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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터파머 DataFarmer Sep 30. 2024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2024. 09.29  #worship ##wooridle

하루를 시작할 때 드리는 작은 습관과 행동이 나를 살리고, 또한 그분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다는 말씀에 감사한 한 주를 시작한다. 누군가에게 기쁨이 되는것은 뿌듯하기도 하고 보람이 있다. 나는 그분의 사람이고 싶다.



제목 : 하나님의 사람

말씀 : 왕하 13:19~25 (김양재 목사님)


내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있나요? 언제나 내편인 사람, 부르면 달라올 수 있는 사람, 배신하지 않을 사람이 있나요?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내 사람 찾기보다는 우리 자신의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기억해야 합니다. 신명기에 처음으로 하나님의 사람은 모세이고, 마지막은 디모데 후서에 예수 믿는 모든 성도라고 쓰여있습니다. 평범하기 그지 않는 모든 성도가 하나님의 사람인 것입니다. 가장 특별하고도 평범한 호칭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불린 사람은? 엘리사입니다. 엘리야에게는 7번이나 엘리사에게는 29번으로 쓰였습니다. 갑절의 영감을 구한 엘리사의 마지막 사역을 보며 하나님의 사람을 살펴보겠습니다.


1. 마자막까지 거룩한 분노로 양육합니다.

19절, 하나님의 사람이 노하여 요아스 왕에게 대여섯 번을 칠 것이니이다 하며 그리하였으면 아람이 진멸하기까지 그쳤을 것이라 하며, 이제는 세 번만 치라고 합니다. 자기 생각으로 가득한 요아스를 보면서 애통하다 못해 화가 나는 것입니다

화살로 땅을 치라고 했으면 그냥 치면 되는데, 왜 3번만 치고 마음대로 그쳤냐는 것입니다. 가족의 운명, 나라의 운명이 달린 일이고 요아스 개인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아합 집에 이어서 예후의 집을 사로잡고 있는 죄를 향한 거룩한 분노를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편에 서서 분노하는 것입니다.

세 번만 참으면 되는 것인가요? 조금 더 5~6번 참아야지 하는 것입니다. 이혼하면 안 되고, 사표 내지 말라하고 마지막 사역하며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구원 때문에 살아도 죽어도 영광을 돌리며 가는 것이니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요아스는 하나님이 주셨다는 뜻인데, 하나님은 구원이시라는 엘리사가 마지막까지 양육을 해도 구원의 확신을 가지 못한 왕이었습니다. 나에게 피해가 손해가 생기는 것에 대한 본능적인 감정은 분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감정 폭발이 아니라 거룩한 분노는 항상 죄가 대상입니다. 죄에 대해 분노하는 사람이 곧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이것은 구원에 대한 애통입니다.

하나님도 남유다를 위해 기도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분노입니다. 사람은 구원해야 할 대상이고, 그 사람의 죄에 대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양육은 주님의 말씀으로 하는 것이니 주님은 양육자와 양육받는 자 모두를 키워가십니다.

(적용 질문) 요즘 무슨 일로 누구에 대해 화를 냅니까? 죄악에 대한 거룩한 분노입니까? 내 손해에 대한 감정적인 분노입니까? 거룩한 분노로 끝까지 마치겠습니까?


2. 죽어서도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엘리사가 14절에 죽을병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요아스를 양육하고 거룩한 분노를 하다가 그냥 죽은 것입니다. 엘리야는 불수레 불말과 하늘로 승천했지만, 엘리사는 부유한 농장주였고, 엘리야에게 부름을 받았고, 50여 년간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주님을 전했습니다. 엘리야와는 다르게 엘리사는 기적도 더 많이 행하고 힘들게 사역했지만, 그 마지막은 죽을병에 걸려서 죽게 된 것입니다. 엘리사는 불수레, 불말, 금병거가 없더라도, 은병거라도 있어야 하지 않나요?

엘리야는 하늘의 사람 같고, 엘리사는 땅의 사람 같습니다. 엘리사는 아이들에게도 대머리라고 놀림도 받았습니다. 엘리야에게는 어림도 없던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이야기이고 누가 좋고 나쁜 게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엘리야처럼 죽고 싶으세요? 엘리사처럼 죽고 싶으세요? 누구나 엘리야처럼 죽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엘리야보다 갑절이나 넘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불렸습니다. 이것은 구속사적인 메시지입니다. 이들의 발끝도 못한 우리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러주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엘리사는 마지막에 화를 내면서 양육합니다. 엘리사는 마지막까지 이상한 사람이었습니다. 비상식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관심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구속사에만 관심이 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그렇게 요시아에게 화를 내며 가르친 것입니다.

죽는 모습은 예수님도 더 비참하게 보여주셨습니다. 20절에 엘리사가 죽었고, 엘리사가 죽은 것은 이스라엘에게 불행입니다. 엘리자가 죽자마자 바로 도적떼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사람 한 명이 이렇게 큽니다. 바로 엘리사가 나라를 지켜주던 한 사람이었습니다.

도적떼의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던져졌는데, 그 세자가 바로 회생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죽음 같은 상황에서도 낙심,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끊임없이 채워주십니다.

(적용 질문) 엘리야처럼 카리스마가 있고 싶으세요? 엘리사처럼 편한 사람이 되고 싶으세요? 죽을병에 걸렸다면 낫는 것이 소원이겠습니까? 가족이 예수 믿는 것이 소원이겠습니까?


3. 언약 때문에 영원한 회복을 누립니다.

22~23절, 하사엘이 항상 이스라엘을 학대했으나, 여호와께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맺은 언약이 있었어서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하사엘의 심판은 다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어떤 학대를 받아도 억울할게 없이 큰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은 언약 때문에 은혜를 베풀고 계십니다. 그래서 엘리사의 뼈에 닿기만 해도 살아나는 것입니다. 생명은 영적, 육적으로도 반드시 지켜야 하고, 결혼도 지켜야 하고, 뼈처럼 말라비틀어져도 절대로 죽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24절 벤하닷이 왕이 되었을 때 요아스가 벤하닷의 손에서 성읍을 다시 빼앗습니다. 요아스게 벤하닷을 3번 쳐서 무찌르고 이스라엘 성읍을 회복했습니다. 엘리사를 통해 주신 약속을 이루어주셨습니다. 언약 때문에 이스라엘 성읍을 회복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회복이라는 말을 듣기만 해도 좋아합니다. 이 땅에서 손해 본 것을 회복하는 걸 좋아합니다. 요아스도 성읍을 회복했지만 100년도 안되어서 다 없어집니다. 이 땅에서 회복이 목적이면 안됩니다.

회복이나 회개는 기본적으로 돌아오는 게 히브리어 슈브로 돌아오다는 동사로 같은 뜻이지만, 잃어버린 성읍을 회복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돌려주시는 것인데,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회복은 무엇일까요? 왜 약속과 언약을 지키실까요? 그것은 우리를 돌이키기 위함입니다. 돌이키는 것이 회개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회복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회개이며, 그것이 부활로 돌아가는 회생입니다.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의인 아흔아홉 명보다 더 기쁘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회개를 가장 기뻐하십니다. 아무리 좋은 것 회복해도 다시 잃어버립니다. 이 땅에는 영원한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영혼의 회개를 하나님이 간직하시고,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요아스는 3번만큼만 회복했습니다. 이런 일시적인 회복이 말고 영원한 회복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창한 순종이 아니라 화살을 5번 6번 치는 것이 무엇인가요? 주님을 만났으면 하나님 나라의 매뉴얼이 있는데, 그날부터 천국 가는 그날까지 말씀을 보는 것입니다.

성경이 언약이고 내 죄를 알려주기 때문에 우리는 그 회개, 영원한 회복을 위해서 큐티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1년 동안 같은 사건이 생각나더라도 빠지지 않고 하는 것이 중요하고, 마지막에는 다음날에는 꼭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이제 나 큐티했다 하는 것입니다.

큐티노트에는 돈, 결혼, 시어머니, 시누, 아버지 등 그날그날 떠오른 것을 써놓으면 됩니다. 안 하는 것보다 천 번 낫습니다. 양심상 본문은 한번 읽으면 됩니다. 이렇게 말해도 큐티를 안 한다면 일시적으로 여러분에게 복을 주셔서 3번은 주셔도, 이후에는 완전히 망할 수 있습니다.

환난이 주제가 되고, 성경이 교과서가 되고, 성령님이 교사가 되어서 도와주셔야 깨닫고 적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큐티를 하면서 깨달음, 적용, 이게 우상이구나 하면서 고백하며 가야 합니다. 택한 사람은 그래도 이 말을 다 알아듣습니다.

주님은 절대 떡을 주라고 할 때, 돌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적용을 하면서 하는 그 고백이 적용을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예뻐하십니다. 이개 회개의 구체적인 훈련입니다.

(적용 질문) 나는 일시적인 회복을 바랍니까? 영원한 회복을 바랍니까? 영원한 회복은 회개이고, 회개의 실체는 날마다 큐티하는 것이란 것이 인정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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