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탄생
마치 흑요석을 정교하게 깎아 빚은 듯 매끄러운 광택을 가진 갑옷과 날카로운 가시. 우아한 자태를 지닌 가시개미 신여왕은 숲의 바닥에 낙엽이 쌓이는 늦가을, 결혼비행을 마치고 조용히 때를 기다린다.
그녀가 기다리는 것은 따스한 보금자리가 아니라 살을 에는 듯한 추위다. 추위가 찾아와야만 거대한 숙주의 제국이 잠들고 감각이 무뎌지기 때문이다.
운 좋게도 그녀의 시야에 먹이를 찾아 헤매는 숙주 일개미 한 마리가 포착된다. 하지만 그녀는 섣불리 덤벼들지 않는다. 마치 노련한 사냥꾼처럼 일개미의 뒤를 그림자처럼 밟으며 그들이 드나드는 은신처 입구를 집요하게 확인한다. 목표가 정해지면 그녀는 입구 근처 차가운 돌무더기나 나무뿌리 틈새에 매복지를 마련한다. 그리고 마침내 홀로 지나가는 일개미를 덮쳐 순식간에 납치한다.
납치된 일개미가 거세게 저항해 보지만, 신여왕의 억센 턱과 민첩함을 당해내기엔 역부족이다. 하지만 여왕은 이 포로를 결코 죽이지 않는다. 지금 필요한 것은 먹이가 아니라, 적진 깊숙이 침투하기 위한 '신분증'이기 때문이다.
여왕은 제압한 일개미의 등 위로 올라타거나 옆구리에 바짝 붙어 자신의 몸을 집요하게 비벼대기 시작한다. 차가운 늦가을 바람 속에서 생존을 건 은밀하고도 치열한 '페로몬 복제' 의식이 거행되는 순간이다. 숙주 개미들이 서로를 식별하는 고유의 체취가 여왕의 갑옷 위로 서서히 덧입혀진다.
지루할 정도로 긴 시간이 흐르고 일개미의 저항이 잦아들 즈음, 여왕은 비로소 움직인다. 이제 그녀에게서 낯선 이방인의 냄새는 지워졌다. 대신 완벽한 숙주의 향기를 두른 '트로이의 목마'가 되어 숙주의 제국으로 발을 내딛는다.
입구를 지키던 병정개미들이 더듬이를 들이민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찰나, 경비병들은 의심 없이 길을 터준다. 자신들과 똑같은 냄새가 나는, 그러나 기이할 정도로 아름다운 광택을 가진 이 존재를 동료로 착각한 것이다. 혹은 추위에 둔해진 감각 탓에 치명적인 침입자를 인지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어둠이 짙게 깔린 굴 속, 공기는 기이한 긴장감으로 무겁게 내려앉는다. 가시개미 신여왕은 마침내 군락의 심장부, '여왕의 방'에 도달한다.
그곳에는 거대한 몸집의 숙주 여왕이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이번 침입자는 정면승부를 걸지 않는다. 그녀는 마치 오랜 친구처럼, 혹은 끔찍한 악몽처럼 숙주 여왕의 등 뒤로 은밀하고 재빠르게 기어올라 목 아래로 자리를 옮긴다. 숙주 여왕은 이물감에 몸을 비틀며 다리를 휘저어 보지만, 불청객은 끈질기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가시개미 신여왕은 숙주 여왕의 목덜미와 관절 마디마디에 날카로운 턱을 박아 넣으면서도 바로 숨통을 끊지는 않는다. 대신 상처에서 배어 나오는 투명한 체액을 핥아먹기 시작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거대했던 숙주 여왕의 몸은 서서히 힘과 윤기를 잃어간다. 그녀가 비축해 둔 영양분과 생명력, 그리고 군체를 지배하는 '여왕의 페로몬'까지 고스란히 등 위의 가시개미에게 빨려 들어간다. 숙주 여왕은 끊임없이 경련하며 고통스러워하지만, 자신의 생명을 파먹으며 점점 더 거대해지고 강해지는 이 침입자를 떨쳐낼 힘조차 남아있지 않다.
며칠, 혹은 몇 주가 지났을지 모를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숙주 여왕에게서 더 이상 얻을 것이 남지 않게 된 순간, 가시개미 신여왕은 숙주를 폐하기로 결정한다. 그녀는 충분히 강해진 턱으로 너덜너덜해진 숙주 여왕의 목을 끊어버리고 잘려 나간 머리 위에 당당히 선다.
그녀의 몸에서는 이제 죽은 여왕과 똑같은, 아니 그보다 더 강렬한 지배자의 냄새가 뿜어져 나온다. 그녀는 더듬이를 높이 치켜들며 자신이 이 제국의 유일하고 진정한 주인임을 선포한다.
숙주 여왕의 목이 바닥에 나뒹굴지만, 방 안으로 몰려든 숙주 일개미들은 동요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어미의 페로몬을 풍기는 가시개미 여왕에게 다가와 그녀의 몸을 정성스럽게 핥아주고 영양분을 바친다. 그것은 기만이자, 슬픈 착각의 시작이다.
가시개미 여왕은 곧 통통하게 살이 오른 배 끝에서 하얀 알들을 낳기 시작한다. 숙주 일개미들은 그 알이 자신들의 동생이 아닌 제국을 멸망시킬 침략자의 씨앗인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소중히 받아 든다.
일개미들은 쉴 새 없이 먹이를 물어와 가시개미 여왕의 애벌레들을 먹인다. 자신의 배는 곯아가면서도, 탐욕스럽게 입을 벌리는 하얀 애벌레들에게 모든 것을 쏟아부을 뿐이다.
시간이 흘러 고치들이 터지고 마침내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 하지만 그들은 붉은빛이 감돌고 등에는 날카로운 가시를 두른, 완전히 다른 종족이다.
그러나 숙주 일개미들은 여전히 그들을 가족으로 여기며 더듬이를 맞대고 인사를 나눈다. 이제 굴 속은 기묘한 공존의 장이 된다. 늙고 지친 일개미들이 젊고 강한 붉은 가시개미들을 위해 일하는 풍경이 펼쳐진다.
계절이 몇 번 바뀌자 슬픈 결말이 찾아온다. 남은 숙주 일개미들은 노쇠하여 하나둘씩 쓰러지기 시작한다.
마지막 남은 숙주 일개미가 늙은 몸을 이끌고 쓰레기장 구석에서 숨을 거둔다. 그녀는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이 키워낸 가시개미가 자신의 핏줄이라 믿었을 것이다.
이제 굴 안에는 숙주 개미들의 그림자는 하나도 남지 않는다. 오직 가시 돋친 붉은 군단만이 가득 찰 뿐이다. 숙주 군체는 자신들의 노동력으로 자신들을 대체할 정복자들을 완벽히 키워낸 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완전히 증발해 버린다.
그렇게 가시개미 제국은 '숙주의 헌신'을 딛고 비로소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