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동윤 Dec 26. 2019

백예린의 영어 노래 1등 기뻐할 일일까?

우리는 우리말을 하찮게 보고 있다.

이달 10일 출시된 백예린의 첫 번째 정규 앨범 [에브리 레터 아이 센트 유](Every Letter I Sent You)가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 타이틀곡 '스퀘어'(Square)가 여러 음원차트 정상을 차지했으며, 다른 수록곡들도 상위권에 올랐다. 얼마 전 기존 소속사 JYP 엔터테인먼트를 떠난 백예린은 자신의 레이블을 설립하자마자 경사를 맞았다.


백예린처럼 인지도가 높은 가수가 음반을 내면 타이틀곡을 비롯해 다수의 노래가 금방 차트 상위권에 든다. 따라서 이 모습이 대수롭지 않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분명 특별하다. 지금 인기를 끄는 백예린의 노래들 가사가 죄다 영어로 지어진 까닭이다. 백예린도 자신의 SNS에 "1위 감사합니다. 한국인 최초 영어 가사로 1등을 했다고 하는데 이런 건 자랑해도 되는 거겠죠?"라는 글을 게재하며 유례없는 성과를 기념했다.

백예린의 새 앨범은 인트로와 'Datoom'을 제외한 17곡이 다 영어 가사로 돼 있다. 'Datoom'마저도 제목을 영어로 표기했다.

백예린의 1위 등극은 본인으로서는 널리 뽐내고 싶은 기록일지 몰라도 현재 대중음악계를 되짚어 봤을 때에는 통탄할 만한 사건이다. 오늘날 가요계에는 영어를 휘감은 노래가 넘쳐 난다. 우리말보다 영어의 양이 훨씬 많은 경우가 부지기수다. 모든 수록곡의 가사가 영어로만 이뤄진 음반도 적잖이 나온다. 영어를 쓴 작품이 날이 갈수록 늘어나니 이제 대중은 가사에서의 영어 사용을 예사로운 일로 받아들이게 됐다. 달리 말하면 한국어의 배제를 전혀 이상하지 않게 여기는 상황까지 도래한 것이다.


영어 혼용은 1930년대부터 쭉 존재해 오다가 80년대 후반 들어 눈에 띄게 빈번해졌다. 이미 영어를 섞어서 노랫말을 짓던 일본 대중음악에 영향을 받아서, 또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외국인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목적으로 영어 단어나 문장을 넣는 일이 늘어났다. 90년대 넘어와서는 세계화에 따른 영어 교육 활성화, 재미교포들의 가요계 유입 증가 등으로 가사에서의 영어 사용이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안착하게 됐다.


2010년대 전후해서는 국위 선양이라는 명목으로 영어 혼용이 묵인되고 있다. 우리나라 아이돌 그룹이 서구 음악팬들에게 큰 인기를 누리면서 영어 사용을 당연하게 보는 인구가 훨씬 많아졌다. 영어 단어를 제목으로 내걸고, 영어 문장을 다량 삽입하는 방식이 외국인들한테 어느 정도 친밀감을 제공한 터라 아이돌 시장에서는 영어 사용을 불가결의 조건으로 접수한 형국이다.

1992년 12월 1일 한겨레 기사 '국적 모를 노랫말 유행' 일부.

무의식적인 언어 사대도 영어 범람에 한몫 단단히 했다. 어떤 가수들은 한국어로는 자신이 의도한 느낌이나 어감을 살리기가 어려워서 영어를 쓴다고 변호한다. 하지만 우리말만으로 큰 감동을 전해 걸작으로 회자되는 노래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다. 영어를 즐겨 쓰는 뮤지션들은 애초에 영어가 한국어보다 근사하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래퍼 김태균이 2016년 데뷔 앨범 [녹색이념]을 발표했을 때 많은 힙합 애호가가 그의 작품을 특별하게 여겼다. 모든 노래 가사가 한국어라는 점 때문이었다. 한국에 거주하는 한국 가수가 한국말로 노래를 부르는 것은 지당한 일인데 나날이 심해지는 영어 남발 행태가 한국어 작사를 유별난 행보로 느껴지도록 했다. 앞으로 우리말 가사를 신기하게 보는 일이 더 많아질까 봐 심히 두렵다.

매거진의 이전글 멈추지 않을 아이돌 뽑기 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