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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Sep 01. 2020

배낭 유럽 대신
빔프로젝터를 고를게요

8개월의 월급 탈탈 털어 떠난 유럽



“꼭 유럽이어야 할 필요 있어?”


신기하게도 여행을 준비하는 내내 이 질문을 받은 적이 없었다. 왜 하필 로마야? 왜 하필 프라하야? 라는 물음 없이, ‘유럽’이라는 단어는 어디서나 통하는 프리패스처럼 친구들의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이미 유럽을 다녀온 지인들은 어떻게 하면 괜찮은 숙소를 예약할 수 있는지, 한국인이 모르는 현지 맛집을 알 수 있는지, 비상약은 어떤 것을 챙겨야 하며 미술관은 어디가 가장 좋았는지에 관한 팁을 알려줬다. 숱한 조언을 받아 적으며 이미 한 차례 유럽을 한 바퀴 돌고 온 느낌이 들었다. 출발하기까지는 아직 2주나 남았는데도 메모장은 파리의 맛집으로 빽빽했다. 심지어 스위스의 패러글라이딩 업체는 어디가 제일 친절한지 말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렇다, 나는 유럽 여행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4학년을 앞둔 휴학의 끝자락, 내게는 런던부터 로마까지의 여정이 계획되어 있었다. 친구들은 저마다 부모님의 돈을 빌려 유학이나 휴양지로 떠났지만, 나는 차마 그럴 형편이 안되어 항공권 사이트 대신 입사 지원서를 열어야 했고 드디어 그 결과물이 탄생한 것이다. 8개월간의 인턴십을 끝내고 어렵사리 모은 500만 원,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여행 계획을 짰다. 혈혈단신으로 홀로 떠나는 여행인지라 가고 싶은 곳이면 협상 없이 즉시 예약할 수 있다는 장점도 한몫했다. 첫 직장에 다닐 때는 상사의 괴롭힘도 견디며 돈을 벌어서 그런지, 한 번 가는 김에 모든 걸 다 경험하고 오겠다는 야심 찬 포부가 결과물을 만들었다. 그러니까, 30일의 여행에서 10개국을 돌고 오겠다는 말도 안 되는 일정이 세워졌다. 사전 조사를 하는 동안 신기한 경험을 했다. 열심히 찾으면 찾을수록 진이 빠지는 색다른 경험! 그래도 사진으로 보는 것과 실제로 보는 건 커다란 차이가 있을 테니까, 퇴근 후 일정을 짜는 게 더 이상 설레지 않을 정도로 지쳐서 모든 걸 내팽개치고 싶을 때에도 꾹 참고 일정을 더해냈다.





드디어 출국.



런던으로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도 나는 형광펜이 잔뜩 칠해진 유럽 여행책을 읽느라 몰두하는 중이었다. 내리자마자 곧장 지하철을 타자, 그다음에는 에어비앤비를 켜서 한 번 더 길을 숙지해야 해. 잠깐이라도 다른 곳에 정신을 두면 소매치기를 당하는 건 시간문제일 테니까. 나는 코가 베일까 조마조마하며 서울로 올라온 사람처럼 온갖 걱정에 휩싸였다. 그래서일까, 막상 런던에 도착하고 난 뒤에도 그 감흥을 즐길 새 없이 숙소로 향해야 했다. 휴게소에서 간단히 샌드위치를 먹고 침대에 눕자 급격한 피로가 들었다. 시차 적응을 위해 쉬어야 하는데도 여기서 한 시간 자는 게 얼마어치야, 라는 생각이 들어 몸을 일으켰다. 무거운 다리를 끌고 밤 산책을 한 뒤, 달랑 세 시간 남짓을 잔 뒤 일어났다. 런던을 대표하는 뮤지컬 라이언킹의 얼리버드 티켓을 위해 줄을 서야 하기 때문이었다. 무려 세 시간을 기다렸고 그 덕에 2만 원 남짓으로 A열에 앉게 되었다. 표를 성공한 뒤에는 당장 런던의 명소들을 돌아다녔다. 그 후로 알게 된 사실은 새벽 티켓을 끊었으면 그거야말로 오늘 일정은 다 했다고 생각하며 잠을 자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런던아이부터 타워브릿지를 보기 위해 발을 바삐 움직여서 정작 뮤지컬 중간부터는 비몽사몽 한 채 장면들을 모두 놓쳤다. 그날은 내가 나를 얼마나 자책했는지. 지금 와서는 그게 그렇게 잘못이었나 싶지만, 당시에는 여행 둘째 날부터 일정을 소화하지 못했다는 명목으로 나를 갈궈댔다.

  

나라는 녀석은 새 노트를 쓸 때도 오타가 있으면 곧장 종이를 찢어버렸던 아이여서, 첫 나라인 영국에서 이렇게 피곤한 몸으로 돌아다니며 그토록 기대했던 라이언킹의 결말을 놓쳤다는 사실은 절망을 일으키기 충분했다. 잘못 쓴 노트는 찢어버리거나 새 노트를 사면 그만이었지만, 시간은 되돌릴 수 없으니 나는 다음부터 절대 이런 실수는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어야만 간신히 자괴감을 끝낼 수 있었다.


엎치락뒤치락, 사람에게 휩싸여 일하던 2018년을 힐링하기 위해 사색을 목적으로 홀로 떠난 유럽이었지만, 막상 타국에 홀로 있으려니 여간 고독한 게 아니었다. 유럽 여행을 떠나는 한국인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유랑’이라는 카페를 열어 동료를 구했다. 좋은 사람들만 만났으면 다행이었겠지만 자신이 가고 싶은 일정만 줄기차게 권유하는 사람, 나를 사진작가로 고용한 듯 카메라를 쥐여주는 사람, 친구에게 들었는데 그곳은 맛집이 아니라며 불평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굳이 여행까지 와서 사람들과 다투고 싶지는 않았기에 나는 입만 꾹 다물어야 했고, 그러자 아무리 예쁜 풍경이더래도 감탄하기 어려웠다. 속은 이런저런 고민으로 복잡했기 때문이었다. 이 사람이랑은 내일까지 같이 다니기로 했는데 언제 도망치지? 어떻게 말해야 같이 안 다닐 수 있을까? 라며 타이밍을 잡고 있었다.




   

파리는 영화에서 보는 걸로.



동료들에게 아프다는 변명을 하고 나서야 혼자 다니게 된 나는 파리에 도착했고,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재즈풍 음악이 나를 반겨줄 줄 알았건만 나를 노려보는 건 다름 아닌 소매치기꾼들이었다. 에코백을 매만지는 사이 한 남자가 내 캐리어를 두 손으로 잡았다. 다행히 뒤에서 그 상황을 지켜본 한 한국인이 외국인의 손을 찰싹찰싹 때렸다. 그 남자는 나와 나를 도와준 동생을 잔뜩 흘기며 걸음을 재촉했다. 갑자기 벌어진 위험천만한 상황에 다리가 풀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파리에는 주말 시위가 벌어져 버스 배차가 모두 끊겼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행인의 안내를 받아 정류장에 도착했으며, 행인은 자신이 안내했으니 팁을 달라고 우겼다. ‘건장한 남자 외국인’이라는 사실에 압도된 나는 결국 만원을 주어야 했다. 제대로 된 정류장이었으면 그렇게 아깝지도 않았을 텐데, 나는 버스가 오지 않는 버스정류장에서 한 시간을 버텼다.


역에서 세 시간을 헤매고 나서야 드디어 버스의 부재 소식을 알게 된 나는 절대 타면 안 된다는 무시무시한 택시비를 내고 숙소로 도착했다. 처음으로 한인 민박에 머물렀던 날이었는데, 주인 언니가 내게 건넨 “괜찮아요?”라는 기본 안부 인사에 엉엉 울고 말았다. 주인은 허둥지둥하며 따뜻한 차를 끓여주었고, 기대도 하지 않았던 얼그레이 차가 맛있어 딸꾹질하며 진정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어쩌다 보니 이 여행 일지는 에펠탑을 험담하는 글이 될 것 같지만……. 파리에서 가장 기대했던 에펠탑은 엉망진창이었다. 왜 에펠탑을 철거하려고 했었는지의 당대 시대상을 한 번에 이해하기 충분했다. 꾸질꾸질한 구름과 녹이 슨 에펠탑의 조화란…… 아아, 얼른 떠나고 싶어라, 라는 노래를 흥얼거리게 만들었다. 게다가 내가 걸었던 파리의 거리는 쓰레기로 가득해서 쓰레기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다른 면에서 완벽한 파-리. 먼 훗날에 결혼을 한다면 신혼여행은 당연히 빠리지! 라고 주장하던 나였건만 여기는 다시 또 오지 않으리라는 다짐을 했다. 몇몇 상인들은 영어를 말하면 무시하다 간신히 외워둔 프랑스어를 더듬더듬 말하면 친절함을 베풀었다. 물론 좋은 일들도 많았겠지만, 틈만 나면 호시탐탐 지갑을 노리는 외국인들을 피해 다니느라 진이 빠졌기에 파리의 추억을 회고하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재즈 바에서 만난 한 한국인은 자신에게 파리는 제 2의 고향이라며 춤을 추기도 했으니 누군가에게는 로망의 도시로 기억될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배웠다.


유럽에서 가장 기대했던 스위스는 풍경에 압도될 정도로 대단했으나, 얇은 지갑으로 인해 3일도 못 머물렀을 뿐만 아니라 죽을 뻔했던 게 가장 큰 결점이었다. 케이블카를 타고 끝없이 끝없이 오른 산기슭, 썰매를 타다가 길을 헤매 스키 길로 향한 게 화근이었다. 심지어 초급자를 위한 스키 길도 아니고 현란한 묘기를 보여주는 고급용 스키 길이었다. 반질반질하게 정돈된 산기슭 코스에서 썰매를 타던 중 나는 무언가 이상한 기색을 느꼈고, 옆에 있던 동행에게 “잠깐!”이라고 소리쳤다. 얼른 내리라고 손짓하자 동생은 썰매에서 엉덩이를 뗐고, 기적처럼 썰매는 절벽으로 떨어져 산산이 부서졌다. 그때의 소름은 잊을 수 없다. 마치 신의 계시를 받게 된 사람이 이런 기분일까? 영화 <식스센스>를 떠올리며 나의 또 다른 육감에 관해 생각하다가, 얼른 이곳을 빠져나가야 해! 라고 소리쳤다. 그 와중에 저 썰매의 값은 얼마를 내야 하지, 라며 머리가 아파왔으니 죽음 앞에서도 돈을 걱정한 쫄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해는 뉘엿뉘엿 지고, 한 시간만 있으면 케이블카가 끊길 시간이었다. 내려가는 사람들만 있지, 올라가는 사람들은 없는 길이라 바닥은 아주 매끈매끈했다. 한 발짝 디디면 주르륵 미끄러져서 발자국을 세 번 톡톡 두드려야 한 걸음 디딜 수 있을 정도였다. 4년 전 떠났던 국토대장정의 기억을 되살려 동생의 손을 잡고 다시 정상에 올랐다. 오르면서 이대로 죽으면 여행자 보험으로 들었던 3억이 부모님에게 갈 테니 나름 좋은 인생이었다, 싶어 졌다. 아마 그런 웃음 어린 낙관이 불행에서도 한 발짝을 딛게 한 힘이 되었던 것 같다. 또한, 아무리 울고 싶어도 지켜야 할 대상이 생기면 눈물이 쏙 들어간다는 사실도 덤으로 얻었다. 그렇게 마음은 이대로 내 인생이 끝나면 어쩌지 조마조마하면서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동생을 토닥였다. 간발의 차로 마지막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오며, 유럽 여행 대신 빔프로젝터를 샀으면 오래오래 만족도가 더 높았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이후 오스트리아, 부다페스트, 베니스, 로마까지 쉴 새 없이 일정을 끝마쳤지만 사실상 ‘경로’에만 해당하는 여행이었다. 둘러보아야 한다는 명소, 꼭 들러야 한다는 맛집을 들렀지만 커다란 만족은 느끼기 어려웠다. 마치 보드게임판에서 돌아다니는 꼭두각시가 된 기분이었다. 그 후 돌아온 한국, 버스와 지하철에서 터지는 와이파이는 물론 수동으로 움직이지 않아도 되는 엘리베이터, 누가 휴대폰을 칠까 달아둔 스프링이 없어도 마음껏 다닐 수 있음에 숨통이 트였다. 먹고 싶은 김치찌개, 제육볶음까지 이제껏 맛있게 먹었던 한식들도 행복을 더했다.


사실 유럽이 잘못된 건 아니었다. 하늘도, 풍경도, 명소들도 거대하고 예뻤으나 그 풍경을 담을 나의 여유가 부족했기에 만족하지 않았을지도. 힘겹게 여행비를 마련한 만큼 모든 일정을 소화하겠다는 욕심이 좋은 사람을 진상으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르겠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나는 일상을 여행처럼 살기로 생각했고, 천천히 마음의 여유를 키웠다. 여유의 중요성을 깨달았으니 유럽에서 받은 교훈은 다 한 것 같지만, 그래도 500만 원으로 튼튼한 빔프로젝터를 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은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이제 저는 30분 거리에서 프랑스를 만납니다!




[무중력지대 양천 - 2030 라이프 매거진 8월호]

Writer 현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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