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나는 지금도 2016년 3월, 세계 바둑계를 뒤흔든 한 장면을 선명히 기억한다.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국 1국에서, 이세돌이 알파고의 수에 대해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이내 “이건 실수야”라고 말하던 그 순간이다. 인간이라면 절대 두지 않을 그 수를 그는 ‘놀림’이라 여겼고, 당연히 AI가 실수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다. 실수가 아니었다. 2국에서 알파고는 다시 한번 예측 불가능한 수를 뒀고, 이세돌은 말한다. “왜 두는지 모르겠는데, 대단하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 수는 승리를 향한 방향이었다. AI는 승률을 기준으로 둔다. 인간의 직관과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바둑은 명확하다. 이기고 지는 결과가 존재한다. AI가 제시하는 수는 인간이 도달하지 못한 영역을 가리키고 있었고, 우리는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결국 받아들였다. “그게 맞다”라고. 이것이 바로 AI 시대의 시작점이었다. 논리로 이해되기보다는, 결과로 증명되는 시점.
이제 질문은 다음 단계로 옮겨간다. 바둑처럼 명확한 승패가 존재하지 않는, 예술과 창작의 세계에서 AI는 어떤 역할을 하게 될까? 음악, 소설, 영화처럼 주관성과 감성의 영역이 지배하는 분야에서도 AI는 그 존재감을 넓혀가고 있다.
초기의 반응은 바둑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무리 좋은 곡, 인상적인 소설, 감동적인 영상이 나와도 그것이 AI의 산물이라면, 사람들은 선뜻 받아들이지 않는다. “브랜드”의 문제다. 작곡가가 AI라는 사실만으로 평가가 깎인다. 그러나 블라인드 테스트를 해보면 결과는 또 다르다. 누가 만들었는지 모를 때, AI가 만든 창작물이 더 높은 점수를 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쯤 되면 인간은 혼란에 빠진다. 이 곡이, 이 이야기가 AI가 만든 것이라니? 분명 감동했고, 좋다고 느꼈는데, 알고 나니 낯설다. 바둑의 ‘이해는 못하지만 맞는 수’처럼, 창작물도 ‘이해는 못하지만 좋다’는 감상이 따라붙는다. 이는 일종의 초현실적 체험에 가깝다. AI의 창작은 인간의 논리와 감성의 틀을 넘어서는 지점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AI는 단지 도구가 아니다. 새로운 방식의 ‘창조자’다. 인간의 상상력을 확장시키고, 때로는 도전한다. 이해를 강요하지 않고, 단지 결과로 말한다. 바둑에서 승률로, 창작에서 감동으로.
우리는 지금, 이해보다 수용이 먼저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것이 AI의 미래이며, 결국은 인간이 자신의 고정된 사고와 한계를 깨는 계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