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이란-이스라엘 전쟁 발발로 국제정세가 많이 불안정합니다. 이번 전쟁의 1차적 출발점이 하마스와 이스라엘 간의 전쟁이었다는 것은 다들 아실 텐데, 어째서 이란이 하마스를 지원하고 있는지 그 이유와 배경을 설명드리고자 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진 이란의 모습은 무슬림 극단주의자들이 정권을 잡고 여성인권을 억압하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1979년 이전까지 이란은 개방적이고 서구친화적인 국가였습니다. 1948년에 이스라엘이 건국되자 불과 2년 만에 국가로 인정했고요.무슬림 국가 중에서는 튀르키예 다음으로 두 번째였습니다. 자연히 이란과 이스라엘은 긴밀히 협력하는 중동 최대의 파트너 국가였습니다.
사진 : 1974년 이란의 팝가수 사진. 여성의 복식에 개방적인 사회상을 보여줍니다. (출처)
이런 관계를 뒤엎은 게 1979년 이란 혁명(=이슬람 혁명)입니다. 무슬림 지도자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는 반 세기 동안 이어진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리고 이슬람을 통치원리로 내세웁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진보적인 의미를 담는 '혁명'보다는 '퇴화'가 아닐까 싶지만, 적어도 독재 정권에서 대중의 지지에 기반하는 체제 변화라는 발전은 있었습니다. 그럼 이란인들은 왜 혁명을 지지했을까요?
혁명이 성공한 요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여기서 모두 다루기는 힘들고 중요한 한 가지만 살펴보고자 합니다. 바로 서구권에 대한 반발입니다. 팔레비 왕조는 미국을 위시한 서구 기독교 국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서구화와 세속적 정치를 펼쳤고 이는 국민들의 반감을 야기했습니다. 이슬람 원리주의적 혁명은 그에 대한 대항마로서 인기를 얻게 되었고요.
중동이나 무슬림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분들은 이를 두고 단순히 무슬림들이 폐쇄적이고 보수적이고 또 기독교를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곤 합니다. 하지만 한 세기 앞서 19세기 중반에 오스만 제국이 탄지마트 혁명으로 세속적, 서구적 질서를 법제화했을 때 국민들의 반발은 이 정도로 강하지 않았습니다.
(정환빈, 팔레스타인, 100년 분쟁의 원인, 199-218) 오히려 술탄의 개혁 의지가 약하다고 비판받았고 1908년에 개혁파들이 혁명을 일으켜 민주정을 도입합니다.
왜 같은 무슬림 국가인 이란에서는 20세기 중반에 세속화, 서구화가 역풍을 맞았을까요? 그 해답은 서구 국가들이 무슬림들에게 자행한 부정의에 있습니다. 15세기말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래 유럽 국가들은 전 세계의 식민지화를 시도했고, 19세기부터는 무슬림 국가들이 대상이 되었습니다. 아래는 유럽의 지배를 받은 '아랍' 무슬림 국가들입니다.
- 알제리 : 19세기부터 1962년까지 프랑스 지배
- 이집트 : 1882-1952년까지 영국 지배
- 리비아 : 1911-1945까지 이탈리아, 1945-1951 영프 지배.
- 모로코 : 1912-1956까지 프랑스, 스페인 지배
- 튀니지 : 1881-1956까지 프랑스 지배
- 시리아 : 1918-1946까지 프랑스 지배
- 레바논 : 1918-1943까지 프랑스 지배
- 이라크 : 1918-1932까지 영국 지배
- 요르단 : 1918-1946까지 영국 지배
- 팔레스타인 : 1918-1948까지 영국, 1967-현재까지 이스라엘 지배
이외에도 사우디아라비아처럼 독립국가를 구성했더라도 서구의 내정간섭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국가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란과 같은 비아랍 무슬림 국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19세기 말 이후로 서구에 대한 무슬림들의 반감은 우리가 일본에 가지는 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 20세기 동안 여러 무슬림 국가들이 민주화를 시도했는데 미국 등이 친서구 독재정권을 옹호하고 민주화의 꿈을 짓밟습니다. 그러니 악마보다도 악명이 높았습니다.
이슬람이 종교적으로 보수화, 정확히는 폐쇄적으로 변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태초의 이슬람은 사회개혁에서 출발한 종교이기 때문에 그보다 앞선 시대에 만들어진 유대교나 기독교보다 개방적이고 자유로웠습니다. 그러나 십자군 시기를 거치면서 무슬림 사회는 점차 폐쇄적으로 변했고, 특히 19세기 말부터 서구 기독교에 대항하기 위한 정신적 가치로서 이슬람 원리주의가 태동하고 지지받게 됩니다.
이런 배경을 이해하고 이제 핵심인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서 들여다봅시다.
모든 무슬림에게, 특히 아랍 무슬림에게 서구가 저지른 가장 부정의한 짓이 바로 이스라엘의 건국입니다. 우리는 그저 팔레스타인 땅에서 이스라엘이 건국되었기 때문에 아랍인들이 땅 찾으려고 싸운다 정도로만 알고 있지만, 역사적 과정은 그리 단순하지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건국을 주도한 유대 민족주의 세력, 즉 시온주의자들은 '아무런 정치적 목적 없이 아랍인을 부유하게 해 주고 같이 평화롭게 살려고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 오는 거다'라고 선전했습니다. 그러나 불법적으로 이주를 하고 땅을 사고 아랍 소작농을 추방하고, 자신들끼리 독자적인 사회를 구축하고, 민병대를 만들어 군사조직을 갖추는 등 말과 행동이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아랍인들이 유럽에서 발간된 시온주의 서적을 직접 읽고 시온주의의 정체를 폭로하고, 당시 팔레스타인을 통치한 오스만 제국에 유대인 불법이주자를 추방하고 식민촌을 파괴해 달라고 청원했으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갑니다.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늘어나면 이 지역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키울 수 있다고 본 영국과 러시아 등이 반발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1차 대전 때 영국이 오스만으로부터 팔레스타인을 빼앗아서 강제통치하고, 시온주의 세력의 성장을 돕습니다. 아랍인들이 반발했으나 영국은 유대 국가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며 공식적으로 부인했고, 독립을 옹호하는 자들을 극단주의자로 몰아서 탄압했습니다. 그러다 1930년대 중반이 돼서 유대 인구가 과반을 넘어설 우려가 보이게 되자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이 처음으로 무장투쟁에 나섰고, 영국은 수천 명을 학살합니다. 이로 인한 범아랍 범무슬림권의 불만은 더욱 커집니다.
1947년에 유엔 총회는 미국과 소련의 입김 아래 유대 국가의 건국을 승인합니다. 이때 내세운 논리 중 하나가 홀로코스트로 인한 피해 보상입니다. 그런데 홀로코스트를 저지른 건 기독교 유럽인들이지 아랍인이 아니었습니다. 아랍 국가들이 이 점을 설파했으나 쇠 귀에 경 읽기였습니다. 더군다나,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 시온주의자들이 인종청소를 저질러서 200여 개의 마을을 파괴하고 30만 명을 피란길에 오르게 만들었는데도 서구 국가들은 가만히 있었습니다. 결국 아랍인들의 분노가 폭발하자 아랍 국가들이 팔레스타인으로 구원군을 보내기로 결정했고, 그게 바로 제1차 아랍-이스라엘 전쟁입니다.
그 이후로 일어난 일들도 가관입니다. 이스라엘은 유엔이 권리를 인정한 팔레스타인 난민의 귀환을 거부하는데도 평화를 사랑하는 국가로 인정받고 유엔에 가입합니다. 그 후 두 차례에 걸쳐 서안과 가자지구를 침략해 정복하는 데 성공했고 오늘날까지 식민 지배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자원을 뺏고 식민촌을 짓고, 유대인 테러리스트가 농작물을 불태우고 팔레스타인인을 폭행하고 총을 쏴대도 면죄부를 줍니다. 이에 대해 무슬림과 아랍 국가들이 항의해도 모른 척하고넘어가지요. 이런 조직적인 침묵은 당연히 우연이 아닙니다.
며칠 전인 15일, 미국의 탐사보도매체 인터셉트는 "뉴욕타임즈 뉴스룸이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살상을 취재하는 기자들에게 '팔레스타인'이나 '점령지'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말고 '대량학살'과 '인종청소'라는 용어 사용을 제한하는 지침을 입수했다"고 보도했습니다. (관련 보도 확인하기)
무슬림 국가들에 인권을 존중하라고 운운하는 서구 국가들이 보이는 이 같은 이중잣대에 무슬림들이 분노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게다가 이런 내로남불은 역사가 깊습니다. 유럽 국가들은 18세기부터 무슬림 국가 내 기독교도의 인권을 존중하고 평등권을 인정하라고 내정간섭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기독교도가 누리던 특권(병역면제 등)은 폐지하는 데 반대해 역차별 불만을 일으켰습니다. 더군다나, 동유럽에서 기독교도가 무슬림을 수십 만 명 학살하고 백만 명이 넘게 난민이 되어도 침묵하면서, 무슬림 국가에서 수십 명의 기독교도가 죽으면 세상이 종말 할 일인 것처럼 규탄했습니다. 당시 서구식 개혁을 추종한 여러 사람들이 이런 일로 등을 돌립니다.
이처럼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진, 그리고 계속되고 있는 일들은세계 어느 나라의 무슬림이나 자국의 역사적 경험으로 공감하는 부정의 입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지는 국경을 넘어 아랍권과 무슬림 공동체 전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단지 나라별 '정부'의 입장이 다를 뿐입니다. 특히, 서구권의 도움으로 정권을 유지해 온 왕정국가들은 불의 앞에 침묵하다가 민심이 폭발하면 그제야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시늉만 합니다. 이게 오늘날까지 팔레스타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이지요.
그럼 이제 다시 이란의 입장으로 돌아가볼까요? 1979년 혁명 이후 이란 정권은 이슬람의 기치를 높이 들었고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정의'를 위해 목소리를 냅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팔레스타인입니다. 1987년에 서안과 가자지구의 주민들이 민중봉기를 일으켜 식민 지배의 중단과 독립을 호소하자 이란은 적극적으로 지지합니다.
하마스에 대한 후원은 그 방식 중 하나였습니다. 하마스는 1987년에 창설되었고 독립보다 한 발 더 나아간 이스라엘 파괴를 목표로 내걸었습니다. 그런데 1990년대 중반에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이스라엘이 마침내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팔레스타인임시정부에 해당)와 평화협상에 들어가자 하마스 등의 단체가 반발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정의로운 평화를 인정할 리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마스가 평화협상 중에도 무장투쟁을 계속하자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비롯해 대부분의 아랍 국가들은 하마스와 거리를 벌립니다. 그러나 평화협상은 실패했고 이스라엘이 처음부터 온전한 독립이나 난민의 귀환권을 인정할 생각이 없었다는 게 밝혀지자 2005년에 열린 총선에서 하마스는 과반수의 의석을 확보합니다. 이전까지 팔레스타인 정부의 여당이었던 파타와 아랍 국가들, 서구 국가들은 하마스가 테러단체라는 구실을 들며 선거 결과에 반대했으나, 이듬해 하마스는 주민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가자지구에서 독립 정부를 구성합니다. 그러자 가자지구의 완전봉쇄라는 '형벌'을 받게 됩니다. 이로써 하마스는 국제사회에서 완전히 고립되지만, 팔레스타인인들의 지지는 더욱 커졌기 때문에 이란은 이를 호기로 보고 하마스에 대한 지원을 늘립니다.
이란이 팔레스타인 정부가 아니라 '하마스'를 후원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평화협상으로 독립을 추구하는 팔레스타인 정부의 파타와는 달리 하마스는 적극적인 투쟁으로서 '정의' 구현 과정을 선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국민적 지지를 유도하기에 용이합니다. 다른 하나는 고립된 하마스를 통해 팔레스타인에서의 영향력을 키워 중동의 패자로 부상하기 위해서입니다. 팔레스타인 문제에 앞장서는 모습은 범아랍 범이슬람권의 지지를 획득하는 최고의 수단으로 평가받습니다.
정리하면, 이란이 이스라엘을 적대하고 하마스를 후원하는 본질적인 이유는 결국 정권 유지와 국익 증대입니다. 미국의 후원을 받는 이스라엘을 직접 건드릴 수는 없기 때문에 정의 실현의 구도자로서의 역할을 대행해 줄 하마스를 지원하는 것이지요.
지난 4월 13일에 이란이 이스라엘을 공습한 것은 이스라엘 건국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란 정부는 당시에도 지금도 이스라엘과의 직접적인 대결을 지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튀르키예를 통해 미국에 공격 사실을 사전에 알리고 공격목표도 군사기지 등으로 제한해 인명피해 없이 끝냈습니다. 그럼 왜 이런 공습을 했던 것일까요? 언론에서는 이스라엘이 시리아에 있는 이란 영사관을 공습한 일에 대한 보복이었다고 말하지만, 이는 직접적인 계기였을 뿐 근본적인 원인은 국민의 실망과 분노에 있습니다.
작년 10월 7일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은 이란의 후원하에 계획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이 3만 3천 명이 넘는 가자지구 주민을 죽이는 동안에 정부가 잠자코 가만히 있자 이란 국민들은 많이 부끄럽고 실망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이스라엘이 영사관을 공습했으니 국민들의 불만이 폭발했고 이란 정부는 뭐라도 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습니다.
이란과의 확전을 피하는 건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위성사진으로 확인된 바에 따르면, 19일 자 이스라엘의 공습은 이란에 별다른 타격을 입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란은 서둘러 이번 일로 피해가 없었다고 언론에 발표하고, 만약 앞으로 '추가 공격'이 있으면 대대적으로 보복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즉, 이스라엘에 제발 일을 더 키우지 말아 달라고 사정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두 국가는 다시 소강상태로 돌아갈 것으로 전망됩니다. 다만, 적대행위가 그친다기보다는 이전까지와 마찬가지로 하마스와 헤즈볼라가 이스라엘과 싸우고 이란이 후원하는 '대리전쟁'의 양상으로 복귀하는 것이지요. 이란이 공습했을 때 이스라엘이 가자지구 남부 라파에서 군사 작전에 들어가겠다고 소리를 높였던 것도 이 때문으로 보입니다. 국제사회의 반발 때문에 앞으로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의 만행을 중단할 수도 있지만, 이란에 쌓인 불만을 가자지구에서 더욱 거세게 풀 수도 있을 듯합니다. 아무쪼록 영구적인 휴전이 조속히 성사되기만을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