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가짜 노동>을 읽고

by 빈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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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번 직장을 옮겼다. 그 이유를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한 건 회사 생활을 통해 내가 느낀 좌절감과 공허감이 컸다는 것.


대부분의 시간 동안은 내가 일하던 분야(국제개발협력)에서 경력과 경험이 쌓여가며 가지게 된 고민(발전이란 무엇일까?) 때문이라 생각했지만, 가끔 모든 부정적인 감정이 켜켜이 쌓여 나를 짓누를 때는 인내심 없는 스스로를 탓하기도 했다.


그런데 『가짜 노동』을 읽으며 처음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문제는 내가 아닌, 우리가 하고 있는 일 그 자체에 있었다.


직장생활을 하며 가짜 노동의 사례를 수도 없이 만났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기억에 남는 장면들이 있다.


한 번은 할 일이 거의 없다는 걸 내가 뻔히 알고 있는 직원이었다. 업무량도 적고, 급한 일도 없었다. 그런데 전화만 하면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늘 이렇게 말했다. “아, 지금 너무 바빠서요. 정신이 하나도 없네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묘한 생각이 들었다. 뭐지? 누가 보기에도 바쁜 척만 하는 게 눈에 보였다.


두 번째 사례는 더 노골적이었다. 매일같이 야근을 하며 야근수당을 풀로 받아가던 동료가 있었다. 늘 “일이 너무 많다”라고 푸념했고, 실제로 매일 늦게까지 남아 있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그 정도로 일이 많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몰래 낮잠을 자는 모습도 여러 번 봤다. 코까지 고셨으니; 그런데 회사에서 야근수당 제도를 없앴더니, 바로 당일부터 칼퇴를 했다. 낮잠 자는 모습도 그 이후론 보질 못했다.


세 번째 경험은 개인적인 경험인데, 국제기구에서 2년간 일하며 책에서 언급한 '보어아웃 증후군'을 겪었다. 일을 안 주는 조직,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일을 줄 수 없는 구조였다. 매일 출근해도 맡겨지는 일이 거의 없었고, 스스로 일을 만들어내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그 상태가 지속되자 편한 게 아니라,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이때의 제 경험은 아래 브런치북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이외에도, 정말 오탈자 보는 일만 하던 상사, 측정할 수도 없는 것을 측정하라며 성과지표를 강요하던 조직, 3~4시간의 장시간 회의를 쓸데없이 주기적으로 열며 근로의욕만 저하시키던 어느 단체 등 여러 조직/회사에서 내가 관찰한 가짜노동의 예는 수도 없이 많았다.


그동안은 서로 다른 회사, 다른 조직, 다른 환경에서 겪은 별개의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보니 원인은 하나였다. 산업화와 정보화를 거치며 성장을 추구하는 사회가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이 책은 우리가 왜 그렇게 바쁜데도 공허한지, 왜 성실하게 일해도 자존감이 깎여 나가는지를 정확히 짚어낸다. 우리는 일을 너무 많이 해서 지친 게 아니라, 의미 없는 일을 ‘일인 것처럼’ 하느라 소진된 것!


인사, 홍보 등 관리부서에서 일하는 분들이 읽으면 현타 제대로 올 듯;


이쯤 되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직장인보다 오히려 정치인이나 CEO가 읽어야 하는 책이 아닐까?


가짜 노동의 대부분은 개인이 선택해서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조직 구조, 평가 방식, 보고 체계, 그리고 ‘일자리를 얼마나 만들었는가’를 성과로 삼아온 사회 전체의 문제다. 정규직 노동을 많이 만들어 내야 한다지만, 그 정규직 자리는 가짜 노동으로 넘쳐난다. 가짜 노동을 줄이면, 주 20시간, 주 15시간만 일해도 되는데...


100년 전 케인즈는 2030년이 되면 사람들이 평균적으로 주 15시간만 일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게다가 AI 기술이 나날이 발전하는 지금이 오히려 가짜 노동을 없앨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이로 인한 실업의 증가는 또 다른 문제겠지만;


책은 가짜 노동의 정의에서부터, 가짜 노동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 가짜 노동에 대한 언급을 금기시하는 문화, 가짜 노동에서 벗어나는 법 등 다양한 측면을 다루고 있으니,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읽어보시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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