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진희 Jul 09. 2024

9화. 각성의 전주곡


병원 온라인 상담은 먹던 밥 숟가락을 내려놓을 만큼 암담했고, 또다시 제기된 내과 문제 가능성에 두려웠어. 아무도 네 손에 대해 정확히 말해주지 않아. 지금은 알 수 없대. 그저 더 크길 기다려야 한대. 언젠가 너를 수술대에 올려야 한다는 것도 너무 싫어. 이 와중에 원치 않는 위로와 빨리 마음 잡으라는 채근에 화나고 그러다 더 외로워져.

                                         - 아기에게 쓴 일기 중에서               



남편이 모 병원 홈페이지 온라인 상담에 아기 손을 첨부한 문의 글을 올렸다. 답변을 기다리는 며칠 동안 수시로 홈페이지를 드나들며 답장을 기다렸다. 조리원 식당에서 점심을 먹다가 휴대폰으로 회신을 확인하고 반갑고 떨리는 마음으로 글을 열었다. 그러나 먹던 밥숟가락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목구멍이 막혀버렸다.

눈물이 나니 다른 산모들 눈치가 보여서 내 방으로 들어가 다시 읽고, 읽었다. 세 개의 손가락이 몇 번째 손가락인지 알 수 없는 상태이며, 이미 담당 의사로부터 들었던 내과적 문제 가능성을 ‘기형이 심하다’는 직설적인 표현과 함께 또 제기하고 있었다.

관련 증후군과 동반 기형을 다시 검색해 보았다. 그러면서 작게 다독여놓은 걱정이 다시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스스로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속엣말을 해줬는데, 그 회신은 걱정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지금의 염려와 두려움에 기약을 알 수 없을 때까지 더 노출되어 있어야 할 모양이었다.


 

나는 해야 하는 일이 있으면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해결’을 향해 달려가려고 한다. 그래서 연약한 몸이 따라주지 않을 때는 기분이 더 나빠지고,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내면에 안달하며 닦달하는 목소리가 수시로 날 채근한다. 그래서 과정은 짧을수록 좋다.

그런데 우리 아기의 일은 즉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며칠, 몇 달, 혹은 몇 년을 참고 견디면 끝나는 게 아니라 평생 안고 가야 할 일이었다. 아기가 커가면서 생의 주기마다, 새로운 전환점마다 현재의 나로선 예측할 수 없는 감정과 반응을 쏟아낼 테고 나는 그럴 때마다 엄마로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우리 앞에 닥칠 일이 무엇인지 크기도 종류도 가늠이 안 되니 너무나 두려웠다.


서른아홉 살, 아기를 낳고 나서 처음으로 사는 게 무서워졌다. 살면서 이렇게 내 예상을 벗어난 일은 없었다. 교통사고처럼 급작스러웠다.     

손에 관해 무엇을 궁금해해야 하는지도 잘 몰랐지만, 당시에 궁금해한 간단한 몇 가지 질문의 답도 알 수 없다는 현실이 갑갑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정확하지 않은 모든 것들은 나의 불안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나는 실금이 가 있는 유리잔처럼 위태로운 상태였다. 조금만 자극이 가해져도 깨질 것 같았다.



그 사이, 조리원 입소 후 일주일 만에 눈앞에 나타난 원장님이 나를 원장실로 불렀다. 우리는 원장실 책상 앞에 나란히 마주 앉았다.

  “어머님. 우리 아기 얘기 전해 들었어요. 너무 마음 아프시죠. 저도 너무 마음 아프더라고요. 제가 위로해드리고 싶어서 이렇게 따로 오시라고 했어요.”

  “네.”

매가리 없는 얼굴로 마지못해 대답했다. 이번엔 또 어떤 위로일까? ‘어머님’이라는 호칭이 영 어색했다.

  “육손이면 수술해서 간단히 해결할 텐데 그렇지 않아서 속상하시겠지만 요즘 의료 기술이 좋고, 의수도 있으니까 힘내세요. 대사 이상처럼 훨씬 심각한 경우도 많은데 그래도 얼마나 다행이에요. 저희 교회에도, 아! 제가 교회를 다니거든요. 저희 교회에도 자폐, 뇌성마비인 아이들이 있거든요. 그 부모님들이 얼마나 고생하시는지 몰라요. 그런 거 보고 위안 삼으세요. 그래도 우리 아기는 인지는 괜찮은 거잖아요. 병원에서는 손만 그렇다고 하죠? 그러면 괜찮아요. 혹시 교회 다니시나요? 저도 우리 아기 위해서 기도할게요. 이름이 특이하네요. 나중에 혹시라도 어디서 만나도 이름 들으면 알아볼 수 있겠어요. 호호.”

원장님의 말은 쉼 없이 이어졌고, 내 입은 뗄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이건 원래 다른 산모님들은 안 드리는 건데 제가 특별히 드리려고 해요.”

그러면서 조리원에서 쓰는 분유와 바디로션을 한 통씩 내 앞에 내밀었다.

  “힘내시라고 드리는 거예요. 이거 참 좋은 제품이거든요. 가져가서 쓰세요.”


    

내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걸터앉아 탁자 위에 올려놓은 분유와 로션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숨소리가 거칠어지며, 내 안에 분노가 점점 타오르는 걸 느꼈다.      


‘팔 없는 사람에게 팔과 다리가 없는 사람을 보고 힘내라는 게 위로일까? 그러면 팔과 다리가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왜 남과 비교해서 위로를 받아야 하지? 모두 각자의 아픔과 고통이며 고민이 있는 건데, 왜 그걸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걸 막는 걸까?

장애인 자녀 양육으로 고생하는 부모를 동정하고, 남에게는 그들이 얼마나 불행한지 들먹이며 그걸 보고 위안 삼으라고 하다니, 그 부모와 아이에게 이 얼마나 무례인가?’     

 

우스꽝스럽지만 분홍색 원피스 파자마에 긴 수면 양말과 손목에 보호 아대를 찬 여자가 마치 드래곤볼의 초사이언처럼 진지하게 불의 후광을 내뿜고 있었다.

그날 나는 더 이상 이런 위로를 안 받고 싶다는 생각을 포기했다. 차라리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연습을 하는 게 빠를 것 같았다.


마음에 한 차례 불이 활활 휩쓸고 간 자리에는 무력감, 슬픔, 두려움도 타버린 듯했다. 내가 이렇게 눌려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아가야. 누구와 비교할 필요 없이 꿋꿋하고 당당하게 서렴. 엄마는 앞으로 어지간한 말에는 콧방귀도 안 뀌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럴 수 있을까?

                                       - 아기에게 쓴 일기 중에서     



그날 밤, 퇴근 후 조리원에 온 남편이 내게 말했다. 지금까지 좋고 슬픈 감정에서 어찌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이제 매일 행복하기로 결정했다고. 나는 그 말이 좋았다.



               




거리에서 마주친 낯선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곤 했다.

  “살아있다는 게 참 존경스럽네요. 웬만한 사람이라면 포기했을 텐데.”

  “신의 가호가 있기를! 당신을 위해 기도할게요.”

  “당신은 어떻게 고통에 짓눌리지 않을 수 있었죠?”

  “당신처럼 살아야 했다면, 자살했을 거예요.”

나는 내 삶을 즐긴다는 걸 설명하려고 애써봤다. 전동 휠체어를 타고 후텁지근한 거리를 질주하는 쾌감을 강조하고, 보통 사람들에 비해 나에게 자살할 이유가 특히 더 많지 않다고 말해봤다. 하지만 지쳤다. 신은 그들 같은 사람들을 위한 장애 인식 개선 교육용으로 나를 이곳에 보낸 것이 아니다.     

           -앨리스 셰퍼드 외,  「급진적으로 존재하기」 발췌     





작가의 이전글 8화. 엄마는 울면 안 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