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歷史家는 다음 세 가지 중 하나이다.
거짓말하는 사람, 잘못 알고 있는 사람 그리고 알지 못하는 사람.
새뮤얼 버틀러는 말한다. 신은 과거를 바꿀 수 없지만, 역사가는 그럴 수 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이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왕조나 정권의 정당성을 위해 과거를 기록한다.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것이지만 언제 기록했느냐에 따라 기록이 바뀔 수 있다. 누가 작성하느냐, 그 사람의 역사관에 따라 달라진다. 그 사람이 역사가이다.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 한 사라지지 않는 것이 역사라는 이름의 장강대하일 것이다. 그러나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안 되니, 기억 또한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것이 그 기억을 적어두는 기록이다.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을 가리켜 세상에서는 역사가라고 부른다. _《이현상 평전》, 김성동 발문
역사는 진보한다. E. H. 카의 명구이다.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가 자신도 역사의 흐름 속에 있음을 말해 준다. "흐름 속에 있는 것은 사건만이 아니다. 역사가 자신도 그 속에 있다. 어떤 역사책을 집어 들 때, 책 표지에 있는 저자의 이름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출간 일자나 집필 일자도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 것이 때로 훨씬 더 많은 것을 누설한다."
미국 남북전쟁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바뀌어 왔다. 19세기 후반의 민족주의 사가들은 남북전쟁과 이에 따른 노예제도 폐지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미국의 숭고한 건국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마땅히 거쳐야 했던 과정이라고 보았다. 북부의 노예 폐지론자는 이상에 불타는 개혁가로, 그에 반해 남부 노예제 옹호론자는 시대에 역행하는 지각없는 무리로 바라보았다.
1920년대 미국에서는 자신의 발자취를 미화하는 전통적 역사 서술을 비판한 혁신주의 역사 서술이 전반적으로 유표 되는 시기였다. 사회를 계층 간의 갈등 구조로 파악하는 새로운 사회경제적 연구방법론을 수용하였다. 볼셰비키 혁명 후 경제적 결정론이 세계 학계를 풍미하던 때였다. 미국에서도 남북전쟁을 노예제도를 둘러싼 도덕적 대결이 아니라 북부 산업 세력이 남부의 농업 사회를 정복한 것과 불과하다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했다. 역사의 진행을 담당하는 주체 측의 도덕성은 부정되고 그들이 가진 경제적 지배욕만 부각될 뿐이었다. 혁신주의 사조는 남부의 역사에 대한 재평가를 가져왔다.
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이 대제국으로 떠오르자 미국은 자신의 탁월함을 예찬하는 합의주의 사가들이 부상했다. 냉전구도하에서 공산주의와 대결하기 위해, 미국인은 원래 다른 나라와는 다르게 숭고한 가치관을 갖고 나라를 건설했다는 미국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나, 다양한 이민은 미국이라는 용광로에서 동질적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용광로 이론(Melting Pot)을 내세우며 미국인 사이의 대동단결을 강조했다. 그 결과 미국의 통일성과 응집력을 헤치고 지역적 특성을 고집, 고수하던 지난날 남부의 노예제 옹호론자는 역사적 의식도 없고 비도덕적인 타락한 군상으로 재평가하였다.
1960년대 반문화와 신좌파의 대두는 역사해석을 다시 평가하였다. 1920년대 남부사가의 학문적 평가를 재평가하려는 노력이 두드러졌다. 북부의 노예제 폐지론자도 남부인과 마찬가지로 인종주의자이라고 평가했다. 북부인의 노예제 반대는 결국 위선적이며, 타 지역의 문화를 존중할 줄 모르는 자기중심적인 처사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노예해방과 같은 큰 개혁도 결국 북부의 이기주의에 의해 영도되었으며, 미국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건국이념을 위해 한 일이 전혀 없으며, 그러한 개념은 미사여구에 그치는 신화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한 세기 동안 번복에 번복을 거듭한 노예제에 대한 시각 변화는 결국 논쟁의 다양한 해석을 가져왔다. 현재는 찬반론 양측 모두에 부정적인 시각과 긍정적인 시각이 혼재하며 균형을 이루고 있다. 노예제도를 옹호하던 남부인도 완전한 비인간적이고 부도덕한 인간은 아니었다고 평가한다. 북부의 노예제 폐지론자도 완전무결한 순수한 이상주의자는 아니었으며, 그들이 전개했던 노예제도 폐지운동 자체에도 이종적 편견을 드러내는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한다.
歷史觀
역사관은 간단하게 정의하면 '역사의 발전 법칙에 대한 체계적인 견해'로, 사관이라고도 하며 다양한 역사관이 존재한다. 역사관은 역사가의 역사에 대한 이해, 해석 원리, 가치관, 관념 등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역사관은 시대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왜냐하면, 사회상과 사람의 가치관에 따라 역사관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관은 역사연구로 확인되고, 발전하게 된다. _위키백과
역사가에게 중요한 것은 사관이다. 첫째, 오래된 중국 사서는 성공과 실패로만 영웅을 평가하는데 그것은 잘못으로, 개국 군주는 영웅이요 망국 군주는 개라는 논리 역시 그렇다. 둘째, 역사책은 정부이다. 그런데 중국의 역사 기록은 공은 기록하고 잘못은 넘어가며, 이익은 챙겨 주면서 손해에 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는다. 셋째, 역사 사건을 탐구하고 역사 인물을 평가할 때 특정한 시간 · 공간 · 사람 · 사건에 한정되어 작은 역사만 연구해서는 안 된다. 시공을 초월하여 거시적 ‘큰 역사’를 연구해야 한다. _장정일
역사는 늘 바뀐다. 사실이 변하는 게 아니라 해석하는 역사가의 역사관에 따라 역사적 사실의 평가가 바뀐다. 미국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의 "역사는 항상 잘못 기록되기 때문에, 항상 다시 기록할 필요가 있다."라는 말과 뜻을 같이 한다.
그 시대의 역사적 인식이나 시대적 상황에 따라서 역사관은 바뀔 수 있다. 또한, 그 시대 안에서도 생각의 차이 때문에 충분히 다양한 관점이 나올 수 있다. 이런 다양한 관점이 모여 역사를 만들어 간다. 이렇게 생각하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어떤 역사적인 사건이나 설명이 교묘하게 위장되거나 거짓말로 포장되면 이를 알아차리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매번 말을 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하지만 역사가는 자신의 말이 아니라 '사실'이 말하고 있다고 말한다.
사실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사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거나 너무 많은 말을 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하나의 목소리로 듣는다. 그리고 그것이 참된 목소리라고 너무 쉽게 믿어버린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하지 않을까. 사실 뒤에서 누가 말하고 있는가. 왜 그렇게 말하는가. 그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_《책으로 세상을 말하다》, 고병권
덧_참조
《두 얼굴을 가진 하나님: 성서로 보는 미국 노예제》, 김형인, 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