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고은 / 불타는 작품
가보지 못한 세상에 우연이란 상상의 덫을 쳐 보자
도입부에서 눈길을 사로잡았다. 로버트는 <캐니언의 프러포즈> 사진을 빛나게 했다. 상상하지 못한 예상 밖의 상황으로 재미를 주었고, 어디선가 일어나고 있을지 모른다는 확신이 들었다. 난 탐정이 되어 작가가 설치한 덫을 찾아 나섰다. ‘16일 새벽 4시, 그랜드캐니언의 가장 아름다운 절벽에서 프러포즈 한 커플을 찾습니다, <캐니언의 프러포즈>가 <케니언의 실종>으로 불리면서 등장하게 되는 사진작가 로버트.’ 로버트를 알게 된 후 지나가는 개에 눈길이 갔다. 진짜 개가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 경찰관이 힌트 준 파피용이란 단어로 로버트가 어떻게 생겼을지 찾아보았다. 이것 또한 작가의 덫이리라.
주인공 안이지에게 로버트 재단이 연락을 했다. 생계를 위해 도보 라이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중. 배달한 음식이 식었다며 고객이 내민 지도 속에서 그녀는 감정 없는 점에 불과했다. 나도 모르는 길을 갈 때 모바일 지도를 이용한다. 하지만 내가 동그랗고 파란 점이라고 생각해보진 않았다. 작가의 ‘나는 그저 하나의 점, 동그랗고 파란 점’ 이 문장이 담고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 짜 놓은 틀 안에서 벗어나는 걸 불안해하는 나, 모든 상황을 통제하려 했다. 하루를 계획하고 실천해야 마음이 편했다. 내가 좋다고 남편과 아들에게 강요했다. 고객에게 당하는 안이지를 보며 남편이 떠올랐다.
‘어둠의 해변에서 이 세계를 1인치 바꿀 발자국 하나를 찾아 움직이는 로버트’ 로버트 재단의 안내서에 나오는 문장이다. 세계를 바꿀 수 있는 힘 있는 발자국을 남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라는 세계를 바꿀 수 있는 건 나뿐이다. 자신이 직접 가보지 못한 세상이지만 우연이란 상상의 덫을 쳐 보라고 작가는 이야기하고 있다. 격한 상황 속에서 입꼬리 올라가게 만드는 작가의 재치는 윤고은만의 매력이다. 감히 도전할 수 없는 분야지만 윤작가의 작품을 읽다 보면 나의 상상 조각을 짜 맞춰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작품을 불태우면 유명해지리.' 로버트 미술관은 작가에게 무엇을 원했을까. 작가는 로버트 미술관에게 무엇을 원했을까.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과 예술에 대한 열정이 엿보인다. 안이지는 산불을 헤치고 찾아간 로버트 미술관 직원의 안일한 태도에 뾰족한 시선으로 매사를 곱씹는다. 인간과 개의 언어 장벽, 소통의 벽, 예술가의 능력, 계약의 부조리, 권력의 편애. 앞으로 나아가지만 흔들리는 이유는 되새김질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매일 하루를 돌아보고, 한 문장으로 나를 표현한다면 일 년에 365개의 명문장을 만날 수 있다.
작품 속 등장인물의 불편한 상황 안에 내가 서 있었다. 평소 어떤 감정과 말투로 이야기하는지, 남편과 아들이 좋아하는 말투는 무엇인지, 엄마와 아빠의 불안한 감정 기류 사이에서 아들은 어떤 에너지를 소모했을까. 난 모든 걸 놓치고 감지하지 못했다. 책을 읽다 씁쓸한 내 뒷모습에 몇 번이나 멈췄다.
“내가 가볍게 한 말에 사람들이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이런 상황에 초연할 수가 있나? 결국 작업실 벽에 포스트잇을 붙이기 시작했다. 분홍색은 내가 한 번 이상 이미 말한 것, 노란색은 사람들이 말한 것이었다. 며칠 후에는 노란색이든 분홍색이든 큰 차이가 없다는 걸 깨닫고 그런 구분을 그만두게 되었다.”
요즘 말을 하기 전 자기 검열에 빠진다. 이 말이 상대방에게 어떤 온도로 전해질지. 예민한 전차를 밟지만 결국 남는 건 후회뿐이다.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막막하다.
‘로버트 미술관 소각식의 주요 연료는 바로 작가의 마음이라는 것을.’ 어떤 일이든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그 마음을 뜻하는 것일까. 활활 타오르는 불꽃에 내 작품이 뜨겁게 타서 잿더미가 되는 모습을 지켜본다면 어떤 마음이 들까. 득이 있으면 반드시 실이 존재한다. 두 가지를 모두 얻으려 하다간 탈이 날 것이다. 진실과 진짜가 어디에 있는지 소설 속에서 수없이 두리번거렸다. 발트만과 로버트, 대니와 빌, 안이지와 샘이 보여주는 태도에 따라 로버트 재단은 달리 보였다.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혼란스러웠다. 과연 윤고은 작가는 로버트 재단과 불타는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내가 가진 두 권의 책 중 진짜는 무엇일까. 윤고은 작가 사인이 들어간 진짜를 찾아야 했다. 진짜를 찾다가 발견한 뒷면의 2쇄 발행일자가 내 생일이라니. 순간 파란 액자가 말을 건넸다.
“당신을 로버트 미술관으로 초대합니다.”
그제야 책표지의 액자 안이 텅 비었다는 걸 알았다. 왜 처음에는 몰랐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