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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루장 Jul 23. 2021

아픔의 감정과 시간을 공유하다

암은 언제나 진단이 아니라 선고이다

암은 언제나 진단이 아니라 선고이다.


“암환자가 된 그날 밤, 난 잠들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암은 환자에게 선고한다. 늘 우리에게 차근차근 알려주지 않는다. 언제나, 누구에게나 뒤통수를 친다. 선고宣告란 선언宣言하여 널리 알리는 것이다. 왜 하필이면 선고라 할까. 우리는 의사가 전달하는 암 선고를 받아들여야만 하는가. “암은 언제나 진단이 아니라 선고이다.” 암은 진단의 성격을 지닌 것이 아니고 선고의 성격을 지닌 강제적 침략자이다. 암은 침략적이며 안에서부터 나를 파괴하는 낯선 공격자이다. (〈가상현실〉, 김영무)


암환자가 되는 건 예고가 없다. 정말 거짓말처럼 찾아왔다. 암이란 놈은 뒤늦게 확인해서 알았을 뿐, 이미 오래전부터 몸속에서 똬리를 틀고 몸집을 키우고 있었다. ··· 이 모든 게 암 때문이다. 멀쩡하던 하루아침에 세상과 떨어져 병원에 격리되어 불에 타는 듯한 항암주사와 먹으면 죽을 만큼 쓰디쓴 약물에 푹 담겨 절었고, 고립감과 우울증에 고통받는 건, 모두 빌어먹은 저 암 때문이다. ··· 침략자처럼 다가온 암이란 놈은 생활을 바꾸어 놓았다.


패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싸우지 않을 수 없다.


암과 투병 중에 〈생존을 위한 연도〉를 만들었던 여류 시인 오드리 로드는 “싸우는 것은 옵션이 아니다. 패배할 수 있다. 그러나 싸우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 사랑하는 아내, 아들과 자신을 위하여 암과 치열하게 싸운다. 그럼에도 원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암 때문이다. 하루아침에 세상과 떨어져 병원에 격리되어 불에 타는 듯한 항암주사와 먹으면 죽을 만큼 쓰디쓴 약물에 푹 담겨 절었고, 고립감과 우울증에 고통받는 건, 모두 빌어먹은 저 암 때문이다. ···


암에 대한 원망이 익숙해지고, 수술 전에는 수술만 잘 끝나면 다행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수술 후 눈을 뜨고 “살았구나”라는 안도도 잠시 통증과 불편함에 죽을 것만 같았다. 수술에서 깨어나고 숨을 쉴 때마다 전신이 욱신거리고 힘들었다. 죽을 것 같지만 살아있다는 안도감에 아픔과 미소가 교차했다. 수술 후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에 발을 딛는 순간, “정말 살았구나”라는 안도감에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살았구나. 세상이 달리 보인다. 정수기의 물맛도, 볼을 스치는 겨울바람도.


항암의 ‘두려움’이 걷히니 바로 찾아오는 건 무섭도록 시린 ‘외로움’이다. 이 외로움은 누군가 없는 부재의 외로움이 아니라 이 세상에 나 혼자만 아픈 것 같은 억울함이 가슴에 차곡차곡 쌓이는 것 같은 울분에 찬 서러운 외로움이다. 왜 나에게만 이런 시련이 오는 것인지, 나 혼자 세상에 떨어진 느낌이다. 커다란 지구에 나만 있는 것 같은 외로움에 몸을 떨었다.


가장 소중한 보물은 오늘이다.


암환자에게 ‘회복’이란 암에 걸리기 전과 같은 건강한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몸에 암이 발병한 이상 생生에서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는 걸 몸으로 알 것 같다.


데이터 요금제를 무제한으로 바꾸고, 유튜브를 프리미엄으로 가입했다. 뮤직채널을 광고 없이 들을 수 있다. “시간으로 돈을 보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고, 현명한 사람은 돈으로 시간을 산다.”라고 했다. 부자가 별거인가. 돈을 써서라도 시간을 벌 수 있다면,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면 부자가 아니겠는가. 약간의 돈으로 시간낭비와 스트레스를 줄였다. 돈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다. ···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인간에게 매우 소중한 가치다. 한 번의 술값으로 한 달 동안 쓸데없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얻었다.


살아 있다. 그래서 행복하다.


새 양복을 사 입는 이유가 있다면 그 이유는 딱 하나다. 살아 있음을 쇼핑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새 양복을 입고 다시 옛날처럼 살아내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싶었다.


인생이라는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짧은지 깨달았다. 인생은 말 그대로 ‘찰나의 순간’이다. 이제라도 남은 인생을, 오늘 지금 이 순간을 최대한 밀도 있게 만끽하며 살아야겠다. “인생은 인생일 뿐, 난 내일 죽을 것처럼 살겠다.” 지금 쇠털같이 많은 1만 여일 동안 가슴에 품고 살아갈 한마디다. 인간은 자신이 행복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므로 불행한 것이다. 지금 살아 있다. 그래서, 행복하다.


아픔의 감정과 시간을 공유하다.


“죽음을 인식하면 본질만 남는다.”라는 잡스의 말처럼 매일 반복되는 괴롭고 힘든 회복 과정을 겪다 보면 이제껏 중요하게 생각했던 세상의 것들이 사실은 별것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신기하게도 환자가 되면 큰 바람은 없다.


투병하면서 가장 힘든 것은 통증과 외로움이었다. 난생처음 겪는 고통의 시간일지라도, 그로 인한 다양한 감정과 경험을 누군가와 공유한다면 투병도 그럭저럭 견딜만한 일이었다. 투병하면서 겪은 다양한 감정을 공유한다면, 나는 물론이고 다른 환자에게도 동병상련의 공감을 가족과 지인에게는 환자의 마음을 이해하는 조그마한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환자의 마음을 이해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다


가족 중에도 암 선고를 받은 이가 있었다. 마음이 어떠한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해한다고 생각하지만, 정말 이해하는 것인지 늘 의문이었다. 내 중심으로 바라보고 이해했다고 스스로를 위해 위안한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가족과 지인에게 환자의 마음을 대신하는 고백이었으면 하는 바람을 말하지만, 그보다 환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지금은 완치되었지만, 암 선고를 받았던 저자의 고통과 외로움을 환자 가족의 한 사람으로서 조금 더 다가갈 수 있었다. 그럼에도, 암 선고를 받은 사람의 절망과 외로움을 같은 크기만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아주 조금, 조금만이라도 이해한다고 말하고 싶다. 이 책이 나를 한 발자국 다가서게 해 준다.



덧_

김은섭,《아프지만 책을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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