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함께 쓰는 홋카이도 여행 이야기 29 - 마지막편
체크아웃을 오후로 해 두었는데도 어김없이 새벽에 눈이 반짝 떠진다. 여행 첫날 묵었을 때도 느꼈지만, 이 호텔의 창밖에는 밤새 쉬고 있는 비행기들이 보여 안팎으로 휴식을 취하는 기분을 준다.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공항 식당가에서 먹은 가라쿠(Garaku)의 수프카레. 사실 먹기 전에는 점심으로 뭘 먹어도 상관 없다고, 카레가 카레지 뭐, 했는데, 정말 안 먹었으면 후회했을 맛이었다.
그리고 다시 비행기를 타고, 하네다 공항을 경유해 집으로 돌아왔다.
남편의 제안으로 일주일에 두 편씩 꼬박꼬박 글을 올리기 시작했는데, 벌써 넉 달이다. 생각보다 큰 프로젝트가 되어버렸다. 이렇게나 할 말이 많은 부부라니, 껄껄…
사실 17일이라는 짧은 시간의 경험으로 어느 지역에 대한 글을 쓴다는 게 좀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막상 글을 쓰다 보니 쓰면서 기억과 경험 자체가 더 풍성해진 기분이라 쓰길 잘했다 싶다.
감사하고 행복했던 많은 순간들과 더불어, 남편도 나도 여러 번 글감으로 삼았던 것이 ‘거절’이라는 주제였다. 여행자이기에 작은 일들이 민감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고, '혹시 차별을 당하는 건가' 싶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그 나라라는 코끼리의 전부라고 결론을 내리고 싶지는 않다.
차별이나 혐오를 담은 말들이 세상에 넘쳐나는 걸 보면 참 안타깝다. 이런 자극적인 이야기들을 만들어내고 소비하다 결국 남는 것은 무엇일까. 서로 미워하고 적대감을 가지는 게 과연 누구에게 좋은 일일까.
캐나다는 사회 전반적으로 인종차별이나 혐오를 무겁게 다루기에 감히 속내를 드러내기는 쉽지 않다. 그런 마음은 숨어 있다가 기회가 있을 때 바퀴벌레처럼 튀어나오곤 한다. 팬데믹 시절 있었던 몇몇 테러—동양인을 밀치거나 욕설을 내뱉던 사건들—가 좋은 예인데, 주로 약한 여성이나 노약자들이 대상이었다. 우락부락하고 건장한 남성이 그런 혐오를 당했다는 뉴스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이때다' 싶어 혐오를 표출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비겁한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선택적 분노 조절 장애’라는 말이 있던데, 이건 뭐 ‘선택적 인종 차별/혐오’라고 해야 하는지.
이런 저급한 혐오가 세상을 병들게 하는 시대에서, 정신을 차리고 품위를 지키자고 스스로 다짐한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혐오는 얼마나 쉬운가. 예를 들어 교통 정체가 심하거나 전철에 사람이 많으면 이민자와 난민을 탓하는 게 가장 쉽다. 그들이 없어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 믿으며 말이다. 하지만 그게 정말 사실일까? 상황이 좋을 때 품위를 지키는 건 쉽다. 하지만 상황이 좋지 않을 때 보이는 태도야말로 진짜 품위다.
요즘 스스로에게 자주 되뇌는 말이 있다. “Assume best intentions(최선의 의도였다고 믿자).” 동료가 붙여놓은 메모를 보고 감탄하며 기록해 두었는데, 살아가는 데 꽤 도움이 되는 말이다. (물론 상대가 합리적인 사람이라는 전제 아래. 대화해 보고 합리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손절이 답이겠지만.)
얼마 전 일본인에게 일본어를 쓰면 무시당한다고, 일본어를 할 줄 알더라도 영어를 써야 상대방 기가 죽는다는 글을 봤다. 그 말의 사실 유무는 알 수 없으나, ’최선의 의도‘를 전제로 생각해보면 어떨까.
한국에서 활동하는 많은 외국인 중에는 정말 명석하고 대단한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 배운 한국어 발음이 완벽할 순 없다. (내 영어 발음도 네이티브처럼 들릴 일은 영원히 없을 것이다. 흑.) 그런데 그들의 발음이 약간 귀엽게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귀엽다는 느낌은 다면적이라,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그 ‘귀여움’이 무시로 느껴질 수도 있겠다 싶다. 남편에게 물어보니 귀여움 따위 받고 싶지 않다고. 껄껄.
어쨌거나, 여행지에서 스쳐 지나가는 정도의 인연이라면 굳이 기 싸움을 하느니, 그저 상대의 의도를 선하다고 가정하고 나의 품위를 지키면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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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또 말이 많았네.
암튼, 할 수 있는 동안 새로운 것을 계속 시도하고 배움을 멈추지 않고 싶다. 그러고 싶어도 못 하게 되는 날이 머지않아 올 테니까.
그래서,
(당분간) 여행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