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박쥐

동굴의 루비, 숲의 마른 잎... 붉은박쥐의 두 얼굴

by Eco archivist

붉은박쥐, 일명 '황금박쥐'를 만나는 일은 언제나 숨바꼭질과 같다. 녀석들은 계절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세상의 눈을 피해 은신하기 때문이다.


겨울의 붉은박쥐는 깊고 어두운 동굴 속에 있다. 바깥세상은 영하의 추위로 얼어붙었지만, 일정한 온도가 유지되는 동굴 안은 녀석들에게 완벽한 겨울잠 장소다.

랜턴 불빛 하나에 의지해 무채색의 암흑 속을 더듬어가다 보면, 차가운 암벽 천장에 콕 박힌 선명한 붉은 점 하나와 마주하게 된다. 그 순간의 전율은 잊을 수가 없다. 칙칙한 회색 바위와 대비되는 그 영롱한 붉은빛은 마치 동굴이 깊숙이 숨겨둔 루비처럼 빛난다.

가까이 다가가 보면 낮은 기온 때문에 체온을 떨어뜨리고 깊은 동면에 든 녀석이 보인다.

양쪽 날개를 고이 접고 작은 발톱으로 천장을 꼭 붙잡은 채 꼼짝도 하지 않는 모습.

그 조그만 털뭉치가 내뿜는 색채의 에너지는 놀랍도록 강렬하지만, 동시에 곤히 잠든 그 모습은 한없이 앙증맞고 귀여워 절로 미소를 짓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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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계절이 바뀌고 숲이 초록으로 뒤덮이면, 녀석들은 그 화려한 보석의 옷을 벗고 숲으로 스며든다. 동굴을 떠난 붉은박쥐는 여름 숲에서 생존하기 위해 가장 대담한 결정을 시도한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우거진 숲길을 걷다 예덕나무 가지에 매달린 녀석을 만났다.

숨이 턱 막혔다. 처음엔 그저 여름 볕에 타들어가 바싹 말라버린 시든 잎사귀 하나가 매달려 있는 줄 알았다. 쭈글쭈글하게 말려 갈색으로 변한 채,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듯 가지에 붙어 있는 죽은 잎.

온통 짙푸른 초록의 세상 속에서 그 모습은 너무나 자연스러워 무심코 지나칠 뻔했다.

하지만 그것은 시든 잎이 아니었다. 동굴 속에서 보았던 그 붉은 보석, 붉은박쥐였다.

녀석은 마치 자신이 예덕나무의 시든 잎인 양 완벽하게 의태(mimicry)하고 있었다. 겨울 동굴 속에서 그토록 화려하게 빛나던 오렌지빛 털은, 여름 숲에서는 마른 잎의 색감과 절묘하게 어우러져 완벽한 보호색이 되어주었다. 몸을 웅크린 형태 또한 비틀린 잎사귀와 소름 끼치도록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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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나는 고고한 보석으로, 여름에는 푸른 숲 속에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시든 잎으로. 붉은박쥐는 그렇게 두 계절을 오가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치열하게 생명을 이어가고 있었다.

동굴의 천장과 예덕나무 가지 끝, 전혀 다른 두 공간에서 마주한 그 작은 생명의 지혜 앞에 나는 그저 경이로움을 느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