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7월 29일
새해 첫 글을 작년 강연 후기로 시작하네요. 후기 글은 그만 적으려고 했는데, 베네수엘라 소식 듣고 마음이 착잡해서 글을 씁니다.
지난 7월 28-30일에 대학 연합 동아리 PAZ가 개최한 대학생 국제정치·외교 컨퍼런스(UIDC)가 열렸습니다. UIDC가 무엇인지, 아래 공식 설명글을 볼까요?
2025년 대학연합 국제정치・외교 동아리 'PAZ (스페인어 '평화')'는 ‘민주주의의 위기, 대안을 찾다'라는 주제로 <대학생 국제정치・외교 컨퍼런스(UIDC)>를 개최합니다. UIDC를 통해 대학생, 전문가들이 한 자리에 모여 국제사회에 고조되는 위기와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함께 토론할 예정입니다. 2025년, 현재와 앞으로의 미래를 살아갈 세대로서, 대학생들이 국제사회와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함께 진단합시다.
UIDC는 총 3일간 진행되었습니다. 1일 차에는 미국/중국, 2일 차에는 국제기구/유럽/팔레스타인, 3일 차에는 한국 필드답사가 있었는데, 저는 당연히 팔레스타인 파트의 강연을 맡았습니다. 2024년에 이어 두 번째로 강의를 맡은 거라, 전년도와 달라진 점을 비교하는 재미가 있더군요.
우선,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학생들의 관심이 상대적으로 저조해졌다는 점이었습니다. 전쟁이 2년 차에 접어드는 시점이니 당연하다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해외에서는 2024년보다 2025년에 관심이 더욱 커졌고, 시위도 빈번해졌습니다. 왜냐하면 2025년 봄-여름에 이스라엘이 식량 유입을 극도로 통제해서 아사자만 200명이 넘었기 때문입니다. 생존한 아이들도 대부분은 영양실조를 경험했고, 상당수는 평생 후유증으로 남을 거라고 합니다. 이는 전쟁의 한 국면이라기보다는, 2차 대전 당시 홀로코스트처럼 독립된 잔혹행위를 구성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아무튼, 그래서 팔레스타인 문제는 2025년에 더욱 심각해졌고, 우리나라 시민 단체들의 연대 시위도 활성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반 국민들의 시각에서는 체감이 잘 안 되죠? 사실, 강의 들으러 온 학생들도 제대로 모르길래, 이런 측면을 자세히 알려줄지 말지 고민하다가 접었습니다. 학생들이 배우고 토론하기 위해 오는 행사인데,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아이들 사진 보여주고 이러면... 아무래도 이성적인 사고를 하기가 힘들 테니까요.
아래 사진과 링크는 제가 강의를 한 바로 그날 유엔에서 내보낸 브리핑입니다. 아이 모습이... 너무 안타깝죠? 저런 아이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제가 언론에 나온 사진에서 본 아이들의 수만 계산해도 수십은 됩니다. 유엔에 따르면, 셋 중 한 명 이상은 며칠 동안 한 끼도 못 먹은 적이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전쟁의 양상이 너무나도 바뀌었기 때문에 강의의 방향성에서도 고민이 깊었습니다. 2024년에는 하마스에 대한 비판을 곁들였다면, 이제는 그런 말을 꺼내는 게 무의미한 상황입니다. 하마스의 잘못과 연결 짓는 게 불가능한 수준의 잔혹행위가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령, 비교하자면 이런 거죠. 독일인들이 유대인을 미워하게 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걸 홀로코스트의 원인으로 제시하지는 않지요.
그래서 강의를 하면서 마음이 좀 복잡했습니다. 저는 단순히 이번 전쟁이 아니라 분쟁 자체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관점을 형성하는 데 주안을 두고 있기 때문에 팔레스타인 측에 대한 비판도 중요하게 고려합니다. 그런데 작금의 전쟁 상황에서는 그게 오히려 왜곡된 시야를 낳을 수가 있어 자제해야 하는... 그런 족쇄가 채워진 셈이죠. 자칫 잘못하면 '양쪽이 다 잘못했다는 거네?'라고 오해를 부를 수가 있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강의를 하고 나서도 회의감을 좀 느꼈습니다. 그래도 학생들이 질문도 열심히 던지고, 잘 들었다고 인사도 전하는 걸 보며 도움이 되긴 했구나 하고 안도했습니다. 2024년에 이어 두 번째로 듣는 학생들도 두세 명 있었는데, 다시 들으니 더 정리가 잘 되어서 좋았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학생 여러분.. 웬만하면 들은 거 또 듣지 마세요... 시간 아깝게 왜;;;;
2시간 강연이 끝난 뒤에는 90분 동안 학생들 간의 토론이 이어졌습니다. 사실, 이-팔 분쟁은 토론거리로는 적합지 않은 주제입니다. 옳고 그름이 너무나도 선명한 주제라서 공방을 주고받을 사안이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학자들이 분쟁이나 전쟁에 대해 논할 때는 그 배경이 되는 '역사적 진실'이 옳냐 그르냐로 논박을 합니다. 그런 배경 지식이 없는 학생들이 토론을 하면 신기루 같은 말장난이 되기 십상입니다.
이 때문에 학생들이 토론을 계획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굉장히 걱정돼 사전 면담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우리 기획단 학생들이 참으로 영리하고 창의적인 방식을 고안했더군요. '한국인 대학생', '미국인 대학생', '유엔 기구 직원', 'BBC 뉴스 기자', '이스라엘 인권단체 활동가' 등 다양한 역할을 설정하고, 자신의 관점이 아닌 '역할 인물의 관점'으로 이번 전쟁에 대해서 논하는 역할 분담 토론이었습니다.
이 방식은 여러 가지 장점이 있었습니다. 우선, 역할 인물의 상황을 이해해 봄으로써 가자지구 전쟁을 다양한 각도에서 접하는 계기를 제공합니다. 그렇게 상상해서 만든 역할 인물의 입장에서 말하는 상황은 '정답을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조건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만의 주관을 확립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당당히 말할 수 있게 됩니다. 같은 이유에서 상대방이 반박을 해도 덜 방어적이게 됩니다.
물론, 단점도 있었습니다. 배경지식이 부족하니 역할 인물의 입장을 충분히 상상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기획단이 역할 인물의 상황적 특징을 정리한 자료를 사전에 제시하긴 했지만, 그걸로 충분하지는 않겠지요. 문제지 풀듯이 정해진 내용을 순서대로 따라가는 게 아니라, 돌발적인 이야기가 오가는 토론이니까요.
뭐, 그래도 90분 동안 쉴 틈 없이 토론하는 걸 보니 좋은 성과를 거둔 듯했습니다. 부족한 점들은 분명 있었지만, 그래도 참가자들이 잘 모르는, 심지어 토론 진행자들한테도 아직은 생소한 주제를 가지고 이만큼이나 해낸 게 참 대단하다 싶었습니다. 조금만 더 잘 가꾸고 발전시키면 해외에 모범 사례로 알려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마이뉴스에 체험글 적어도 좋고, 영상 촬영해서 유럽 친팔 시민단체들에 보여주면 정말 좋아할 듯합니다.
이번 행사 잘 꾸려낸 기획단 친구들과 함께한 학생분들,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끝으로, 여러분께 짤막하게 전하고픈 메시지가 있습니다. 소식 들으셨겠지만, 1월 3일 미국이 베네수엘라를 공습해 80명 이상을 학살하고 마두로 대통령 부부를 납치했습니다. 미국 언론에 이미 여러 차례 보도된 바에 따르면, 베네수엘라 원유가 핵심 이유였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원유를 언급한 적도 있었죠. 이번 공격 직후에도 "아주 규모가 큰 미국의 석유 회사들이 들어가서 수십억 달러를 들여 심각하게 파괴된 석유 인프라를 복구할 것"이라며 "(그 회사들은) 그 나라를 위해 돈을 벌기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연합뉴스)
하고픈 말은 참 많지만, 여기서 구구절절 얘기하기는 그렇고, 딱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국제 정치를 배우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우리나라는 국제정치를 배우는 동기가 대부분 흥미로워서입니다. 그러나 학문으로서의 국제정치학은 글로벌 체계가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세계의 평화와 질서, 번영을 가져오는 데 목적을 둡니다.
요즘 세계정세가 변화무쌍하니 국익 사수에 충실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강화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설령 이러한 관점에 동의한다 할지라도 무엇이 국익에 부합하는지를 제대로 고민해야 합니다. 강대국의 비위에 맞추거나, 미-중 사이의 균형외교만 잘하면 우리의 평화를 지킬 수 있을까요? 주변에 다른 약소국이 모두 지도에서 지워진 다음에도 그럴 수 있을까요?
우리와는 달리 다수의 국가는, 특히 약소국들은 국제법과 국제평화를 위해 목소리를 냅니다. 당장은 미국이나 중국의 견제와 위협을 받더라도, 장기적으로는 국제사회에 정의가 바로 세워져야만 평화가 보장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정치인들은 눈앞의 이익밖에 보지 못하는 직업군이기 쉽지만, 학문을 배우는 학생이나 학자들은 장기적 비전을 가지고 미래를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우리만 평화로운 세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평화로운 세상만이 우리에게 평화를 보장해 줍니다.
그러니 이번 베네수엘라 공습이나 가자지구 전쟁이나, 그 어떤 국제 뉴스를 접하더라도 항상 그러한 '목적의식'을 분명히 하고 현실을 분석하는 습관을 들이시길 당부합니다. 더 나은 미래는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