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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나 Mar 05. 2022

시작과 끝에서 보내는 편지

이미 나를 아는 너에게, 나를 알아줘서 고맙다고.



2021년 2월의 편지


안녕. 오랜만이지?


작년 봄, 나는 얼떨결에 재택근무를 시작했어. 코로나 고위험 국가에서 입국한 사람과 접촉했을 시 재택근무를 하라는 이메일이 왔는데, 나는 며칠 전에 한국에서 온 사람이랑 살고 있었거든. 매일 3시간 통근을 안 해도 되니 이득이다 싶어 이메일을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다가 새벽에 예약 발송해 놓고 회사에 안 나갔는데, 이틀 뒤에 모두 재택을 시작했지 뭐야. 그 뒤로 사무실에 못 가봤어. 내 책상 구석에 놔둔 선인장 두 개는 어두운 사무실에서 외롭게 말라가고 있을지도 몰라. (정정: 무려 2년 뒤에 내가 사무실에 남기고 온 물건을 모두 버려도 괜찮겠냐는 이메일이 왔어. 안 된다고 하면 국제우편이라도 보내줄 생각이었나?)


한 달, 한 달 계약을 연장하다가 결국 팀원들과 얼굴 보며 인사도 못 한 채 미국 비자 기간이 끝났어. 퇴사 인사 예시 몇 가지를 검색한 후 싱거운 굿바이 이메일 하나 남겨놓고 첫 직장을 떠나게 된 거지. 그 뒤로 뉴저지에서 한국으로, 서울에서 성남으로, 다시 서울로, 또 서울 안에서 지낼 곳을 찾으며 이사만 4번 했는데, 뭐 덕분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낸 걸지도.


요즘은 여행 없이 한 곳에 1년만 있어도 몸이 근질근질해. 짐 싸기에 지쳐있으면서도 짐을 안 싸면 뭔가 정리가 안 된 느낌이 나. 새로운 곳에 가서 무능한 이방인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관광객, 어쩌면 초대받지 못한 침입자로서 적응하고 받아들여지는 기간을 되풀이하다 보면 허무해지기도 하면서도, 낯선 곳이 익숙한 곳으로 변하는 그 순간들이 소중해서 중독된 듯이 또 새로움을 찾아. 웃기지, 새로운 것이 더 이상 새롭지 않아 지는 과정이 좋아서 새로운 것을 찾는다니.


사실 어디에 있던 그 공간에서 보내는 시간에 유통기한이 있으니, 나는 주로 끝을 바라보며 지내. 지금 앞에 있는 결승선에 다다르면 바로 다음 결승선이 생기는 편이거든. ‘지금은 못 해, 이사하면 해야지, 거기 가면 해야지, 3월 되면 할 거야’ 같은 말을 무의식에 되뇌고 있더라고.


솔직히 말하면, 정해진 기간이 없으면 막막하기도 해. 지금껏 5개국에서 살았는데, 그동안 학기, 방학, 비자, 계약, 모두 끝이 있었잖아? 끝이 있으면 시작도 있으니, 내가 아무리 한 곳에서 짐이 쌓이고 틀에 갇힌 듯해도 싹 갈아엎고 다시 시작할 수 있잖아. 안 좋은 인간관계가 있다면 1년 뒤에 안 보면 그만이고, 가구가 마음에 안 들더라도 몇 개월만 버티면 그만이고. 1년 쓰고 말 거니까 월마트에서 가장 싼 청소기를 구하고, 어차피 3개월이니까 침대 시트가 소름 끼치는 연두색이어도 눈감아주고.


'정해진 기간'의 장점이 있다면 매일을 최대한으로 살 수 있는 원동력이고, 단점이 있다면 시간에 쫓기듯 행동하는 조급하고 계산적인 마음가짐, 그리고 그것마저도 지쳤을 때 찾아오는 체념이겠지. 2주 동안 지낼 게스트하우스여도 화병을 꺼내 꽃을 꽂아 놓는가 하면, 1년 동안 있을 기숙사에서 내 시간을 투자할 만큼 이 사람이 나와 잘 맞는지 순식간에 결정해버리기도 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조연으로 사는 건 생각보다 편하거든. 새로운 사람으로서 겪는 부끄러움이나 수많은 자기소개와 작별인사로 소모되는 일도 물론 힘들지. 그렇지만 그만큼 한 곳에서 진드거니 내 자리를 찾고, 주위에 맞추어나가고, 소속감을 느끼는 일도 어려우니까.


정착. 그토록 입에 달고 다녔고 바래 왔는데, 막상 선택지가 되어버리니 두려운 단어야. 내가 과연 한 곳에 마음을 빼앗길 수 있을까? 끝을 모르는 시작을 할 수 있을까? 이제야 내가 청소년기에 노래 부르던 안정이란 게, 짐을 맘껏 쌓아놓을 수 있는 방과 책임감이 주어지는 직장이라는 모습으로 찾아오는 걸까? 그때나 지금이나 어렴풋이 알고는 있지,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란 이런 외적인 조건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걸.


내겐 집이라는 공간이 정의하기 힘들어. '집에 가자'라고 했을 때 2년 살았던 원룸이 될 수도 있고 한 달 지낸 게스트하우스 일수도 있어. 내가 거쳐온 수많은 집 중에는 계약서의 내 이름이 적혔던 투룸도, 친구 방 한구석도, '우리 집'이지만 손님방에서 지내야 하는 주택도, 어렴풋이 기억나는 작은 반지하방도, 작은 싱크대와 침대, 공용화장실로 마냥 족했던 외국에서의 첫 집과 방학이어도 돌아갈 곳이 없어서 의지해야 했던 기숙사도 있어. 그저 하루가 끝나고 돌아와 쉴 수 있는 곳이라면, 내가 애착이 가는 물건 몇 가지 꺼내놓을 수 있는 곳이라면, 집이라고 불러주고 싶어. 이건 내가 희망하는 바고, 항상 그렇진 못하지. 이 기준은 꽤 다정하고 광범한 기준이라고 생각하거든. 공간은 있어도 집이라고 정의하지 않을 때도 있고, 가족이 다 같이 먹는 점심이라든지 새 양말을 신고 난로를 쬐는 시간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느낌을 집이라고 이름 붙여 줄 때도 있어. 집에 대해선 앞으로도 할 말이 많을 테니, 이만 줄일게.


대학에서 ‘집’에 관한 졸업작품을 만들고 짧은 2n 년 생의 할만한 얘기는 다 쏟아버린 건지, 한 1년 동안 글을 써야겠다는 의욕이 생기지 않았어. 복잡하고 풍성했던 해외 학창 시절이 끝나고 한국에 왔으니 나는 볼품 없어지는 걸까 하는 꽤나 별꼴인 생각이 들더라고. 해외생활이 내 정체성에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거야. 그거 없는 나는 뭐가 남는지 생각을 안 해봤더라.


초등학교 1학년 첫날, 나는 “안녕, 나는 00이고 한국에서 왔어”라고 나를 소개하지 않았겠지? 그냥 이름이랑 학년과 반, 뭐 사는 동네나 취미, 특기, 좋아하는 가수 정도를 이야기했겠지. 내가 살았던 모든 나라와 부모님이 어디에 계시고 언니는 또 어디에 사는지, 그 나라들에서 생활은 어땠는지, 이미 떠나온 수많은 집들이 왜 내 일부분이 되었는지, 그래서 내 가치관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첫 만남부터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았겠지. 그저 그 사람과 시간을 보내고, 밥이나 간식 한 번씩 먹고 가끔 놀러 다니면서 차츰 내가 이해받고 있다고 느꼈으려나.


어쩌면 습관 같은 거지.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아서 시간이 없어. 친해지고 싶은 사람을 차차 알아가면 금세 해어질 시간이 다가오기 마련이야. 그래서 만나자마자 인생사를 읊어주고 가장 어려웠던 순간까지 서슴없이 이야기해. 해변이니 뭐니 다 건너뛰고 손잡고 깊은 바다로 뛰어드는 거야. 그러다 이 사람이랑 안 맞는다 싶으면 가차 없이 쑥 나오기도 해.


이게 익숙해져서 그런지 콕 찍을 수 없는 답답함을 느낄 때도 있어. 난 나를 다 보여줬는데, “아, 내가 00에 있었을 때...” “그 재작년에 00에 있었을 때”라며 내 정체성, 곧 내 과거를 이야기하고 또 하며 나를 이해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나는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게 없는 거야. 내가 질문을 하지 않아도 깊이 나누는 사람들에게 익숙해져 있었나 봐. 묻지 않아도 이야기해 주기를 마냥 기다렸는데, 우린 속도도 다르고 기대하는 관계도 달랐었던 거지. 나는 그 사람과 말 못 할 벽을 느끼며 친절함을 가식으로 받아들였고, 그 사람은 이미 충분히 친해졌다고 느낀 거야. 난 아마 꽤 부담스러운 사람이었을 거야.


나 또 내 얘기만 하고 있잖아. 그래도 기록을 남기면 언젠가 쓸모가 생기지 않을까 싶어서 이미 정리하고 정리했던 이야기 굳이 또 정리해보려고 해. 기억에 덧대 쓰인 글이니 100% 실화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뭐 원체 이야기는 첨가물이 좀 추가돼야 재밌지 않겠어? 그래도 네가 공감할 만한 부분들이, 너의 경험에 비춰볼 만한 이야기들이 조금은 있을 거라 믿으며 글을 보내볼게. 모두 아끼는 이야기들이지만, 쉽게 읽히길 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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