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의 탄생
녀석의 이름 앞에는 '장수'라는 타이틀이 붙는다. 어른 손가락만 한 굵직한 몸통, 검은색과 노란색이 교차하는 경고색, 그리고 압도적인 비행 능력. 장수잠자리가 날개를 펴고 계곡을 순찰하면 웬만한 곤충들은 숨을 죽인다. 명실상부한 하늘의 제왕이자, 계곡의 폭군이다.
우리는 흔히 제왕의 화려한 비행만을 기억한다. 하지만 그 압도적인 위엄이 어디서 만들어졌는지 아는 사람은 드물다. 제왕의 고향은 넓고 풍요로운 강가가 아니다.
빛조차 잘 들지 않는, 발을 담그면 뼈가 시릴 만큼 차가운 산속의 아주 좁은 개울. 그 척박한 곳이 그들의 시작점이다.
왕잠자리나 밀잠자리 같은 녀석들은 먹이가 넘쳐나고 햇살이 따뜻한 연못이나 저수지를 택한다. 그곳은 시끌벅적하고 생존하기 쉽다. 하지만 장수잠자리는 그 안락함을 거부하고 스스로 고독한 길을 택한다.
그들이 사는 '산간계류'는 1급수의 맑은 물이 흐르지만, 먹이가 풍족하지도 몸을 숨길 수초가 많지도 않다. 특히 혹독한 가뭄이 닥치면, 생명줄 같던 물길마저 뚝 끊겨버린다.
졸졸 흐르던 시냇물은 고여있는 웅덩이로 변하고, 그마저 마르면 녀석들은 젖은 흙바닥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어야 한다. 다시 비가 내려 물이 차오를 때까지, 움직임을 최소화하며 죽음보다 더한 목마름을 견디는 것이다. 흐르는 물살과 타들어 가는 건조함을 온몸으로 견뎌야 하는 고단한 장소. 왜 하필 이곳일까? 진정한 강함은 편안함 속에서 길러지지 않는다.
남들이 선택하지 않는 춥고 어두운 골짜기, 그 고독한 유배지야말로 제왕의 근육을 단련시킬 훈련소였던 것이다.
다른 잠자리들이 한 해를 살고 떠날 때, 장수잠자리는 무려 3년 약 1,000일이 넘는 시간을 물속에서 유충으로 보낸다. 그 긴 시간 동안 녀석은 무엇을 하는가. 놀랍게도 녀석은 맹렬히 사냥하러 다니지 않는다. 그저 차가운 모래와 진흙 속에 몸을 반쯤 묻고 죽은 듯이 기다린다.
화려한 만찬 대신, 바위틈을 지나가는 작은 '옆새우' 따위를 씹어 삼키며 허기를 채운다. 작고 단단한 먹이를 먹으며, 녀석은 조금씩, 아주 천천히 자신의 골격을 키워나간다. 좁은 개울 바닥에 엎드려 보내는 그 지루하고 답답한 시간. 어쩌면 제왕이 갖춰야 할 첫 번째 자질은 힘이 아니라, 1,000일을 하루같이 견디는 '지루함을 이기는 힘'일지도 모른다.
긴 인고의 끝, 마침내 물 밖으로 나가는 날이 온다. 하지만 제왕의 탄생은 팡파르와 함께 오지 않는다. 가장 위험하고 취약한 순간을 통과해야 한다. 딱딱한 껍질을 찢고 부드러운 속살을 밖으로 꺼내는 우화(羽化)의 순간. 이때 녀석은 아무런 방어 능력이 없다.
지나가던 개미 한 마리, 거미 한 마리에게도 목숨을 잃을 수 있다. 가장 강력한 갑옷을 입기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가장 부드러운 맨살을 세상에 드러내야만 한다. 그 두려운 찰나를 견디고 젖은 날개를 말렸을 때, 비로소 녀석은 계곡 일대의 주인이 된다.
숲에서 장수잠자리의 웅장한 날갯짓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녀석이 저토록 높이, 저토록 힘차게 날 수 있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가장 낮고 어두운 곳에서, 타들어 가는 목마름을 견디며 가장 오랜 시간을 버텼기 때문이라고. 지금 당신이 서 있는 곳이 춥고, 좁고, 막막하게 느껴지는가?
남들보다 뒤처져 진흙 속에 박혀 있는 기분이 드는가? 그렇다면 안심해도 좋다. 당신은 초라한 것이 아니다. 장수잠자리처럼, 크고 거대한 날개를 펴기 위해 남들보다 조금 더 깊은 숨을 고르고 있을 뿐이다. 메마르고 좁은 물길을 온몸으로 견딘 자만이, 끝내 넓은 하늘을 품을 자격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