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가 어릴 때 살던 곳은 삼면이 산으로 병풍처럼 둘러쳐진 곳이었다. 우리 집 뒤에 있는 산은 그 근동에서 제일 높은 산이었다. 그 산 아래로 비탈을 타고 과수원이 펼쳐져 있었다. 과수원의 제일 위쪽에 서면, 십리도 더 되는 곳에 있는 면소재지가 신기루처럼 뿌옇게 보였다.
과수원의 입새에 집이 파묻힌 듯이 자리하고 있었다. 내가 살 던 곳이었다. 우리 집은 가을이 와서 나무가 모두 옷을 벗기 전에까지는 외부에서 잘 보이질 않았다.
우리 집이 그 동네에서 제일 끝이었고 제일 높은 곳에 있었다. 우리 집 위로는 인가라곤 없었다. 높은 산까지 올라가면 작은 암자가 하나 있다고 했다. 가 본 적은 없었다. 간혹 비구니스님 한 분이 우리 집에 들러 찬물 한 잔을 얻어 마시고 마루에 앉아 다리를 쉬어 가곤 했다.
우리 집이 제일 높은 곳에 있었기에 마을 아래에서 보면 올려다보였다. 봄에 완행버스에서 내려서 우리 집 쪽을 올려다보면, 불붙은 듯한 커다란 꽃다발을 산이 안고 있는 것 같았다. 복숭아와 사과나무가 심겨 있는 과수원이어서 꽃이 필 때면 그랬다.
우리 집이 처음부터 과수원은 아니었다고 했다. 산을 깎아 놓은 벌판에 엄마가 회초리 같은 사과나무와 복숭아나무를 심었다고 했다. 보통 과수나무는 심고 5년은 지나야 과일이 하나둘씩 열리기 시작한다고 했다.
내 기억의 나무에는 이미 꽃이 만발했고, 여름이 지나면 가지가 땅에 닿을 듯이 붉은 과일들이 주렁주렁 열려 있었다. 그러니 나무가 심긴 지는 이미 꽤 여러 해가 지났다고 봐야 한다.
우리 집엔 유독 화초가 많았다. 그것도 보기 드문 것이 많았다. 지금은 흔해졌지만, 노란 장미나, 흰 장미, 흑장미, 커다란 냄비뚜껑 만하게 꽃이 피는 다알리아, 목단, 목련, 과꽃, 수국. 하얀 해당화 같은 것이 흐드러져 있었다. 채송화, 백일홍, 백합, 맨드라미, 깨꽃, 라일락이 한겨울만 빼고 가득했다.
집을 지을 때 마당 한가운데에 벽돌을 쌓아 올려 넓은 화단을 만들었다. 아마도 화초 좋아하는 아버지의 뜻이었던 거 같다. 그 안에 봄부터 아버지는 꽃씨를 뿌리고 구근을 심었다.
이른 봄이면 울타리에 개나리가 만발했고 여름이 지나가면서 코스모스가 숲을 이루기 시작했다.
과수원의 울타리는 아카시아나무가 심겨 있었다. 6월이 되면 큰 과수원 둘레에는 아카시아 꽃이 만발해서 꽃향기는 물론이고 벌들의 천국이 되었다.
가을이 겨울을 불러올 때까지 온갖 국화가 만발해서 집의 입구부터 국화향기가 진동을 했다.
가을이면 마을사람들이 일부러 꽃씨나, 뿌리를 얻으러 오기도 했다. 그것은 아버지가 산림청공무원이었기에 특이하다 싶은 것을 가져다 심어서였다. 아버지는 꽃과 나무를 좋아했다. 내 기억엔 그 바쁜 농사철에도 아버지는 농사일을 돕기보다는 꽃을 가꾸고 나무를 심거나 가지를 잘라 주고 있었다.
농사일은 주로 엄마의 몫이었다. 아버지는 농사라고는 지을 줄 모른다고 엄마가 말했다.
“저 양반이 지게를 지면 지게가 뒤로 넘어간다니까요. 지게도 사람을 알아보는 거지요.”
마을 사람들에게 하는 얘기를 종종 들었다.
봄부터 가을까지 꽃들이 만발했고, 철 따라 온갖 새들이 노래했으며, 어딜 봐도 나무들이 울창했던 곳.
바람이 불 때마다 숲이 저마다의 색깔로 잎새를 뒤척이며 일렁였고, 키 큰 미루나무의 이파리가 쉴 새 없이 손뼉을 치던 곳.
나는 그곳에서 파란 하늘에 뜬 하얀 뭉게구름을 이고, 작은 도랑에서 가재를 잡으며, 고무신을 접어 자동차 놀이를 하고 놀았다.
외딴집에서 친구들이란, 이른 봄에 암탉이 품어 깐 노란 병아리들이었고, 길 잃은 새끼노루나 잘못 들어온 멧새일 때도 있었고, 복숭아나무 아래에 집을 짓고 낳은 밀뱀의 알일 때도 있었다.
한여름 소나기가 한 차례 지나가고 나면 마당가로 찾아오는 맹꽁이도 친구였다.
나는 그곳에서 살았다.
지금부터 펼쳐질 얘기들은 호기심 많은 작은 꼬마였던 내 눈에 비춰졌던 이야기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