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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동윤 Mar 02. 2020

음악에 담긴 거리미술 '그라피티'

음악을 생동감 있게, 감각적으로 만들어 줬다.

2017년 초 외국인들이 지하철 차량기지에 무단 침입해 그라피티를 그리고 도망간 사건이 발생했다. 1월 11일에는 도봉 차량기지, 16일에는 구로 차량기지, 17일에는 서동탄 차량기지에서 범행이 일어났다. 피해 사실만 확인됐을 뿐 차량기지의 면적이 넓은 데 반해 CCTV 수는 턱없이 적어 범인의 행방은 확보하지 못한 상태다. 조사를 통해 파악된 사실은 그라피티 아티스트들의 낙관인 '태그'(tag)가 달라 동일범의 소행이 아니라는 점 정도다. (열차에 그림을 그리고 도망간 20대 초반의 호주인은 범행 3주만에 검거됐다.)

외국인이 차량기지에 잠입해 그린 그라피티.

2016년 10월에는 그리스인과 독일인이 대구 지하철 전동차에 그라피티를 그리고 도망가는 일이 있었다. 이들의 모습은 CCTV에 잡혔지만 얼마 뒤 출국한 탓에 검거하지 못했다. 2017년 기준 최근 3년 동안 열차에 그라피티를 그린 범죄는 마흔 건 넘게 발생했다. 대부분이 외국인에 의한 범행이다. 세계 어느 나라 지하철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을 깨끗함 때문인지 어느 순간부터 한국의 전동차가 그라피티의 일등 타깃이 돼 버렸다.


그라피티는 누군가에게는 예술혼을 불태우는 행위지만 시설물 담당자들로서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 골칫거리다. 관리 직급은 느닷없이 문책을 당하게 되고 미화 업무를 직접 하는 사람은 지우느라 고생한다. 멋있게 보이는 작품도 분명히 있지만 어떤 그림은 부담감이나 혐오감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라피티는 딜레마를 지닌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라피티의 탄생과 확산

미국 뉴욕 브롱크스의 열차가 그래피티로 뒤덮혀 있다.

그라피티는 우리나라에서는 '락카'(lacquer, 래커)라고 잘못 부르는 에어로졸 페인트를 이용해 건물의 벽 또는 시설물에 입힌 글씨나 그림을 일컫는다. 그라피티는 또한 디제잉, 비보잉, 래핑과 함께 힙합 문화를 구성하는 요소로 많은 사람에게 알려져 있다. 힙합과의 연관성, 일반 주거지에서 많이 나타나는 점 때문에 그라피티는 대표적인 거리의 예술로 통한다.


훌륭한 재능과 남다른 미적 감각을 지녀야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시작은 수수했다. 1960년대 중반 미국 필라델피아에 사는 한 흑인 소년이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아이한테 관심을 얻기 위해 벽에 낙서한 것이 그라피티의 근원으로 여겨진다. 사람들은 여기에서 의미를 찾았다. 낙서가 자기 존재를 드러내고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후 그라피티는 정치사회적인 구호를 나타내는 양식으로, 갱단들이 자기 구역이라는 것을 알리는 용도로 사용됐다.


흑인 사회를 중심으로 퍼진 그라피티는 60년대 후반에는 뉴욕까지 전해졌다. 70년대 초, 중반부터 뉴욕에서는 디제이와 엠시, 비보이가 함께하는 길거리 파티를 통해 힙합 문화가 발아하기 시작했다. 파티가 열리는 곳 주변에는 어김없이 그라피티가 있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그라피티는 자연스럽게 힙합의 한 축으로 자리 잡게 됐다.

<와일드 스타일>과 <스타일 워>는 그라피티 확산을 이끌었다.

하지만 일부 그라피티 아티스트는 그라피티를 독립된 예술로 간주한다. 힙합 문화가 발생하기 이전에 그라피티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말이 옳긴 해도 힙합 문화를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한 <와일드 스타일>(Wild Style), <할렘가의 아이들>(Beat Street) 같은 영화에서 그라피티 작품을 영상에 담고 그라피티를 그리는 인물을 영화의 주인공 중 하나로 설정함에 따라 그라피티는 힙합의 주요 성분으로 굳어졌다.


1983년에는 그라피티에 초점을 맞춘 다큐멘터리영화 <스타일 워>(Style Wars)가 개봉했다. 그라피티가 중심 소재였지만 간간이 비보잉을 소개하는 등 그라피티 역시 힙합 문화 중 하나로 인식하는 태도를 보였다. 게다가 슈거힐 갱(The Sugarhill Gang)의 '8th Wonder', 그랜드마스터 플래시 앤드 더 퓨리어스 파이브(Grandmaster Flash and the Furious Five)의 'The Message', 라멜지(Rammellzee)와 케이롭(K.Rob)의 'Beat Bop', 트리처러스 스리(Treacherous Three)의 'Feel the Heartbeat' 등 당시 나온 힙합 노래들을 배경음악으로 삽입해 그라피티와 힙합은 같은 식구임을 느끼게 했다.


그라피티를 담은 노래들

힙합 그룹 아티팩츠의 'Wrong Side of da Tracks' 싱글.

이러한 배경으로 일부 래퍼들은 그라피티를 소재로 한 노래를 내기도 한다. 그중 가장 유명한 노래가 뉴저지 출신의 듀오 아티팩츠(Artifacts)의 'Wrong Side of da Tracks'다. 이들은 노래에서 그라피티 아티스트로 분해 장비를 챙겨서 집을 나서고, 지하철 기지로 몰래 침입해서 그림을 그린 뒤 서명을 남기는 행위를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곡은 느긋한 재즈 힙합의 골격을 띠지만 가사 덕에 긴장감이 감돈다.


이외에도 케이알에스-원(KRS-One)의 'Out for Fame', 컴퍼니 플로(Company Flow)의 'Lune TNS', 루프트루프 로커스(Looptroop Rockers)의 'Ambush in the Night', 애트모스피어(Atmosphere)의 'RFTC' 등이 그라피티를 다룬다. 이 노래들은 대체로 "가방에 페인트를 가득 채우고 나와 재빨리 그림을 그리고 도망친다."는 내용으로 꾸며져 있다. 한편 'Out for Fame'은 먼저 그라피티에 관한 노래를 낸 아티팩츠에게 존경을 표하기도 하며, 'Lune TNS'는 수십 명의 그라피티 아티스트를 계속 언급하면서 그들을 찬양한다.


우리나라 힙합 중에도 그라피티를 언급하는 노래들이 있다. 다만 대부분이 특정 동네 풍경을 스케치하거나 힙합에 대한 얘기로 디제잉, 비보잉 등과 함께 단어만 언급하는 데에 그친다. 그나마 구체적으로 논하는 노래가 피타입의 '힙합다운 힙합'이다. 피타입은 2절에서 힙합의 4대 요소를 기술한다. 이 과정에서 그라피티를 포함한 각 부문의 특징과 역할을 추상적, 구체적으로 수식하며 힙합을 무게 있게 전달한다.


앨범으로 들어온 그라피티

트러블 펑크와 잽의 앨범.

힙합이 부상함에 따라 그라피티는 음반 커버 디자인으로도 나타났다. <스타일 워>에 삽입되기도 한 트러블 펑크(Trouble Funk)의 'Pump Me Up' 1981년 판(이 곡은 원래 1980년에 출시됐다.)은 그라피티로 뒤덮인 뉴욕의 전철 사진을 커버로 사용했다. 펑크(funk) 밴드 잽(Zapp)은 1982년에 발표한 2집부터 그라피티에 영향을 받은 로고를 만들어 쓰기 시작했다.


펑크 록 밴드 섹스 피스톨즈(Sex Pistols)의 매니저이자 영국에 힙합을 전파한 인물인 맬컴 매클래런(Malcolm McLaren)은 1983년 자신의 첫 번째 앨범 [Duck Rock]을 출시할 때 음반 커버로 그라피티까지 홍보했다. <와일드 스타일> 사운드트랙 또한 최초의 힙합 영화답게 그라피티를 표지에 담았다. 영화와 사운드트랙의 로고로 쓰인 철자는 매우 명료하지만 그라피티에서 와일드스타일은 그리기도 어렵고 읽기도 쉽지 않은 굉장히 복잡한 그림을 의미한다.

구준엽이 디자인한 김건모, 현진영, 디제이 디오씨 앨범들.

우리나라에서 그라피티를 매체에 처음 선보인 사람은 구준엽이었다. 춤도 잘 췄지만 산업디자인을 대학 전공으로 선택했을 만큼 미술에도 재능이 충만했다. 그는 현진영의 백업 댄싱 팀 '와와'로 활동하면서 1990년 출시된 현진영의 데뷔 앨범을 디자인했다. 영어로 쓴 팀 이름 뒤에 자리한 'funky'라는 글자는 뉴욕의 어느 뒷골목을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는 김건모의 [In My Pops & Live] 앨범, 디제이 디오씨(DJ DOC) 2집에서도 출중한 그라피티 실력을 뽐냈다.


구준엽은 방송을 통해서 그라피티를 시연하기도 했다. 1996년 '꿍따리 샤바라'의 후속곡 '난'으로 활동할 때였다. SBS의 한 버라이어티쇼에 클론으로 출연한 그는 '난'을 부르며 그라피티를 그렸다. 밑그림이 있는 상태에서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후딱 그리는 퍼포먼스긴 했지만 지상파 방송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H.O.T.도 1997년 2집에서 그라피티를 대량 선보였다. 앨범 타이틀을 시작으로 부클릿에서 멤버들의 이름을 그라피티로 나타냈다. 덕분에 앨범 재킷에서 만큼은 힙합 느낌이 물씬 풍겼다.


합법적으로 그라피티를 볼 수 있었던 곳

<위대한 낙서> 전시회 포스터.

홍대나 젊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번화가에 가면 그라피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작품은 얼마 없으며 다수의 그림을 구경하기 위해서는 구석구석을 찾아 다녀야 하는 단점도 있다. 게다가 건물이나 담벼락에 그려진 그라피티 대부분은 주인에게 허락받지 않고 탄생한 불법 창작물(혹은 선전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길거리의 그라피티를 구경하는 것은 재물손괴의 현장을 보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아쉬움을 누그러뜨릴 기회가 한때 마련되기도 했다. 2016년 12월 9일부터 2017년 2월 26일까지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위대한 낙서 The Great Graffiti 展>이라는 제목으로 그라피티 전시회가 열렸다. 이 전시는 예정된 기한에서 2주 연장돼 3월 12일까지 진행됐다. 여러 작가의 그라피티를 설명과 함께 차분하게 감상하기에 좋은 자리였다.


미국을 장식한 한국인의 그라피티

그라피티 아티스트 심찬양의 작품들.

로열도그(ROYYAL DOG)라는 예명을 사용하는 그라피티 작가 심찬양은 외국에서 주목받고 있다. 한국에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며 활동하다가 본토의 문화를 경험하고자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2016년 로스앤젤레스에 위치한 한 복합문화 공간 벽에 그림을 그렸다. 한복을 입은 여성의 모습이었다. 그림 옆에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글귀가 자리했다. 외국인들에게는 낯선 한복과 한글은 심찬양의 작품을 이채롭고 신선하게 느껴지도록 했다. 한복을 입은 흑인 여성은 그의 시그니처가 됐고, 이 특색을 통해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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