우린 헤어질 수가 없었지. 헤어지려면 먼저 만나야 하니까. 그래서 만나기부터 해야겠지만 그럼 그날 슬픔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틈입할 수 없는 그 투명한 당신의 언어 속. 만난 적도 없는, 낯설고 서러운 자리. 그저 기웃거리다가 돌아오는 나 혼잣일. 그림자만 묵묵히 따라오는 만남없는 이별의 긴 고립. 그 어깨가 너무 무거웠던 건 그 가을의 햇살 때문이었을 거야. 그러니까 한 20년, 당신과 헤어져 돌아오는 길을 걷고 있는 중이지. 곧 만날 거라고 중얼거리며. 당신과 했던 말들을 떠올리며 당신이 내게 준 노래 테이프 하나 가방으로 손 넣어 만지작거리며, 그러니까 잠깐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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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보다 더 좋은 사람이 있을까. 당신만큼 좋은 사람이 있을까. 당신이 다시 내게 있을까. 옛사랑이란 말은 우스워. 사랑이 최신이 어디 있고 옛날 게 어디 있어. 그건 그저 거기 있는 사랑인 거지. 거기 있어, 내 빛이 되는 따뜻한 풍경인 거지. 어쩌면 오래된 수첩같은 것이지. 깨알같이 박힌 글씨들, 휘갈겨쓴 메모 하나하나마다 내겐 모두 시(詩)였던 내 삶의 가장 위대한 시절의 기록이지. 알아? 당신. 이렇게 비오는 날. 비냄새 맡으면, 세상이 온통 당신 냄새가 되어, 나 가끔 쩔쩔 맨다는 걸. 가슴이 싸아해지면서, 20년 그때와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내가 된다는 것을./빈섬.




옛사랑 - 이문세

남들도 모르게 서성이다 울었지 지나온 일들이 가슴에 사무쳐
텅빈 하늘밑 불빛들 켜져가면 옛사랑 그이름을 아껴 불러보네

찬바람 불어와 옷깃을 여미우다 후회가 또 화가 난 눈물이 흐르네
누가 물어봐도 아플것 같지 않던 지나온 내 모습 모두 거짓인가

이제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내맘에 둘거야
그대 생각나면 내버려 두듯이
흰눈 나리면 들판에 서성이다 옛사랑 생각에
그길 찾아가지
광화문거리 흰눈에 덮여가고 하얀눈 하늘 높이 자꾸 올라가네

사랑이란 게 지겨울 때가 있지 내 맘에 고독이 너무 흘러넘쳐
눈녹은 봄날 푸르른 잎새 위에 옛사랑 그대 모습 영원속에 있네

이제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내 맘에 둘거야
그대 생각난 대로 내버려 두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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