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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아직 끝나지 않은 세계다

책이란 무엇인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by 비루장

우리는 책을 너무 쉽게 소비한다.

때로는 너무 가볍게, 때로는 너무 무겁게.

책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왜 읽는지,

무엇이 우리를 책 앞으로 이끄는지

다시 묻고 싶었다.


책은 혼자 존재할 수 없다.

누군가 읽어야만 존재한다.


아무리 빛나는 사상도, 절박한 고백도, 치밀한 서술도,

독자가 열지 않으면 책은 단지 인쇄된 종이 더미에 불과하다.


써졌으나 읽히지 않는 책은 실재하지 않는다.

내가 읽지 않은 책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책이다.

읽는다는 행위를 통해서만 책은 세계에 발을 디딘다.

그리고 그 세계는 독자마다 다르게 열린다.




책은 태양이 되기도 하고, 암흑이 되기도 한다.

책의 가치는 책 자체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

읽는 사람의 사고와 경험, 축적된 삶에 따라

같은 책도 다른 빛깔로 피어난다.


아무리 유익한 책이라도 그 반은 독자가 만든다.

책은 독자 안에서 다시 쓰여야 한다.

한 권의 책은 수백, 수천 가지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다.


읽는 사람만큼이나, 읽는 순간만큼이나,

책은 무한히 새로워진다.




그렇기에 우리는 책을 고를 때 신중해야 한다.

인생은 저질의 책을 읽기엔 너무 짧다.


삶이란 본래 짧고,

그중에서도 고요히 사유할 수 있는 시간은 더욱 드물다.

우리는 그 얼마 안 되는 시간을

가치 없는 책에 허비해서는 안 된다.


좋은 책을 고른다는 것은 좋은 친구를 고르는 것과 같다.

가벼운 인연에 흔들리지 않고,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를 고르는 일이다.




어떤 사람은 유명한 이름만을 좇아 책을 선택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이름난 사람의 것이라면 무엇이든 찬미한다.


그러나 책은 남을 위해 읽는 것이 아니다.

오직 나를 위해 읽는 것이다.

남의 권위에 기대지 않고,

나 자신의 감각으로 책을 고르고 읽어야 한다.


읽지 않은 책은 남의 것이다.

읽은 책만이 내 것이 된다.




지금 당장 읽지 않더라도 사두라.

읽을 책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산 책 중에 읽는 것이다.


어떤 책은 우리 안의 무언가가 자라날 때까지 조용히 기다린다.

시간이 지나 다시 펼쳤을 때,

비로소 그 책이 왜 거기 있었는지 알게 된다.




책은 헌 것에서 새것을 발견하게 한다.

먼지 쌓인 어제의 책을 꺼내라.

새것의 단서는 늘 헌것에 있다.


오래전에는 낡아 보였던 문장이

어느 날, 삶의 어느 지점에서 새롭게 빛나기 시작한다.


진정으로 훌륭한 책은 우연히 만나지지 않는다.

우리는 늘, 오래도록 준비한 만큼의 책을 만나게 된다.




좋은 책은 또 다른 좋은 책을 부른다.

닫힌 책은 스스로로 끝나지만,

열린 책은 다른 책으로 길을 열어 준다.


한 권의 책이 끝나면 새로운 질문이 생기고,

또 다른 문이 열린다.

책은 책을 낳는다.

읽는 이의 세계는 그렇게 넓어진다.




책은 답을 주지 않는다.

길을 보여줄 수는 있어도, 대신 걸어줄 수는 없다.


‘이 책을 읽으면 부자에 대해 알 수 있다’라고 말하는 책은

나쁜 책이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야 부자가 된다’고 말하는 책은

나쁜 책이다.


책은 우리를 성공시키지도, 구원하지도 않는다.

다만 질문을 남긴다.

그 질문을 오래 품고 살아가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나는 어느 날 책꽂이에서 한 권을 꺼내 읽었다.

그리고 다시 꽂아놓았다.

겉으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미 조금 전의 내가 아니었다.

책은 그렇게 소리 없이 우리를 바꾼다.

거대한 감동이나 명백한 전환이 아니라,

단 하나의 문장이 우리의 결을 달라지게 한다.


책은 그리하여 우리를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다른 방향으로 이끈다.




책은 인간 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열망을 품고 있다.

책만큼 이상한 물건도 없다.


책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 의해 인쇄되고,

읽지 않는 사람에 의해 팔리며,

이해받지 못한 채 장정되고 검열된다.

때로는 그 책을 쓴 이조차도,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문장을 엮는다.


만들어진 책의 절반은 팔리지 않고,

팔린 책의 절반은 읽히지 않는다.

읽힌 책의 대부분조차 오해되고 소모된다.


책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열망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책을 읽는다.

누군가는 책을 만든다.

다시, 책을 읽는다.

이 모든 실패를 끌어안으면서도 우리는 계속한다.




좋은 책을 읽는다는 것은

과거의 가장 훌륭한 사람과 대화하는 일이다.

그들은 이미 세상에 없지만,

그들의 사상과 영혼은 여전히 책 속에서 살아 숨 쉰다.


책은 시간을 넘어서는 대화의 방이다.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가 함께 앉아 사유하고 이야기하는 공간이다.




책이란 무엇인가.


책은 실패다.

그러나 가장 숭고한 실패다.


책은 질문이다.

책은 가능성이다.

책은 기억이다.

책은 생명이다.

책은 문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이렇게 말하는 일이다.


나는 아직 생각하고 있다.

나는 아직 변할 수 있다.

나는 아직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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