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어주는 남자] 수치심과 죄책감
책 읽어주는 남자(베른하르트 슐링크)
수치심은 인간이 태어날 때 갖고 있는 자연스러운 감정이 아니다. 전적으로 사회문화라는 제도 틀 안에서 습득되는 것이다.
성경엔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었음에도 서로 부끄러움이 없었지만 죄를 짓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이 큰 잎으로 자신의 몸을 가리는 것이었다고 나온다. 아기가 태어나 자라며 하는 일들에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 똥을 싸고, 오줌을 갈기고 손으로 음식을 헤질러 놓고, 엉덩이를 드러내 놓고 놀아도 부끄러운 줄 모른다. 9살, 7살인 남매지기인 아이들도 가끔 목욕을 같이 한다. 나는 팬티를 입고 하라고만 당부한다. 아직까지 그들은 서로 그런 감정을 못 느낀다.
정글에서 자라난 늑대소년 이야기가 있다. 1888년 슬리먼은 <굴 속에서 새끼를 끼우는 늑대들에 관한 보고서, 어느 인도 관리의 기술>이란 논문에서 관찰 기록을 상세히 증언한다. 늑대에게 길러진 소년은 사람들에게 으르렁댔고(언어 결여), 날고기를 개처럼 양손으로 눌러놓고 입을 갖다 대며 먹었다. 추위, 더위, 비 같은 날씨는 전혀 개의치 않았고 오직 먹을 것만 해결되면 족했다. 위생이나 습관은 불결했고, 거칠고 난폭적이고 사나웠다고 한다. 그는 늑대소년이 "우둔하고 야만스러우며 불결하고 열등하다"라고 썼다. 생각해보면 이러한 결론은 인간 세계에서 결정한 것이지 늑대소년이 느끼는 감정이 아니다.
수치심을 느끼는 지점도 시대와 나라마다 다르다. 조선시대 단발령, 아녀자들이 품은 단도, 신분계급으로 인한 천대 등도 지금은 희석됐다. 중국인들이 물건을 살짝 던져서 주는 행위, 태국에서 어린아이가 귀엽다고 머리를 쓰다듬는 것(머리는 신성한 부위로 만져선 안된다), 프랑스에서 엄지와 검지를 둥그렇게 말아 오케이 사인을 하는 것(별 볼일 없다는 의미, V를 표시할 때 영국에서는 손바닥, 터키와 그리스에선 손등을 보여야 한다. 헷갈리면 욕설이 된다.
수치심은 남이 주기도 하고 내가 스스로 느끼기도 하는 감정이지만 죄책감은 오롯이 내가 느끼는, 인정해야 하는 감정이다. 죄책감 즉 죄의식은 가르쳐서 될 문제가 아니라 인간 깊은 내면에 나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솟구치는 감정이다. 죄송스러움을 넘어 '죄'를 씻거나 해결해야 해방된다. 범법자들이 죄의식을 느끼지 못할 때 인간다움을 버린 존재, 짐승만도 못하다고 손가락질한다. 우리 아들이 어머니 지갑에 손을 대고 신용카드를 긁어서 걸렸다. 신용카드를 긁기까지 수많은 전적이 있었다. 처음엔 1,000원 -> 5,000원 -> 10,000원으로 액수도 커져갔다. 아들이 그제야 걸렸을 때, 실토를 하며 안절부절못했다. 몇 날 며칠을 괴로워하더니 꺼이꺼이 울음을 터뜨리고, 식음을 전폐하고, "제발 저를 용서해달라"며 뒹굴며 빌었다. 죄 때문에 고뇌하고, 상심하여 내가 감히 구워 받을 수 있는지 심각하게 고민하는 한 영혼의 죄 씻음 작업은 강요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책읽는 남자>의 한나와 미하엘은 이런 수치심과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며 개인이 느끼는 감정을 넘어 사회와 국가에 책임을 묻는다.
한나의 수치심은 문맹이다. 그녀는 교과서 표지에 뻔히 써져 있는 미하엘의 이름을 읽지 못한다. 미하엘이 남기고 간 쪽지를 읽지 못해 그 쪽지를 없애버리고,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며 상대방을 허리끈으로 때리고, 뺨에 상처를 낸다. 그는 전차 회사에서 승진을 포기하고 나치 수용소에 감시원으로 일한다. 전범 재판에서도 6명의 감시원들이 한나 혼자 처리하고 보고서를 쓴 것이라며 모함해도 그녀는 끝내 자신이 문맹이었음을 밝히지 않는다.
미하엘은 15세다. 고등학교 학생이 35세 여인과 성관계를 가지는 것을 차마 밝히지 않는다. 그는 한나에 대해 침묵하는 것이 곧 '배반'이라고 말한다. 자신은 한나를 원하는데 한나가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 수치심을 느낀다. 또한 한나가 나치 수용소에서 포로들을 가스실로 보내고 불탄 교회에서 끝내 문을 열어주지 않아 모두 죽게 만든 끔찍한 여인을 사랑했다는 것에 수치심을 느낀다. 재판 중에 한나가 문맹임을 알게 되고, 법조인으로서 증인의 진실을 밝히는 것에 대한 갈림길에서 또 한 번 수치심을 느낀다. 10년 동안 책을 녹음하여 테이프에 담아 전해주면서도 안부나 방문을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것 또한, 거리감을 좁히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나는 교도소 안에서 드디어 글자를 익힌다. 그가 글을 알게 되고 제일 먼저 한 일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관련한 증언들과 논문, 책과 기사를 읽는 것이었다. 그는 18년 동안 속죄하는 마음으로 거대한 시스템 안에서 자신이 했던 일들을 반추하며 차곡차곡 돈을 모아 자신의 모든 기금을 유대인에게 전달해주길 부탁한다. 그녀는 출소를 하루 앞두고, 미하엘을 만나고 나서 자신이 용서받지 못했음을 느낀다. 미하엘의 한 마디, "당신은 재판 전에 그 사실을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요?"라는 말에 한나는 "그 누구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 누구도 내게 해명을 요구할 수 없지. 그러나 죽은 사람들은 내게 그것을 요구할 수 있어."라며 그다음 날, 목을 매 자결한다.
한나의 죄책감을 해방시킨 것은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일이었고, 미하엘의 죄책감은 그가 했어야 할 행동과 하지 말았어야 할 행동 사이에서 남은 자의 끝도 없는 질문이었다. 전후 세대가 전범 세대인 부모들에게 느껴야 하는 이중성은 한나와 미하엘의 관계만큼이나 복잡하고 얽혀 있으며, 이해와 유죄판결 사이에서 어느 입장을 자처해야 할지 맞닥뜨리기 어렵게 만든다.
나는 수치심과 죄책감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고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데 중요한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 삶과 역사적 반성은 부끄러워해야 할 일에 대해선 부끄러워하고, 자신과 남을 해하는 악과 죄에 대해 정당한 죄의식으로 속죄를 바라는 것일 게다. 그리고 다시는 그러한 전철을 밟지 않게 만드는 힘이 되기도 한다. 수치심을 주고, 모욕하는 사회는 근절해야겠지만, 독일과 일본이 보여주는 극명한 차이, 뻔뻔함과 겸손함을 지닌 세간의 인물들을 보며 수치심과 죄책감이 긍정적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성숙하고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수치심의 힘>을 쓴 집단행동 설계 전문가 제니퍼 자케는 수치심을 이용해 사회 개혁과 조직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다양한 사례를 제시한다. 쓰레기 실명제, 가입 명단, 참여 여부 공개, 수치나 지표를 알려주는 등의 행위를 하면 그만큼 법이나 강제 없이 동참하고 줄인다는 것이다. 건강한 사회는 수치심과 죄책감을 처리하는 능력에 달려 있고, 정죄하고 판단하여 땅에 디딜 곳이 없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상생과 공존의 역사를 새롭게 쓰기 위하여, 악습은 폐하고 선한 힘들을 다시 일어서게 하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