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은 7세기에 덴무天武 천황이 살생을 금지한 이래 1,200년 동안 소와 같은 육고기는 먹지 말도록 철저히 교육받아왔다. 가축을 먹는 것은 기마민족의 습관으로, 고대 일본에는 없었던 것을 '도래인'이 가져온 것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일본인에게 육식 금지는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은 금지령이었을 것이다. 오히려 불교의 융성과 함께 대두하기 시작한 도래인 세력을 음식 측면에서 억압하려고 한 정책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1867년 1월 약관 열여섯 나이로 즉위한 메이지 천황은 쇄국에서 개국으로 정책을 180도 전환했고, 온 나라가 서양 여러 나라를 따라잡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당시 지도자의 고민거리는, 근대화의 격심한 차이도 차이지만, 위로 올려다보아야 할 정도에 이르는 서구인과의 체형의 차이였다. 그런 현실에서 어떻게 하면 서구의 뛰어난 문명을 무리 없이 도입할 수 있을까. 발상의 대전환이 필요했다. 그 결론은, 육식을 해금하고 서양 음식을 보급해 체형이나 문화적으로 서구인에 대한 열등감을 없애는 것이 급선무였다.
서양인에 대한 체형 열등감이 육식에 기인한다는 결론을 내린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당시 서양인이 육식과 빵을 주식으로 하였기에 그와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육식의 해금은 일본인 식사습관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때까지만 해도 육고기는 불결한 것이었고, 사람들은 오랫동안 "먹으면 몸도 마음도 의복도 주거도 부정을 탄다, 다른 사람 앞에 나설 수도 없게 된다. 금기를 범한 자는 귀양 등의 엄벌에 처해진다"라고 철저하게 교육받아왔다.
1871년 12월에 메이지 천황은 1,200년 동안 금지한 ‘육식 해금령(解禁令)’을 내렸다. 1872년 1월 24일에 천황은 대신들과 함께 소고기를 먹었다. 한 달쯤 지난 2월 18일에 열 명의 자객이 천황 거처에 난입한 사건이 발생했다. 4명은 현장에서 사망, 1명은 중상, 나머지 5명은 생포되었다. 범행 동기는 천황이 소고기를 먹어 일본 정신을 더럽혔다는 것이다. 천년의 전통을 일시에 팽개치고 외세에 눌려 육식을 하여 조상을 욕되게 했다는 것이다.
육식에 대한 거부감을 해결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였다. 돈가스뿐만이 아니라 여러 음식, 특히 고기를 주재료로 하는 많은 음식이 토착화 과정을 거쳤다. 여기서 당시 일본인의 노력에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그들은 일본음식을 서양식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서양요리를 일본화한 것이다. 쇠고기 된장 절임도 서양 요리의 조리법과는 전혀 다른 완전히 일본풍의 조리다. 쇠고기라는 서양풍의 재료를 가지고 일본식으로 맛을 낸 것이다. 고기를 이처럼 일본식 조미료로 조리하는 발상이 훗날 쇠고기 전골에 응용되었는지도 모른다.
돈가스가 등장한 것은 '드라마'와 같다. 육식을 해금한 1872년 이후 돈가스는 60년 가까이 지난 1929년이다. 쇠고기 전골이 스키야키로 바꾸던 무렵부터 육식에 대해 서민들이 느끼던 저항감이 차차 옅어졌다. 60여 년에 걸친 노력 끝에 일본인의 취향에 맞는 돈가스가 탄생했다.
쇠고기에서 닭고기로 그리고 돼지고기로
얇은 고기에서 두꺼운 고기로
유럽식의 고운 빵가루에서 일본식 알갱이가 큰 빵가루로
기름을 두르고 부치는 것에서 기름 속에 넣고 튀기는 딥프라이로
접시에 돈가스만 담던 데서 돈가스에 서양채소인 양배추 채를 곁들이는 형태로
튀긴 고기를 미리 썰어서 접시에 담아 손님에게 내는 것으로
일본식 우스터소스를 듬뿍 끼얹는 것으로
나이프와 포크가 아니라 젓가락을 써서 먹는 것으로
밥과 같이 먹을 수 있는 일식으로
이렇게 바뀌는 데 60년이 흐른다. 외국음식을 흡수하고 동화하기 위해 이런 집념을 보인 나라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만큼 독특한 음식문화다.
돈가스라는 말은 프랑스어 '코틀레트'에서 유래되었다. '코트'는 송아지나 양, 돼지의 뼈에 붙은 등심과 등심 형태로 자른 고기를 말한다. 영어로는 '커틀릿(cutlet)'인데, 송아지나 양고기의 뼈에 붙은 고기에 소금과 후추를 뿌린 후 밀가루, 달걀노른자, 빵가루를 입혀서 프라이팬에서 버터로 양면을 갈색이 되게끔 구운 것이다. 이 커틀릿을 일본에서는 가쓰레쓰라고 불렀다. 소고기와 닭고기를 재료로 쓰는 비프 가쓰레쓰와 치킨 가쓰레쓰이다. 그 후 등장한 돼지고기를 재료로 하는 포크 가쓰레쓰가 돈가스의 전신이 된다. 후일 두툼한 고기로 만든 돈가스가 탄생한다. 돼지를 뜻하는 돈豚과 영어의 커틀릿이 합쳐진 이름으로 정착되어 일본의 대표적인 양식이 되었다.
당시 일본인은 서양 콤플렉스에 빠져 있어서, 서양의 식사는 오랜 옛날부터 근대화되어 있었던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일으키기 불과 백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서양인들은 나이프나 포크도 없이 음식을 손으로 집어서 먹었다. 서양의 서민들이 나이프와 포크, 스푼을 쓰기 시작한 것은 고작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일본인은 유럽 문화를 섭취하려고 너무 서두른 나머지 그 장단점이나 일본에 적합한지 아닌지를 검토하지 않고 실행해버린다. 낡은 것은 뭐든지 버리고 돌아보지 않으며, 수백 년 동안 좋다고 여겨온 풍속 습관에는 반드시 무언가 뛰어난 것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오래가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_모리 린타로
저자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일침을 가하는 말이다."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꼭 일본인에게만 국한된 말은 아니다. 100여 년이 지난 지금의 한국인과 한반도를 생각한다면 '우리'만이 아닌 우리에게도 일침을 가하고 있다.
덧_
《돈가스의 탄생 - 튀김옷을 입은 일본 근대사》, 오카다 데쓰, 뿌리와이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