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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동윤 Mar 09. 2020

누자베스와 재즈 힙합의 간추린 역사

뮤지션과 힙합 마니아들을 사로잡은 퓨전 장르

음악 애호가들에게 누자베스(Nujabes, 본명 Seba Jun)의 존재는 무척 각별하다. 1990년대 후반 래퍼 엘 유니버스(L Universe)와의 합작 싱글 'Ain't No Mystery'로 데뷔한 그는 재즈를 가미한 부드러운 음악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특히 'Lady Brown'이나 'Luv(sic.)' 같은 노래는 힙합 팬들뿐만 아니라 많은 이에게 두루 알려졌다. 국내에서도 여러 힙합 프로듀서가 그를 롤모델로 삼을 만큼 온화하지만 뚜렷한 스타일을 선사했다. 재즈 힙합의 대명사와도 같은 인물이었기에 지난 2010년 2월 그가 사망했을 때 음악팬들의 상심이 클 수밖에 없었다.


재즈 힙합이라는 명칭은 누자베스 덕분에 어느 정도 익숙하게 됐지만 음악은 대중적이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재즈와 힙합이 주류의 인기 장르가 아니라는 사항이 첫째 원인이며, 누자베스의 음악과 달리 재즈 특유의 원초적인 느낌이나 다소 투박한 질감을 내는 곡도 많은 탓이다. 그럼에도 이 장르를 시도하는 아티스트가 꾸준히 등장하고 지속적인 지지를 이끌어 내는 것은 근사한 멋을 지녔음을 시사한다. 여러 뮤지션들의 작품을 접하다 보면 재즈 힙합의 매력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재즈 힙합의 발단과 확산

재즈 힙합의 역사는 영국의 건반 연주자 마이크 카(Mike Carr)가 이끄는 밴드 카고(Cargo)가 1980년대 중반에 발표한 'Jazz Rap'으로 시작한다. 재즈 반주에 랩을 얹은 노래는 당시에는 특별한 접목이었다. 이후 로니 리스턴 스미스(Lonnie Liston Smith)의 'Expansions'를 차용한 스테차소닉(Stetsasonic)의 'Talkin' All That Jazz',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의 'A Night in Tunisia'를 쓴 갱 스타(Gang Starr)의 'Manifest' 같은 노래를 필두로 재즈를 기반으로 한 랩 음악이 점차 시장에 나오게 됐다. 재즈가 중심 소재였던 1990년 영화 <모베터 블루스>(Mo' Better Blues) 사운드트랙에 수록된 갱 스타의 'Jazz Thing' 덕분에 재즈 랩은 대중에게 한 걸음 더 가깝게 다가섰다.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중반에는 정글 브라더스(Jungle Brothers), 어 트라이브 콜드 퀘스트(A Tribe Called Quest), 디 라 소울(De La Soul)을 위시한 뉴욕의 힙합 집단 네이티브 텅즈(The Native Tongues)가 재즈 샘플을 반주에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재즈 힙합의 전파를 선도했다. 비슷한 시기 영국의 재즈 힙합 그룹 어스스리(Us3)가 발표한 'Cantaloop (Flip Fantasia)'가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어 재즈 힙합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유도하기도 했다.


재즈 힙합의 새로운 양식을 선보인 Guru와 Madlib

초기의 재즈 랩 대부분은 기존에 있던 재즈 연주를 샘플로 사용했다. 갱 스타의 래퍼 구루(Guru)는 이 틀을 벗어나고자 결심해 실제 연주가 바탕이 되는 재즈 랩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그는 1993년에 낸 솔로 데뷔 앨범 [Guru's Jazzmatazz, Vol. 1]에서 명연주자들을 섭외해 생기와 사실감 충만한 음악을 들려줬다. 더불어 샘플링 방식을 병행해 루프가 갖는 힙합 고유의 풍미를 함께 표현했다. 'Jazzmatazz' 시리즈가 세 번째부터는 R&B 요소를 강화하며 애초의 방향을 상실하기도 했지만 힙합과 재즈를 대등하게 버무린 점은 괄목할 성과로 남는다.


많은 래퍼와 협연한 프로듀서 매드리브(Madlib)도 2003년 발표한 [Shades of Blue: Madlib Invades Blue Note]를 통해 특색 있는 재즈 힙합을 선보였다.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그는 앨범에서 재즈 전문 레이블 블루 노트(Blue Note)에서 나온 곡들을 힙합으로 변환했다. 수록곡 열여섯 편 중 'Please Set Me at Ease'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연주곡으로, 힙합의 육중한 톤을 끼워 맞추기보다는 블루 노트의 오리지널을 가볍게 보완하는 차원으로 구성돼 있다. 두 장르의 과열되지 않는 만남을 맛볼 수 있다.


재즈 뮤지션들의 힙합과의 접목

이 퓨전 움직임은 힙합 뮤지션이나 래퍼만의 전유는 아니었다. 트럼펫 연주자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는 1992년 앨범 [Doo-Bop] 중 'The Doo-Bop Song', 'Blow', 'Fantasy' 등에서 객원 래퍼를 초빙해 재즈 뮤지션이 주체가 되는 퓨전을 선보였다. 그러면서도 유명 힙합 프로듀서 이지 모 비(Easy Mo Bee)에게 기본적인 비트 제작과 프로듀싱을 일임함으로써 힙합이나 펑크(funk)의 기운을 어필했다.


건반 연주자 허비 행콕(Herbie Hancock)의 1994년 앨범 [Dis Is da Drum]도 힙합의 요소가 진하게 밴 작품이었다. 1980년대 초반 크게 인기를 얻었던 'Rockit'을 통해 힙합의 모태가 되는 일렉트로 부기를 시행한 바 있지만 여기에서는 드럼 머신이나 턴테이블로 그보다 조금 더 힙합에 근접한 음악을 들려준다. 하지만 랩이 들어간 노래는 'The Melody (On the Deuce by 44)'밖에 없어서 약간 아쉽다.


차세대 뮤지션들에 의한 재즈 힙합 부흥

1990년대 들어서 서부의 갱스터 랩, 남부의 마이애미 베이스, 동부의 하드코어 힙합 등이 고르게 약진을 거듭하고 계속해서 하위 장르들이 생겨남에 따라 재즈 랩의 지분이 줄어들긴 했으나 2000년대를 전후해 펑키 디엘(Funky DL), 파이브 디즈(Five Deez), 사운드 프로바이더스(The Sound Providers), 케로 원(Kero One) 등 재즈 힙합을 전문으로 하는 뮤지션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마니아들의 갈망을 만족하는 중이다. 지난해에는 사운드 프로바이더스가 발표한 곡에 가리온, 제리케이, 산이(San E) 등 우리나라 래퍼들이 랩을 한 컴필레이션 [Sound Providers of Korea]가 출시돼 색다른 재미를 제공했다.


Nujabes, 길이 기억될 재즈 힙합 거장

영국의 래퍼 겸 프로듀서 펑키 디엘이 2011년 추모곡 'Ode to Nujabes'를 취입한 데에서도 알 수 있듯 누자베스는 같은 음악인들에게도 영감을 주는 인물이었다. 그의 출현이 일본 힙합의 지형 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만큼 누자베스는 그만의 톤과 스타일을 통해 새로운 트렌드를 일궜다. 힙합의 기본 작법인 샘플링을 한결같이 고수함에도 널리 알려지지 않은 곡들을 발굴함으로써 매번 새로움을 안겼다.


또한 그가 재료로 삼은 오리지널은 맑은 선율과 부드러움을 자랑해 청취자들에게 편안하게 다가설 수 있었다. 재즈와 힙합이 각각 갖는 마니아 성격을 중화한 곡들을 선보였으니 많은 이에게 애청되는 것이 당연했다. 많은 팬을 거느린 애니메이션 <사무라이 참프루>(Samurai Champloo)의 사운드트랙에 그의 곡이 쓰인 것도 존재를 알린 요인이었겠지만 아름다운 섬세함은 언제나 사랑받을 가치일 것이다.


2015-02-25


지난달 26일이 누자베스 10주였다. 시간이 참 빨리 간다는 걸 새삼 실감한다.

일부 힙합 마니아나 재즈를 좋아하는 사람을 제외하면 구루의 1집 같은 스타일보다는 누자베스처럼 말랑말랑한 다운템포, 칠아웃풍의 재즈 힙합을 더 선호할 테다. 그래서 우리나라 음악팬들한테 누자베스의 음악이 널리 알려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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