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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마지막 부분부터 읽어보자

by 비루장

책을 읽는 데에는 정해진 법칙이 없다. 누구도 앞에서부터 차례대로 읽어야 한다고 정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늘 첫 장을 펼친다. 표지를 넘기고, 목차를 훑고, 서문을 지나 1장을 시작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절차처럼 생각한다. 익숙한 질서가 안정감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은 이 질서를 깨뜨려도 좋다. 책의 마지막 부분부터 읽는 것이다. 이 작은 일탈은 독서 경험을 전혀 다른 차원으로 바꾸어 놓는다.


책의 마지막 장은 단순한 끝맺음이 아니다. 많은 경우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의 압축이며, 앞서 펼친 논의 전체를 응축한 결정체다. 특히 인문학이나 철학, 사회과학 서적에서 마지막 장은 결론이자 선언문에 가깝다. 이를 먼저 접하면 책의 앞부분은 단순한 정보의 나열이 아니라 그 결론을 향해 쌓아 올린 논리의 단계로 새롭게 보인다. 처음부터 읽을 때는 발견하기 어려운 연결고리와 논증의 흐름이 도드라지게 드러난다.


철학자의 저술을 떠올려 보자. 데리다나 푸코 같은 학자의 글은 때로는 난해하게 흩어진 주장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마지막 장에서 저자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먼저 확인하면, 앞선 장은 그 방향을 향한 작은 길목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혼란스럽던 문장이 하나의 흐름 속에서 정리되는 것이다. 결론을 알고 읽으면 ‘따라가는 독서’에서 ‘해부하는 독서’로 바뀌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소설의 경우에도 마지막을 먼저 보는 일은 흥미로운 변화를 가져온다. 물론 추리소설이나 반전이 핵심인 작품에서는 긴장감을 잃을 수 있다. 그러나 결말을 미리 알았다고 해서 이야기가 주는 매력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독자는 저자가 결말을 어떻게 준비해 왔는지를 되짚으며 읽게 된다. 복선과 암시, 상징이 어떤 방식으로 깔려 있었는지, 등장인물의 대사 하나가 어떻게 결말과 연결되는지를 탐색하는 재미가 생긴다. 이는 마치 미리 해답을 알고 문제를 푸는 과정처럼 보일 수 있지만, 오히려 텍스트에 숨어 있는 정교한 장치를 더 깊이 음미하게 만든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만화책이나 동화책을 읽을 때 마지막 장면을 먼저 펼쳐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해피엔딩인지, 주인공이 살아남는지, 사랑이 이루어지는지를 확인한 뒤에야 안심하고 앞부분을 읽어나가곤 했다. 그것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독자로서의 불안감, 혹은 이야기에 과도하게 휘말리지 않으려는 방어적 태도였다. 성인이 된 뒤에도 우리는 여전히 책을 그렇게 대할 수 있다. 결말을 알고 시작하면 독서는 조금 더 여유롭고 분석적으로 변한다.


마지막 부분부터 읽는 습관은 책의 성격에 따라 다르게 작동한다. 에세이나 자기 계발서처럼 메시지가 명확한 책에서는 결론을 먼저 보는 것이 방향을 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저자가 끝에서 독자에게 전하려는 조언이나 통찰을 확인한 후 앞부분을 읽으면, 그 과정은 단순한 조언의 나열이 아니라 하나의 논리적 여정으로 재구성한다.


반면 고전 문학이나 장편소설에서는 결말을 먼저 본다고 해서 독서의 즐거움이 크게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결말을 아는 상태에서 읽을 때, 작가가 그 결말을 어떻게 준비하고 서서히 독자를 이끌어가는지에 주목하게 된다. 마지막 장면을 미리 알고 있다면, 앞부분에서 주인공의 불안과 갈등이 어떻게 점차 고조되는지를 더 세밀하게 따라가게 된다. 결말은 스포일러가 아니라 해석의 방향타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마지막을 먼저 읽는 일은 단순히 ‘남들과 다르게 읽어본다’는 호기심의 차원을 넘어서, 독서라는 행위 자체를 확장한다. 우리는 보통 책을 ‘이야기를 따라가며 즐기는 것’으로만 이해하지만, 때로는 ‘저자의 구조와 의도를 분석하는 것’으로 전환할 수도 있다. 마지막 장을 먼저 읽는 행위는 바로 그 전환의 계기가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독서가 저자의 질서만을 따르는 행위가 아니라는 점이다. 책은 저자가 썼지만, 읽는 방식은 전적으로 독자의 몫이다. 우리는 앞에서부터 읽으라는 강제 규칙에 순응해 왔을 뿐, 사실은 어디서부터 읽든 상관없다. 어떤 이는 중간부터 펼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마음에 드는 한 구절만 반복해서 읽기도 한다. 독서는 기본적으로 자유로운 행위이며, 마지막부터 읽는다는 작은 일탈은 그 자유를 확인하는 순간이다.


책은 한 번 읽는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두 번째, 세 번째 다시 읽을 때마다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마지막을 먼저 읽는다는 것은 어쩌면 재독의 감각을 미리 체험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결말을 알고 나서 다시 책을 읽으면, 텍스트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저자가 던진 사소한 문장이 결론의 단초로 읽히고, 지나쳤던 장면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이는 단순히 책의 내용을 아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책을 다시 읽는 힘, 다른 각도로 보는 힘을 길러준다.


가끔은 마지막 장을 펼쳐보라. 그것이 독서의 규칙을 무너뜨리는 일 같아 보일지라도, 그 순간 책은 전혀 다른 세계로 열린다. 주어진 순서를 따르지 않겠다는 작은 반항이 독서의 자유를 더욱 넓힌다. 마지막을 먼저 읽을 때, 책은 새로운 얼굴을 보여주고 독자는 새로운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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