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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rdSong Oct 20. 2020

이별의 이유가 정말 '거리'였을까

광역버스


미안해. 난 롱디는 안 되는 인간인가 봐.


친구의 남자 친구는 이런 말을 남겼다.

친구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내 안에는 차마 말하지 못한 말이 남아 맴돌았다.






광역버스 정류장. 수많은 사람들이 뭉쳐있다 흩어지고 줄을 서 있던 사람들이 면발이 빨려 들어가듯 새로 등장한 버스 안으로 사라진다.

일터이든 데이트 현장이든, 목적을 완수하고 집으로 돌아가길 고대하는 사람들의 눈빛이 지쳐있다. 편안한 집에 돌아가려면 빨간 버스, 엠버스 등의 별칭으로 불리는 이 광역버스를 타고 또 긴 여정을 떠나야 한다.

고단했던 일도 기분 좋았던 만남도, 긴 시간 버스를 타고 시의 경계를 넘어야 한다는 사실을 남기고 사라진다. 좁은 좌석과 흔들리는 유리창만이 현실이다.


광역버스는 롱디(원거리) 커플을 이어주는 소중한 매개체다.

데이트 장소 고갈에 허덕이는 커플들을 놀거리, 볼거리가 많은 서울로 끊임없이 실어다 준다.


서울로 이사 오기 전, 나는 광역버스를 참 자주 탔다.

평일에는 대학원에 가기 위해 두세 번씩 탔고, 금요일이나 주말에도 서울에서 데이트를 하거나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한 두 번은 탔다.

늘 피곤했던 기억이 있다. 가끔 너무 피곤한 날은 그냥 서울 살아서 이 지난한 여정을 안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한 적도 많았다.


사진 뉴스웍스



내 기억 속 가장 힘들었던 광역버스는 사실 수원-서울 간 광역버스가 아니라 수원에서 인천으로 가는 광역버스였다.


인천에서 대학을 다니며 나는 부모님이 안 계신 소년가장 가정 아이들과 결연을 맺고 친한 누나 동생으로 지냈다. 내가 만난 아이들은 부모님이 안 계시고 할머니 혼자 아이들을 키우셨다. 내가 특별히 뭘 도와드릴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일주일에 한 번, 한 달에 두세 번씩 찾아가 할머니 말동무를 해 드리고 아이들과 밥을 먹으며 관계를 키워갔다. 할머니께서는 나를 아주 좋아해 주셨다. 정이 많고 활달하다고.

나도 정기적으로 할머니를 찾아뵈러 가는 걸 참 좋아했다. 정작 친할머니, 외할머니에게는 해드리지 못한 다정한 손녀 역할을 할머니께 했다.


대학 5년을 그렇게 지내고 수원에 발령을 받았다. 수원에서 인천 부평은 너무 멀었다.

3월에 발령을 받았는데 주말에도 학교를 나가 뭔가를 했다. 솔직히 지금 생각해보면 그 정도로 할 필요는 없었는데 그다음 주 수업 준비, 학급 미화 등을 하느라 나름 애를 쓴 1년 차를 보냈다.

발령을 받고 나서 그래도 첫 학기에는 한 두 달에 한 번씩 부평에 가서 할머니를 찾아뵈었다.

처음 6학년일 때 만났던 아이도 어느덧 고등학생이 되었다.

또래가 한창 좋을 때인 데다가 사회생활 시작한 누나라고 딱히 용돈을 쥐어주거나 뭘 해주지도 못해서 꼭 만나자는 명분을 만들기도 쉽지 않아 얼굴 보기가 어려웠다.


딱 두 번 다녀왔을 뿐인데 수원역 앞에서 탄 인천행 버스가 편도 두 시간 넘게 걸리니 한번 다녀오는 게 엄청난 부담감으로 다가왔다. 우리 집에서 수원역으로 가는 것도 그때는 지하철이 없어서 버스로 30분 정도 걸렸다. 그러니 부평 한번 가자면 편도 3시간은 잡아야 했다.

할머니께 전화는 드리는데, 학교에 적응한답시고 점점 발걸음이 뜸해졌다.


어느 날 할머니께 전화가 왔다.


"은주야? 이번 주에 부평에 좀 올 수 있냐?"


손자 형제 중 아직 미성년자인 동생이 핸드폰을 만들어야 하는데 나에게 보증인이 되어줄 수 없냐고 하셨다. 어려서부터 남에게 의존하기 싫어했던 아이가 할머니께 은주누나한테 그러지 말라고 손사래를 치는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다.

할머니는 전화요금은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나는 덜컥 겁부터 났다.


그때 당시 나는 월급을 쪼개고 쪼개 살고 있었다. 발령 첫 달 카드라는 것을 만들어 써보고 나서는 카드 맛에 잠시 빠졌지만 이렇게 덮어놓고 쓰다가는 큰일 나겠다는 인식이 들기 시작했다. 정신 차리고 살아가려니 말이 사회인이지 솔직히 너무 팍팍했다. 오히려 누군가 뒷감당만 해줄 수 있다면 '정신줄 놓고' 맘 편히 사는(쓰는) 게 정신건강에는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을 만큼 사회초년생에게는 내야 할 돈, 챙겨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아이에게는 형이 있었는데 무슨 사정이 있는지 늘 바쁘고 할머니께 돈도 받아가서 안 그래도 기초수급을 받고 있는 할머니는 늘 힘들어하셨다. 나보다 한 살 어린 형을 만날 때마다 나는 그 아이를 존중했지만, 형은 성인인데 나에게 보증인을 요청하셔야 할 만큼 형에게 역할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한 달에 몇 만 원씩 부담이 더 생길 수도 있는 상황이 겁이 났던 것이다.


"할머니.. 일이 많아서 이번 주말에도 출근해야 해서요."


그 주 주말에도 학교에 나갈 계획이 있었기 때문에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솔직히 수업이 있는 날도 아니고 안 나간다고 해도 누가 뭐라고 할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는 일이 많다는 핑계를 댔다.

내가 부담 가질까 봐 할머니는 평소에 인천 오라는 말씀도 잘 안 하시는데. 그걸 알면서도 보증인 되기가 그렇게 두려웠다.  


결국 나는 그 주에 인천에 가지 않았다. 그날은 할머니께 일이 많아서 못 간다고 했지만 자주 있지도 않은 할머니의 부탁을 거절한 죄송함과 민망함이 더해 얼굴 뵙기가 더 난처했기 때문이다. 평소에 그렇게 손녀처럼 해 놓고, 할머니가 필요하다고 할 때는 내 상황이 어렵다고 외면한 죄송함이 너무 컸고 평소의 말에 비해 행동이 못 따르는 것 같아 민망했다. 할머니도 오죽하시면 성인이 된 첫째 손자를 놔두고 나에게 요청하셨을까. 그런데 그때는 그 사실마저도 더 부담이 되었다. 정말 일 때문이라면 그 주에 가지 못하면 다음 주라도 간다고 하면 되는 건데 내가 그러지 않으니 아마도 할머니께서도 내 마음을 아시지 않았을까.


그 뒤로는 연락을 더 드리기가 어려웠다. 아주 가끔 할머니께 전화를 하고 할머니께서 보고 싶어 하시면 나도 보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한 번 가기가 쉽지 않다는 내색을 은근히 내비쳤다.

할머니는 항상 "거기가 얼마나 먼데 오지 말어." 하시며 오히려 이해해주셨다.

그런데 어느새 그 말을 내가 하고 있었다.


"요즘 너무 바쁜데 거리가 너무 멀어서 한 번 가기가 쉽지 않아요. 다음 달에는 꼭 갈게요."


그렇게 멀다는 핑계를 담고 언행일치가 빠져 공허한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다.  




솔직히 그때 나는 거리도 거리지만 그보다도 내가 더 깊이 관여되었을 때의 무게감과 책임감이 두려웠다.

그 점을 나 자신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가깝게 지냈으면서 정작 더 깊은 책임을 지고 싶어 하지는 않은 내 마음이 표리 부동한 것 같아 비겁하다고 느꼈고 스스로 부끄러워 할머니를 더 뵈러 가지 못했다.

할머니도 서운하셨을지 모르지만 고등학생이었던 동생은 더 서운했을 것 같다. 안 그래도 남에게 부담주기 싫어하는 성미였는데 나에게 전화하시는 할머니를 말렸고, 내가 거기에 응하지 않아 더 민망하고 섭섭했을지도 모른다.

그날 보증인이 되어달라는 통화에서 고등학생인 동생이 민망해하며 "누나 됐어. 신경 쓰지 마." 하고 끊은 것이 내가 들은 아이의 마지막 목소리였다.


그 후 직접 찾아가지를 못 하고 한 두 달에 한 번 전화를 해보는데, 전화도 받지 않고 아무도 응답하지 않는 횟수가 거듭되자 5년 넘게 이어지던 인연은 끊어졌다.

그렇게 한 해 두 해 가니 할머니가 돌아가셨으면 어쩌나 그럼 더 죄송해서 어쩌나 두려워 더 전화를 하지 못했다.

그 후 1, 2년 뒤쯤 한 번 그 집에 찾아간 적이 있다. 할머니가 사셨던 집을 아무리 두드려도 아무도 나오지 않고 주변에 사시는 분들도 보이지 않아 무엇도 알아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pixabay @ doctor-a



멀다는 건 참 핑계를 대기 좋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만난 자신의 비겁함을 합리화하기도 좋다.

멀다는 말은 상대적인 것 같지만 거리와 시간이라는 수치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객관적이기도 하다. 그래서 상대방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무언의 힘이 있다.


책임감과 무게감에 대한 회피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지금도 할머니를 자주 뵙지는 못하더라도 계속 인연이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작별의 이유는 정확히 말하면 거리가 멀기 때문이 아니다.

기꺼이 가겠다는 마음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Out of sight, out of mind.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들 하지만 늘 통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질 확률이 큰 것뿐이다. 그 이유는 눈에서 멀어졌기에 그 사이에 끼어들 사람, 사건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사람과 사건에 관한 사연은 무시한 채 '눈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라는 간결한 변명으로 모든 것을 덮어버린다.


어쩌면 단순히, 어떤 관계로든 그 인연은 안 될 인연이었을 뿐, 그 이유를 굳이 설명하기 위해 거리라는 이유를 빌려오는지도 모른다.

영화 <500일의 서머>에서 "나는 진지한 관계를 원하지 않는다"며 결혼을 거부한 서머가 톰과 헤어지고 곧이어 다른 남자를 만나자마자 결혼한 것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진지한 관계를 원하지 않는다며 자유를 외쳤지만 결국은 남자 주인공 톰과의 결혼을 원하지 않았을 뿐이다. 자유는 핑계다. 물론 그때는 서머 자신도 인식하지 못했다는 게 미필적 고의였던 나랑 조금 다르다.


수많은 이별은 이렇게 '너와 나, 우리 자체'가 아니라 외부의 무언가에 이유를 빚진다. 그리고 많은 경우 그 빚을 애먼 버스가 안고 달린다.


"미안해, 롱디는 되는 인간인가 봐."


친구가 대전에서 서울을 오가며 연애를 했다. 한 달에 두세 번씩 주말을 이용해 만나던 남자 친구는 점점 연락도 뜸해지더니 이런 말로 이별을 고했다. 고속버스를 타고 오가는 게 너무 힘들었다고 했다.

그들의 평소 이별 장소는 주로 터미널이었다. 결국 터미널은 그들의 최종 이별 장소가 되었다.


그 말을 전해 듣는 나에게는 친구에게 (그때는) 차마 하지 못한 말이 맴돌았다.


정말 이유가 그걸까?





두 달 후 친구의 전 남자 친구는 결혼했다.




관계에서 오는 기쁨과 애정을 누리려 버스를 타고 달려갈 때는 언제고, 두려움과 책임감을 만나면 뒷걸음질 치듯 버스에 오르던 발길을 끊어버린다. 그리고 그 이유를 버스가 달리는 긴 거리 탓이라 말한다. 어쩌면 모든 것을 아는 것보다는 그렇게 믿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꽤 많은 순간 우리가 못내 져버린 책임감을 버스에 전가한다. 책임감은 끝끝내 인식되지 못한 채 남아 착각이 된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는 착각, 이게 우리의 최선이라는 착각, 어쩔 수 없다는 합리화.


그렇게 수많은 착각과 오해를 안고 도시와 도시 사이, 끝끝내 이어질 수 없는 그 길을 광역버스는 오늘도 달린다.

 




표지 사진 pixabay @ doct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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