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첫 번째 착한 인종 차별 주의자
미국 생활 만 4년이 넘어가지만, 운 좋게도 여태껏 딱히 노골적인 인종차별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다. 사는 동네에 제법 다양한 인종의 구성원들이 살기 때문인지, 아님 대학 캠퍼스 주변만 주로 돌아다녀서 그런지,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다. 이유야 어찌 됐든 운 좋게도 손으로 눈꼬리를 찢는 시늉을 한다던가, 아시안을 겨냥하는 인종차별적인 은어를 듣는다다던가 하는 '내가 인종차별을 당했어!'라고 생생하게 느낄 경험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거 같다.
그렇다고 해서 노골적이지 않은 인종차별까지 느끼지 않고 사는 것은 아니다. 인종차별은 미디어에서 보는 것처럼 늘 노골적이고 적대적인 얼굴로만 다가오지는 않는다. 친절한 얼굴, 상냥한 미소, 심지어 순수하고 착한 마음으로 다가오는 일이 부지기수다.
3년 전 동네 도서관에서 내가 만났던 사서 할머니도 그런 착한 인종차별주의자 중 한 명이었다. 데이빗(가명)은 일 년 간 동네에 살면서도 학교 도서관이 아닌 시립도서관은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고 했다. 삭막한 60년대식 건물의 학교 도서관과는 달리, 카네기 재단에서 운영하는 우리 동네 도서관은 고풍스러운 건물에, 잔잔한 조명까지 좀 낭만이 있다. 도서관과 학과 연구실을 오가는데 지친 나는 데이빗을 설득해 동네 도서관으로 이끌었다. 처음 와보는 도서관이 생경해 기웃거리는 데이빗에게, 나는 그래도 몇 번 와봤다고 앞장서서 도서관을 소개했다. "근데 여기 자판기 같은 건 어디 없나?" 데이빗의 물음에 잠시 자판기를 찾으려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따뜻하고 친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Does she need any help?"
고개를 돌려보니, 친절한 웃음의 백인 할머니 직원이 데이빗과 나를, 아니 정확하게는 데이빗을 보며 묻고 있었다. 굉장히 예상치 못하게 훅 들어온 질문에 잠시 뭔 일인가 얼떨떨해 있을 때, 할머니 직원분은 다시 친절한 미소와 함께 말을 걸어왔다.
" Is she looking for something?"
뭔가 얼빠지게 생긴 학생 둘이 두리번거리고 있으니까, 뭔가 찾고 있는지 지레짐작했나 보다 라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아니 근데 왜 "Does she need any help?"라고 나를 콕찝어 말했을까? 그것도 내게 직접 물어보는 것도 아니고, 내가 도움이 필요한지를 나의 백인 남자 동행인에게 물어보는 이유는 또 뭘까. 처음 접해보는 상황에 잠시 벙쪄있던 내가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질 때쯤, 내 친구도 정신이 들었는지, "No. Actually she was showing me around"라고 웃으며 (그리고 굉장히 민망해하며) 대답했다. 할머니 직원분은 아 그러냐며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고 궁금한 거 있음 물어보라며 우리에게 손을 흔들고 멀어졌다.
방금 겪은 이 상황에 대해 나와 데이빗은 웃으며 어이없다는 말을 주고받았다. 문제의 할머니 직원이 악의가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정말 친절한 분이었다. 그저 헤매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데이비드는 이후 농담 삼아 내 기분을 풀어주려 너가 근데 항상 좀 길잃은 표정을 짓는 편이긴 해라고 말하기도 했다.) "딱한" "동양인" "여자"를 도와주려는 선한 의도였을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선한 의도에는 몇가지 편견이 그림자처럼 슥 깔려있다. 이 키작은 동양인 여자는 1) 미국인이 아닐 것이다, 2) 영어를 못할 것이다, 3)이 백인 남자가 보호자이거나, 혹은 4) 이 백인 남자에게 동양인 여자가 도움을 청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5) 스스로 의사표현을 하지 못할 것이다 등등. 2번 과 5번이 좀 겹치는 사안이긴 하지만, 영어가 서툴 거라고 생각했다고 해도, 직접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 당사자에게 묻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도움이 필요하냐고 삼자에게 묻는 태도는 언어에 대한 편견 그 이상의 무엇에서 비롯된 행위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내가 도움이 필요한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그녀의 "오만과 편견"이 친절하고 따뜻한 미소와 겹쳐 보여 이상한 기시감이 들었다. 대놓고 욕할 수도 없는 친절함을 뒤로하고 도서관을 나오며 데이빗에게 농담 삼아 "what a nice racist"라고 웃으며 말을 건넸다. 그때 내가 도움이 필요하냐고 묻던 친절한 할머니 직원 분은 단 한 번이라도 본인을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생각해봤을까?
어이없는 경험이라고 웃으며 넘겼지만, 3년의 세월을 이 땅에서 더 보내며 좀 더 다양한 착한 인종차별주의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가까운 사람부터 지나가는 행인에 이르기까지, 친절한 인종차별주의자들은 어디에나 있다. 그리고 슬프게도 내 안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그치만 그걸 꺠닫기 까지는 좀 더 긴 시간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