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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Mar 07. 2023

오늘 하루는 방전해
일찍 퇴근해 보겠습니다


요즘따라 할 말이 많지만 회사에 해를 미치는 말은 쓰지 못한다는 규정이 있어 입과 손을 막고 살고 있다. 일상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누군가의 허락을 받지 않고 표현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점이 이렇게나 그리운 사실이라는 걸 몸소 깨달으며 출근을 하던 때 불현듯 나의 프리랜서 생활이 떠올랐다. 불안하고 답답했지만 괴롭지는 않았던 날들이었다. 심심하고 지루하고 때로는 세상에 혼자 남겨진 듯한 외로움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이유 없이 종종 슬퍼지지는 않던 때였다. 세 달만 버티고 회사를 나오자는 다짐 아래 그날이 되던 날 팀장님께 이번 달 말까지만 일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얘기했더니, 팀장님은 다정한 눈빛으로 힘든 것은 해결해 줄 테니 다녀보자고 일렀다. 나는 사람들이 따스한 눈빛으로 따스하게 권유하면 좀처럼 거절하지 못하고 수긍하는 면이 있어서 진심과는 다르게 알았다고 답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분명 할 수 있는 일인데 좀처럼 손이 따라오지 않는다. 분명 말할 수 있는 의견인데 눈치를 보느라 도통 입을 열지 못한다. 이런 하루가 지속되니 꿈에 그리던 사원증을 목에 매달 수 없을 만큼 무겁게 느껴졌다. 사원증을 손에 쥐고 게이트를 통과하며 오늘도 무사하기를, 이라거나 내일도 무사하기를, 이라고 중얼거리는 날들이 늘어났다. 그러던 오늘은 어떤 일도 벌어지지 않았는데 계속 몸에 힘을 주고 회사를 다닌 탓인지 힘이 스르르 풀렸다. 나만 빼고 다들 바쁜 것 같고, 나만 빼고 다들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면 옆에 동료가 있어도 외롭다는 사실을 배웠다. 협업하던 상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피드백은 내일 받아도 될까요. 잠시 주저하다 다음 문장을 붙였다. 오늘 하루는 방전이어서요. 다음 문장은 붙이지 않았다. 오늘 하루 쉰다고 충전될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오늘은 집에 가고 싶습니다. 집에서 잠을 자고 싶어요.


서둘러 가방을 싸 집에 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조그만 주황색의 알약을 하나 삼키는 것이었다. 조금 뒤면 졸릴 테고 나는 낮에도 나른한 잠을 잘 수 있다.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누웠는데 연인에게서 연락이 와 있었다. 오늘은 일찍 끝나도 아홉 시야. 나는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그러니까 회사는 둘째치고 어떻게 번아웃이 오지 않을 수 있냐고, 어찌 그리 담담하게 야근을 인정할 수 있냐고 물었다. 그가 답했다. "번아웃이 온 적은 있는데, 번아웃은 약간 내 능력 밖의 일이 오거나, 내가 업무를 따라가지 못하면 오는 것 같아. 내 경우는 지금은 따라갈 수 있는 수준의 일이라서." 내가 하는 일을 찬찬히 떠올렸다. 나는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내일까지 짧고 키치 한 카피를 떠올릴 수 있을까. 그건 내 능력 밖의 일인가, 내 능력 안의 일인가. 에세이를 쓰는 일은 내 능력 안의 일이 분명한데 카피를 쓰고 KPI를 수립하고 각종 품의를 쓰고 기사 기획을 하는 일은 내가 과연 따라갈 수 있는 일인가에 관해 한참을 생각하다 스르르 잠이 들었다.


말 그대로 '어떻게 잠에 들었는지 모를 만큼 세상모르게' 잠이 든 나는 일어나자마자 엄마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를 확인했다. 다시 전화를 걸었는데 연결음만 들릴 뿐 전화는 걸리지 않았다. 급하면 메시지라도 남겨두었겠지, 하고 태연하게 생각하려는 편이라 메신저 앱에 들어갔더니 역시나 엄마에게서 연락이 와 있었다. "그냥 전화했어. 나는 오늘까지 일주일째 연달아 일하는 중이다. 오늘은 일찍 잔다. 먹는 거랑, 잘 자고, 그렇게 지내지. 스트레스 덜 받고 마음 편히 지내." 제주에서 작은 마트를 운영하는 엄마는 고집을 꺾지 않고 새벽 4시부터 밤 12시까지 마트를 운영한다. 두 명의 이모와 함께 꾸리고 있지만 이모 한 명이 최근에 수술을 받아 둘이서 교대로만 연달아 근무를 하기 시작했다. 나이도 나보다 많고 체력도 나보다 떨어질, 나보다 피곤할 엄마가 나를 걱정하는 메시지를 보니 마음속으로 눈물이 나왔다. 동생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눈물이 메말라서 어떤 슬픈 영상이나 글을 봐도 잘 울지 않는다. 이번에도 역시나 울지는 않았는데 괜스레 마음 한편이 따끔거렸다.


손이 막혀서 답장을 못 보내는 건지 일부러 오타를 냈다. 알았어, 도 아닌 알앗어, 로. 성의 없어 보이는 답장을 전하고 싶었던 이유는 아직도 못 찾겠다. 나는 당연히 잘 지내고 있다고, 당연히 잘 먹고 잘 자고 있다고 얘기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한다는 말을 결코 하지 못한다. 그저 '알앗'다고 이야기할 뿐이다. 오늘 하루는 방전했다고, 그래서 해야 할 일이 많은데도 도망쳤다고, 와서는 항불안제를 먹고 잤다고 이야기하지 못한다. 엄마는 내 일거수일투족을 다 꿰고 있지만 우리는 서로의 약을 못 본 척, 못 들은 척한다. 그저 시간의 흐름을 타고 괜찮음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기를 바랄 뿐이다. 오늘 하루는 이만큼 적었으니 내일 하루는 조금 더 충전되어 있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 아픈 면을 꺼내 오랜만에 세세히 들여다봤으니 아프지 않은 면도 오래 꺼내 섬세하게 들여다볼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이 든다. 다른 사람들도 괜찮음을 보여주기 위해 부러 성의 없는 오타를 낸 적 있을까, 다른 직장인도 방전이 되어 퇴근하고 싶다고 외친 적 있을까, 그렇게 외치고 싶었던 적이 있을까, 일할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아 도망치고 싶었던 적이 있을까, 도망치면 어디로 향할지 길을 잃었던 적이 있을까. 묻고 싶은 질문은 한가득인데 나는 어디엔가도 묻지 못하고 오늘도 또 스르르 잠에 들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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