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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준 Oct 23. 2021

누가 익스(ics)와 로기(logy)를 구별짓는가?

  물리학자 하면 사람들은 칠판에 수식을 가득 쓰면서 만족하는 표정을 짓는 남자를 떠올린다. 대중에게 잘 알려진 아인슈타인과 파인만이 대표적이다. 물론 두 사람은 물리학에 중요한 기여를 해서 노벨상도 받았고, 과학의 역사에 기록되었다. 하지만 21세기 물리학에 종사하는 과학자 대부분은 실험을 해서 측정하고 데이터를 생산하는 일을 한다. 물리학 전체 연구자 중의 대략 80~90%쯤은 칠판 가득 수식을 유도하는 이론물리학자가 아니라, 어제까지 잘 작동하던 장비가 하필 중요한 실험이 있는 오늘 고장이 나는 바람에 패닉에 빠지는 실험물리학자이다. 실험물리학자는 이 상황에서 전원이 정확히 연결되어 있는지를 확인하고, 제어용 컴퓨터와 장비 사이의 통신에 문제가 있는지 살펴보고, 장비 업체에 전화해서 증상을 문의한다. 이런 일은 엄밀한 수학과 관련이 없고, 선배들로부터 내려온 경험치와 구글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현대 물리학자들의 자질 중 하나는 이런 일을 귀찮아하지 않고, 과학적 탐구의 열정을 지속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물리학이 물질에 대한 가장 엄밀한 과학이라는 생각은 뉴턴에서 기원한다. 뉴턴은 《프린키피아》에서 세 법칙을 설명했고, 이것으로 케플러의 법칙을 유도했다. 그는 라이프니츠와 독립적으로 미적분을 발견했고, 이것은 세계의 변화와 운동을 설명하는 좋은 무기가 된다. 세 개의 법칙으로 우주의 운행을 설명했으니, 이후 서구의 모든 철학자와 자연철학자가 뉴턴의 모델을 따르려고 했다. 

  물리 법칙을 수학으로 모델링하고 이것으로 세계의 변화를 설명할 수 있다는 생각은 지금도 물리학의 근간을 이룬다. 그래서 물리학은 수학과 특별히 친하다. 물리학과 수학의 친밀함은 화학이나 생물학과의 거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이다. 필자가 물리학을 배웠던 학교에서도 물리학과 교수와 연구원들은 수학과 교수 및 연구원들과 종종 축구를 하면서 몸을 서로 부딪치고 땀을 같이 흘렸다. 하지만 물리학과 구성원들이 화학과나 생명과학부 연구자들과 축구를 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어쩌면 두 학문을 지칭하는 영어 단어인 mathematics와 physics처럼 접미사가 익스(ics)로 끝나기 때문에 가까운 걸까?

  물질 세계 너머에 있는 수학이 가장 엄밀하고, 그 다음으로 물리학이 엄밀하다는 ‘물리학 선망’은 뉴턴 이후 지금까지 과학자들 사이에서 강력하게 남아있다. 물리학자들은 지금도 다른 과학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엄밀한 학문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넘친다. 반면 생물학은 19세기 말까지도 분류학과 발생학이 주요 분과 학문이었다. 1859년에 출간된 다윈의 《종의 기원》으로 진화가 생명체의 강력한 원리라는 것이 제안되었지만, 유전을 일으키는 물질은 20세기에 들어서야 규명되었다. 

  그리고 생물학을 지칭하는 영어 단어는 biology로, 로기(logy)로 끝나는 접미사가 붙는다. 19세기 중반부터 정립되기 시작한 여러 사회과학 학문들, 즉 사회학(sociology), 인류학(anthropology), 심리학(psychology)처럼 생물학도 물리학보다 엄밀성이 떨어진다는 통념이 있다. 그래서 최근에는 생물학 대신 생명과학(biological science)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익스와 로기라는 두 접미사로 과학의 엄밀성을 구분하려는 게 순진한 걸까? 인간게놈프로젝트, 유전자 편집 기술, 그리고 코로나19 백신 등 21세기 생명과학이 성취한 위대한 업적들이 인류에 기여한 성과가 크다. 생명과학이 수학으로 엄밀하게 모델링 되지 않는다고 해서 과학적 성취가 떨어지는 게 아니다. 나 역시 두 가지 접미사로 과학의 엄밀성을 구분하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익스와 로기를 구분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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