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비게이션이 없던 시절에도 지도 없이 우리나라 방방곡곡을 누빈 우리 가족이었다. 아빠 특유의 친화력을 무기로 이길 저길 물어가며 어떻게든 도착했다. 대신 여행 가는 차 안에서의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추웠다. 창문을 계속 열어야 길을 물을 수 있었으니까.
특별한 계획이 없으면 '어디 무슨 집이 맛있더라.'라는 리스트를 하나씩 지워가듯 길을 나섰다. <6시 내 고향>도 좋았지만 지인 추천 맛집은 정보 수집의 *치트키였다. 그야말로 찜닭 먹으러 안동 가고, 족발 먹으러 원주 가고, 닭갈비 먹으러 춘천을 갔다.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에 초밥을 먹으러 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치트키 : 게임을 클리어하기 쉽도록 해주는 명령어)
그랬던 내가 아이를 낳고 집 붙박이장이 되었다. 핑계를 대보자면 "부지런함"이 문제였다. 집안일과 아이를 돌보는 일에는 어떻게든 부지런 해지려고 애썼다. 정해진 기한은 없지만 미뤘다가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부분이다. 이틈으로 휴가를 계획하는 일은 그나마 남은 내 에너지를 소진하고도 모자란 일이었다.
주말이든 휴가든 시원한 마트만 찾아 헤매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복직을 눈앞에 둔 그때가 휴직기간 중 마지막 여름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아이들을 재우고 여름휴가를 상상했다. 좁은 뒷베란다에서 물 받아놓고 아이들에게 엄마, 아빠 휴가를 생색내는 일은 쪼잔하기 그지없었다.
어디로든 떠나야 했다. 연년생 아이들을 데리고 나서는 일이 좀 겁나긴 했지만 내비게이션이 없던 그 시절에 비하면 그야말로 여름휴가를 위한 "호시절"이었다. 연년생 두 아이의 짐 챙기는 일이 번거롭긴 하지만 그나마 짐을 옮기는 일은 차가 알아서 해주겠거니 했다. 거기다 여름날 물만 있으면 아이들은 물고기 마냥 놀 것이다. 이제 숙소만 정해지면 된다. 남편과 상의를 위해 식탁에 앉으면 결론은 늘 같았다.
"그래, 천천히 알아보자."
내 생각은 달랐다. 더는 미룰 수 없었다. 무작정 초록창에 "여름휴가지 추천"을 검색했다. 한창 미니풀이 거실에 있는 풀빌라 형태의 숙소가 생기고 있을 때였다. 이미 합리적인 가격의 시설 좋은 곳은 만실이었다. 휴가는 쉬라고 있는 날이 아니던가. 이런 휴가를 계획하는 일조차 게으름을 허락하지 않는 것에 화가 났다. 하지만 금세 숙연해졌다. 바쁜 세상을 살아가는 이 모든 사람들이 휴가철 "나"를 쉬게 하기 위해 이리 부지런히 움직였다니... 그에 반해 나는 "나"가 떡이 되든 말든 그저 남의 일 해주기 바쁜 시간을 보내왔다.
나는 의식의 흐름을 따라 "특별한" 여름휴가를 조각해 갔다. 그래, 지금이라도 "나"를 위한 휴가를 계획해야지. 그나마 남은 곳 중에 가장 저렴한 곳이 100만 원. 1박 2일이라기에 믿을 수 없는 가격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하기에 느긋하게 먼 산 보듯 앉아있는 남편이 미웠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은 순간, 나는 여름휴가 숙박비만 100만 원을 결제했다.
그해 여름휴가는 돈 든 만큼 잘 보냈을까? 대답은 당연히 No. 100만 원짜리 풀빌라를 결제했지만 실제로 풀에서 논 시간은 2시간. 하필 돌아오는 길 국지성 호우를 만나 한 시간반이면 집으로 갈 거리를 두 배의 시간이 걸려 도착했다.
그래도 이거 하나는 제대로 건졌다. 바로 다음달 카드값을 본 남편의 기함하던 표정과 매해 휴가를 철저히 계획하는 마인드.
올여름휴가는 거의 2~3달 전 예약을 했다.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7월 말 ~ 8월 초보다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되기 전인 7월 초쯤으로. 날씨는 운에 맞긴다. 일정이 있는 점심 빼고는 다른 식사는 직접 해 먹거나 싸간 음식으로 해결할 예정이다. 워터파크 대신 숙소 앞 바닷가에서 놀면 비싼 티켓 값도 굳는다. 100만 원이면 2박 3일을 저렴하고 만족스럽게 놀고도 남는다.
아직 휴가를 제대로 계획하지 못하고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면 한 번 돌아보자. 내가 "나"를 잘 챙기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만약 그렇다면 꼭 여름이 아니어도 좋으니 나와 내 가족이 편히 쉬다 올 수 있는 여행지로 과감하게 예약을 해두자. 빼도 박도 못하게 결제를 해두고 그날만큼은 마음 편히 놀 수 있게 오늘 나를 더욱 부지런히 굴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