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크민이 물었어요
만난 지 벌써 10년이 다 되어가는, 여전히 즐겁게 만나고 있는 친구들의 모임이 있습니다. 어느 날 모임의 한 멤버가 “이 모임에 오면 다른 모임에서 하는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해서 즐겁다”라고 하더군요.
이 모임에서는 주로 그간 배우자들에게 느꼈던 서운함을 (술기운을 빌려) 토로하기도 하고, 최근 읽은 책, 유튜브, 환경문제, 젠더 이슈 등 정말 경계 없이 수다를 떱니다. 당장 사는 이야기와 일에 대한 고민 등을 털어놓고 서로에게 어떻게든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이야기들도 나누긴 합니다만, 주식이나 부동산 같은 재테크 이야기보다는 '열심히 살면서도 인간성이나 행복을 지키는 방법' 같은 주제로 흐르곤 합니다. 최근 이 모임이 참 소중하다고 새삼 느끼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다.
저는 미래 걱정을 많이 안 하는 편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먼’ 미래 걱정이요. 그래서 걱정을 안 하는 편이냐고 하면, 사실 가까운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는 누구 못지않게 걱정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동거인과 캠핑이나 여행을 갈 때마다 집 안 쓰레기통을 싹 비우고 어느 정도 정리를 해 둡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겨 못 돌아오게 될 경우, 정리할 누군가가 지저분한 걸 보지 않아도 되도록요. 언젠가 참여한 정신건강 워크숍에서 이게 불안 장애인지 물었더니 강사분이 제게 묻더군요. “그래서 여행을 가는지 안 가는지.” 간다고 했더니 그렇다면 괜찮답니다. 못 간다면 치료가 필요하지만요. 그래서 제가 '심하게 걱정을 하는 것'에 대한 걱정은 줄었습니다.
또 혈중지방 수치가 높아졌다고 주치의에게서 연락을 받았을 때도 제 걱정 수치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지방과 탄수화물을 거의 독극물 취급하기 시작했죠. 저희 집에서 주로 식사 준비를 하는 탄수화물 러버 동거인이 떡볶이에 떡 대신 뭘 넣어야 하는지 고민하게도 하고 (지금 생각해보니 참 고맙고 미안하네요), 캠핑에 초대했던 친구가 그 얘기를 듣고 본인이 다음 날 아침으로 야심 차게 프렌치토스트를 준비해 왔다며 미안해하던 기억도 나네요. 아우, 나 도대체 왜 그랬지. 엉엉
모두들 죄송합니다. 시간이 지나보니 혈중지방엔 스트레스가 제일 안 좋은 것 같더라고요.
제가 미래 걱정을 안 한다고 하니 누군가는 연금제도가 잘 되어있는 나라에서 살기 때문에 그런 거 아니냐고 묻더군요. 하지만 저는 이민자이고 직장생활을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연금을 많이 받지 못합니다. (갑자기 좀 걱정이 되네요. 껄껄). 또 과연 실제로 캐나다 연금제도가 진짜 잘 되어 있는지, 그렇다면 그 제도가 제가 은퇴할 때까지 건재할지는 또 다른 문제겠죠. 그리고 그 모든 건, 제가 내일 운동을 가다 에어팟을 줍느라 5톤 트럭에 깔리지 않았을 때 가능한 얘기입니다. (물론 그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 새벽에 운동 갈 때는 잘 보이라고 비가 오지 않아도 야광 노란색 우비를 열심히 챙겨 입고 다닙니다.)
한편, 이 나라에서 일찍 직장 생활을 시작해 연금 수령 나이가 지났음에도, 미래에 대한 여러 가지 걱정으로 은퇴를 미루는 동료도 있답니다. 한때는 코로나가, 지금은 트럼프의 관세가 이유라며 저와는 꽤나 차원이 다른 이유로 오늘도 은퇴를 미루고 출근하고 있는 동료를 보면 왠지 감탄하게 됩니다.
아무튼 이 글을 쓰게 된 것은, 이런 답없는 미래의 걱정들이 저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돈으로 살 수 있다면 아주 쉬운 행복이라고 믿고 있는 제 동거인은 때마다 취미 생활을 바꿔가면서 그때그때 다른 쇼핑 모드에 돌입하고, 저는 노상 놀러 갈 궁리만 하고 있는데,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갑자기 현타가 오곤 합니다. ‘아, 이렇게 사고 싶은 거 다 사고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사는 (사실 '다'는 못합니다 껄껄) 우리의 미래는 괜찮을까’ 하고요.
한 1년째 재미있게 하고 있는 ‘피크민 블룸’이라는 모바일 게임이 있어요. 걸을 때마다 꽃을 심고 그 주변에 있는 지형지물을 딴 장식 피크민을 모으는 게임이죠. 저녁때마다 피크민이 저에게 물어요. “오늘 하루는 어땠나요?” 하고. 기억에 남을 만한 힘든 일이 없었다면 대부분 웃는 얼굴을 택하곤 하는데, 가끔은 이렇게 대책 없이 해맑아도 되나 하는 생각이 잠시 머리를 스칩니다. 그러다가 다시 생각하죠. 내일의 걱정이 오늘 밤 웃는 얼굴을 택하지 못할 만큼 큰가 하고요. 매일 열심히 살더라도 로또가 되지 않는 한 해결도 되지 않을 그 걱정을 — 문제는 게을러서 로또도 사지 않음 — 하면서 제 소중한 시간을 채우는 것은 아무래도 아니지 않은가 싶어서요.
여기까지 쓰니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는지 까먹었네요. 나이 탓입니다. 그래도 쓰는 동안 즐거웠어요. 암튼, 그냥 먼 미래 걱정 않고 하루하루 재밌게 살고 싶다고요. 그리고 현재 잘 사는 법에 대한 수다를 떨 수 있는 친구들이 있어서 고맙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