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널 브랜딩을 왜 해야 하나요?

내가 나로 살아남기 위한 철학적, 현실적 선택

by Bite

자신을 소개해달라는 요청 앞에 말문이 막혔던 경험, 누구나 한 번쯤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명함 속 직함과 소속, 누군가의 가족이나 친구라는 관계의 언어로 잠시 그 자리를 모면한다. 하지만 이내 깨닫는다. 세상이 붙여준 이름표를 모두 떼고 나면, ‘나’라는 사람을 설명할 단어가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말이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를 규정하려 든다. 직업, 관계, 타인의 시선 속에서 맡아야 할 역할을 부여하고, 우리는 그 틀 안에 자신을 맞추는 데 익숙해졌다. 그러나 문득, 그 모든 정의가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과연 누구로 불리고 싶은가?” 이 글은 바로 그 질문에서 시작한다.


내 이름의 주인으로 살고 싶다는 열망과 달리, 우리는 사회가 설계한 코드 속에서 살아간다. 타인이 나를 어떻게 인식하는지가 내가 누구인지보다 중요해지는 시대. 우리는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삶을 꿈꾸며, 어떤 가치를 믿는지보다, ‘나’ 아닌 것들로 나를 증명하며 살아간다.


이제 외부가 아닌, 내 안의 언어로 나를 정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더 나아가, ‘나’라는 존재에 머무르지 않고 고유한 가치를 통해 하나의 브랜드로 성장하며, 나와 닮은 사람들과 느슨한 연대를 이루는 커뮤니티를 일구는 삶.


정체성은 막연한 감정이나 신념이 아니다. 그것은 생각의 논리와 감정의 패턴, 가치의 기준이 정교하게 얽혀 당신을 움직이는 하나의 의사결정 기준이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기준으로 작동하지만, 대부분 그 기준을 직접 설계하지 않았다. 사회가 만들어준 틀을 기본값으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자신을 조정하며 살아갈 뿐이다. 그 상태로는 결코 온전한 ‘나’로 기능할 수 없다. 이름은 남지만, 삶의 주도권은 사라진다.



Identity

‘아이덴티티(Identity)’의 어원은 라틴어 ‘idem’, 즉 ‘같음(sameness)’에서 출발했다. 본래는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나’라는 동일성을 의미했다. 하지만 이 단어는 점차 ‘나를 타인과 구분 짓는 고유함’이라는 차이의 언어로 진화했다. ‘같음’에서 ‘다름’으로의 확장. 이는 단순히 단어의 의미 변화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을 인식하는 방식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이기도 하다.


우스갯소리 같지만, 한때 유행했던 “내가 만약 벌레로 변하면 어떻게 할 거야?”라는 질문은 정체성의 핵심을 찌른다. 중요한 것은 사랑의 지속 여부가 아니라, “당신이 흉측한 벌레로 변했는데도 내가 당신인 줄 어떻게 알아볼 수 있는가?”라는 관점이다. 모습이 변해도 여전히 ‘같은 당신’임을 증명하는 무언가, 그것이 바로 정체성의 출발점이다.


과거 동양에서 ‘나’는 관계 속의 조화로 정의되었다. ‘인간(人間)’이라는 한자처럼, 우리는 사람 사이의 존재였다. 반면 서양의 근대는 자아를 독립된 주체로 보았다.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기에 존재하는 ‘나’를 발견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그 두 세계관의 경계에 서 있다. 관계 속의 나는 안정적이지만 희미하고, 독립된 나는 분명하지만 외롭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서구 사상의 유입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온라인 환경이 관계의 물리적 한계를 허물어뜨린 것이 결정적이었다. 과거에는 가정, 학교, 사회처럼 주어진 공동체에 수동적으로 소속되었지만, 이제 우리는 시간을 함께 쓰고, 대화를 나누고, 가치를 공유할 사람을 능동적으로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삶을 바꾸는 세 가지 요소, ‘쓰는 시간’, ‘함께하는 사람’, ‘사는 공간’ 중에서 공간을 제외한 두 가지를 온라인을 통해 스스로 설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무한한 자유 속에서 우리는 오히려 길을 잃는다. 누구와 연결되고 싶은지, 어떤 가치를 따르고 싶은지조차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내 안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연습이 필요하다. 외부의 언어가 아닌, 나만의 언어로 스스로를 정의하는 시도. 이것이 바로 당신의 삶을 움직일 OS를 설계하는 첫걸음이다. 아이덴티티는 당신을 가두는 규칙이 아니라, 당신의 가능성을 확장하고 끊임없이 업데이트하는 시스템의 기준이다. 당신이 이 글을 통해 스스로의 OS를 설계할 수 있다면, ‘나’는 더 이상 설명되어야 할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실행되는 존재가 될 것이다.




위버멘쉬, 스스로 주인이 되는 길


영화 <설국열차>의 마지막, 남궁민수(송강호)는 모두가 열망하던 열차의 맨 앞 칸, 즉 절대 권력 앞에서 예상 밖의 선택을 한다. 그는 서열의 정점을 향한 싸움 대신, 굳게 닫힌 ‘옆문’을 바라본다.


“이런 문이 아니라 저쪽 문을 여는 거야.
오랫동안 꽁꽁 얼어붙어 있어서 벽처럼 생각했는데,
사실은 문이란 말이지.”


이 대사는 단순한 탈출 선언이 아니다. 주어진 체제의 끝에서,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가능성을 열어젖히려는 한 결단이다. 열차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은유이다. 정해진 칸에서 주어진 역할대로 움직이는 세상. 앞으로 가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의 투쟁은 ‘진보’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같은 궤도를 맴도는 영원한 회귀일 뿐이다. 남궁민수는 그 순환의 고리를 깨닫고 ‘앞으로 가는 것’의 무의미함을 직시한다. 그가 본 것은 끝이 아니라, 경계를 벗어나는 ‘탈주선’이었다.


니체의 위버멘쉬(Übermensch)는 바로 이런 인간이다. 신이 죽고 모든 절대적 가치가 사라진 시대, 그는 외부의 권위에 기대는 대신 스스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한다. 남궁민수는 생존을 보장하는 열차의 질서를 거부하고, 죽음이 기다릴지 모르는 미지의 바깥세상을 택한다. 이는 생존을 넘어, 자신의 존재 의미를 스스로 선택한 위대한 자유의 행위다. 그는 체제가 결코 규정할 수 없는 인간의 가능성을 증명한다.


우리가 던졌던 첫 질문, “나는 누구로 불리고 싶은가?”는 결국 니체의 질문과 맞닿아 있다. 우리 삶의 의미를 보증해주던 외부의 낡은 신들 ‘사회가 정해준 역할’, ‘조직이 부여한 직함’, ‘타인의 기대’ 이 모두 힘을 잃은 지금, 우리는 거대한 공백 앞에 서 있다.


이 공백 앞에서 인간에게는 두 갈래 길이 놓인다. 하나는 사라진 신을 대신할 새로운 우상, 즉 유행, 더 많은 ‘좋아요’, 사회적 성공이라는 허상을 좇으며 안락함에 안주하는 ‘마지막 인간(The Last Man)’의 길이다. 다른 하나는, 모든 기준이 사라진 폐허 위에서 완전한 자유를 발견하고 자기 자신이 새로운 기준이자 가치의 창조자가 되기로 결심하는 길이다. 니체는 이 길을 선택한 인간, 즉 자신의 의지로 삶을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빚어내는 자를 ‘위버멘쉬’라 불렀다.


안락함에 안주하는 ‘마지막 인간’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고독하고 험난하더라도 스스로의 주인이 되는 길을 갈 것인가. 우리는 위버멘쉬가 되어야 한다. 삶이라는 거대한 질문 앞에, 타인의 답을 베끼는 대신 자신만의 답을 창조하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위버멘쉬는 “나의 이 삶을 다시 한번, 그리고 무수히 반복해도 좋은가?”라는 영원회귀의 질문 앞에 한 치의 후회 없이 “그렇다!”라고 외치는 사람이다. 그의 모든 선택은 타인의 인정이 아닌,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서 끌어올린 고유한 가치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버멘쉬라는 거대한 비전은 단번에 도달할 수 있는 목표가 아니다. 그 위대한 여정의 첫걸음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세상의 흐름에 떠밀려 가는 객체이기를 멈추고, 내 삶의 운전대를 스스로 쥐겠다고 결심하는 데서 시작된다. 세상이 정한 규칙을 따르는 대신, 자기 삶의 규칙을 세우고 자신의 의지로 길을 만드는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단독자로서의 삶


앞서 말한 위버멘쉬의 길이 관념적인 이상처럼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그 철학을 가장 현실적인 생존의 문제로 가져와야 한다. 스스로의 주인이 되는 삶, 그것은 철학적인 결단으로 보이지만 동시에 이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온전히 ‘나’를 되찾기 위한 가장 구체적인 실천이다. 그 실천적 인간상을 ‘단독자’라 부른다.


철학에서 단독자는 타인이나 사회의 규범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고유한 실존을 마주하는 개인을 의미한다. 이는 단순히 외로운 존재가 아니라, 외부의 어떤 권위에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판단과 의지로 서는 주체적인 인간상을 가리킨다. 특히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단독자를 신 앞에 선 개인으로 묘사하며, 집단 속에 자신을 숨기지 않고 주체적으로 결단하는 존재로 설명했다.


이러한 단독자의 개념은 ‘유나바머’의 저서 『더 퍼스트』에서 더욱 첨예하고 현실적인 모습으로 드러난다. 그는 『더 퍼스트』에서 현대 자본주의가 거대한 ‘피라미드 구조’ 위에 세워져 있다고 통찰한다. 우리가 조직 안에서 일을 하고 승진을 위해 경쟁하는 과정 자체가 바로 그 피라미드를 오르는 행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모두가 위를 보고 향하지만 모두 다 같이 위로 올라갈 수는 없다.


그 결과가 부의 분배다. 조직은 결국 가장 많이 일한 개인이 아닌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는 사람에게 가장 큰 부의 분배를 한다. 그건 그가 만든 피라미드이기 때문이다. 거대한 대기업 역시 그 규모가 클 뿐, 개인은 피라미드의 한 칸에 위치하게 될 뿐이다. 유나바머는 진정한 생존이란 남이 만든 피라미드에서 더 높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 피라미드 자체를 벗어나 자신만의 기준으로 새로운 피라미드를 만드는 것임을 역설한다.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작더라도 나만의 피라미드를 만들어 캡스톤이 되는 단독자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이걸 깨닫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앞에서 이야기 했던 명함에는 조건이 붙는다. "내가 이 조직에 남아 있을 때"이다. 퇴사를 하면 내가 그 회사에서 했던 일들은 의미적으로, 포트폴리오로 남을 수 있으나 더 이상 나의 프로젝트가 아니다. 내가 프리랜서로 나와서 그 일들을 내 사업자에 포트폴리오에 넣는 순간 나와 함께 했던 회사와 싸워야 하는 순간이 올 수 있다. 또 그보다 더 차가운 건 그간 나를 봐오던 사람들의 대우가 바뀌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님~님 하며 불러주던 사람들에게 나는 더이상 대우해줘야 하는 사람이 아니다. 개인적인 친분은 있겠지만 그들에게 내가 어떤 쓸모가 있는지는 다른 의미이다. 결국, 내가 했더라도 회사의 이름 앞이 아닌 내 이름 앞에 레코드가 쌓여야 내 것이다.


위버멘쉬가 낡은 가치를 파괴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철학적 인간이라면, 유나바머가 말하는 자본주의에서의 단독자는 그 철학을 자본주의라는 현실 속에서 살아내는 구체적인 인간이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소비자로, 노동자로, 경쟁자로 규정된다. 시스템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욕망을 주입하고, 그 욕망을 채우기 위해 피라미드를 오르라고 속삭인다. 이 속삭임 속에서 ‘나’라는 아이덴티티를 기반으로 삶을 직접 설계하는 작업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다. 타인의 욕망을 나의 욕망으로 착각하며 시스템의 부속품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내 안의 고유한 기준을 따라 나만의 길을 가는 단독자가 될 것인가.


스스로의 아이덴티티를 찾아 그 기준을 기반으로 퍼스널 브랜딩을 하고, 브랜드로 확장하고, 그것을 커뮤니티로 연결하여 시스템을 만든다는 것은, 세상이 정해준 성공의 기준이 아닌 나만의 가치 기준을 세우는 것이다. 무엇이 나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하는지, 어떤 삶이 나에게 의미 있는지 스스로 묻고 답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필연적으로 고독을 동반한다.


모두가 피라미드의 꼭대기를 향해 달려갈 때, 홀로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는 것은 불안하고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 길 끝에서 우리는 비로소 외부의 시스템이 아닌,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스스로를 브랜가 된다는 것은 위버멘쉬, 단독자로서 나의 아이덴티티를 현실 세계에서 실제로 구현하는 행위 그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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