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 경영혁신학회 36기 하성욱
최근 ChatGPT로 대표되는 AI 기술은 우리 일상 곳곳에 스며들고 있다. 업무 효율을 높이고, 창작을 돕고, 심지어 대화 상대가 되어 주기도 한다. 하지만 AI가 우리 사회의 의사결정 방식 자체를 바꿀 수 있다면 어떨까? 대만의 한 프로젝트가 이 도전적인 질문에 대한 흥미로운 답을 제시했다.
2015년 8월, 대만 정부는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우버(Uber)의 진입을 둘러싼 택시 조합, 우버 기사, 시민들의 갈등이 격화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존 방식대로라면 정부는 이해당사자들의 의견을 듣는 공청회를 열고, 결국 어느 한쪽의 의견을 수용하는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대만 정부는 다른 선택을 했다. 'vTaiwan'이라는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온라인 공론화를 시작한 것이다. 이 플랫폼의 핵심에는 'Pol.is'라는 AI 기반 의견 수렴 도구가 있었다. 결과는 놀라웠다. 1,800명이 넘는 시민들이 참여했고, 결국 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 합의안이 도출되었다.
기존의 여론조사나 설문은 단순히 찬성/반대를 묻는 방식이지만, pol.is는 달랐다. 참여자들의 의견을 AI가 실시간으로 분석하고, 비슷한 의견을 가진 그룹을 시각화 하며, 서로 다른 그룹 간에도 동의할 수 있는 지점을 보여주었다. 초기에는 친-우버와 반-우버 두 그룹으로 나뉘어서 대립하였지만 Pol.is는 양측이 공통적으로 동의하는 지점들을 찾아냈다. ‘정부는 공정한 규제 체제를 수립해야 한다’, ‘개인 승객 차량은 등록되어야 한다’, ‘임대 운전자가 여러 운송 회사나 플랫폼에 소속되는 것은 허용해야 한다’ 등에 대해서는 양측 모두가 긍정적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공통분모를 바탕으로, 최종적으로 거의 모든 참가자가 동의한 7개의 핵심 제안이 도출되었다.
대만정부는 Pol.is를 통해 도출된 합의 사항들을 새로운 규제에 반영했고, 이를 바탕으로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새로운 규제 프레임워크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러한 Pol.is는 어떻게 탄생 할 수 있었을까? 앞으로 어떻게 변화 할 수 있을까?
2009년 금융위기 당시, 정치외교를 전공한 Colin Megill은 사회 시스템의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특히 그는 사회학을 공부하며 깨달은 '집단적 의사결정의 어려움'이라는 문제에 주목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협력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규모가 커질수록 효과적인 소통과 합의가 어려워진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아랍의 봄을 지켜보며 더욱 구체화되었다. 수많은 시민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지만, 그들의 다양한 목소리가 하나의 명확한 요구사항으로 수렴되지 못하는 현상을 목격한 것이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모여 이야기해도, 그 속에서 실제 합의점을 찾아내기는 너무나 어렵다"는 깨달음이었다.
이에 Colin Megill은 기술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시애틀로 이주해 프로그래밍을 배우기 시작했고, 아마존 출신의 개발자 Michael Bjorkegren, 시스템 분석 전문가 Christopher Small과 함께 Pol.is 개발에 착수했다. 그들의 비전은 분명했다. 기존의 여론조사나 온라인 토론이 가진 한계를 뛰어넘어, AI 기술로 수천 명의 의견을 동시에 분석하고 실질적인 합의점을 도출해내는 것이었다.
Pol.is의 특별함은 단순한 찬반 투표를 넘어선 '의견 지도(Opinion Map)' 시스템에 있다. 이는 AI가 시민들의 의견을 실시간으로 분석하고 시각화하여, 복잡한 사회적 갈등 속에서도 합의점을 찾아내는 혁신적인 방식이다.
이 시스템이 작동하는 방식은 흥미롭다. 참가자들이 특정 이슈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면, AI는 각 참가자가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대해 동의하는지, 반대하는지를 분석한다. 이를 통해 AI는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그룹화하고, 이를 시각적인 지도 형태로 보여준다. 참가자들은 이러한 의견 지도에서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그룹들이 어떻게 분포하고 있는지 한눈에 확인 할 수 있다. 마치 넷플릭스가 비슷한 취향의 시청자들을 분류하듯이, Pol.is는 사회적 이슈에 대한 시민들의 입장을 군집화하여 실제로 보여주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시스템이 단순히 차이점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의견 지도의 진정한 가치는 갈등 해결을 위한 실마리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한 예시로, 대만에서 중국 기업 연사의 자바스크립트 컨퍼런스 초청을 둘러싼 논쟁이 있었다. 페이스북에서는 200여 개의 격앙된 댓글이 오가며 소모적인 논쟁만 이어졌다. 하지만 Pol.is를 통한 분석에서는 주목할 만한 발견이 있었다. '초청 찬성'과 '초청 반대' 두 그룹으로 나뉘면서도, "컨퍼런스 주최측의 판단을 존중한다"는 점에서는 양측 모두가 동의했던 것이다. 이처럼 의견 지도는 대립되는 입장 속에서도 실시간으로 업데이트 되며 공통의 기반을 시각화함으로써, 대부분이 동의하는 합의점을 빠르게 도출해서 보여주고 건설적인 대화의 출발점을 제시한다.
이처럼 Pol.is는 AI를 활용해 갈등 속에 숨어있는 합의점을 발견하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수많은 의견이 오가는 복잡한 상황에서도, AI는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공유하는 공통의 가치와 생각을 효과적으로 찾아낼 수 있음을 입증한 것이다.
The Computational Democracy Project(이하 CompDem)은 앞서 설명한 Pol.is 프로그램을 관리하고 운영하고 있는 비영리 단체로, 미래의 민주주의를 설계하는 것을 목표로 운영되고 있다. CompDem은 설립 이후 Pol.is를 통해 이미 세계 각지에서 의미 있는 성과들을 거두고 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5,000명 이상의 시민이 참여한 국가 기후 정책 논의를, 우루과이에서는 16,000명이 참여한 공공 안전 정책 토론을, UNDP와는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청년 의견 수렴을 진행했다. 또한 독일의 정책 플랫폼 구축, 영국의 데이터 기반 정치 캠페인 등 다양한 규모와 주제의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며, AI를 활용한 시민 참여형 의사결정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CompDem의 미래와 Pol.is의 발전 방향을 논하기 위해서는 먼저 AI 산업이 겪고 있는 근본적인 변화를 이해해야 한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AI 산업의 두 가지 큰 변화다. 하나는 OpenAI, Anthropic과 같은 거대 AI 기업들이 주도하는 기초 모델의 발전이고, 다른 하나는 이를 기반으로 한 특화된 AI 애플리케이션의 폭발적 증가다.
CompDem이 직면한 도전은 단순한 기술 경쟁의 차원을 넘어선다. CompDem은 비영리 조직으로서 그 존재의 의미가 사회적 가치 창출에 있다. 영리기업이 수익성으로 생존을 판단한다면, CompDem에게 있어 생존이란 사회가 필요로 하는 본질적 가치를 지속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현재 AI 산업의 변화는 이러한 CompDem의 가치 제공 능력을 근본적으로 위협하고 있다.
거대 AI 기업들의 언어 모델은 이미 뛰어난 수준의 자연어 이해와 처리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복잡한 맥락을 이해하고, 다양한 관점을 분석하며, 심지어 합리적인 결론도 도출해낼 수 있다. 더구나 이러한 기초 모델들은 API를 통해 쉽게 접근할 수 있어, 많은 개발자들이 이를 활용해 특화된 애플리케이션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는 Pol.is의 핵심 기능인 의견 군집화와 합의점 도출 같은 기능들도 이제 누구나 쉽게 구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민주적 의사결정의 영역은 단순한 기술적 역량 이상을 요구한다. 대만의 우버 규제 사례를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를 명확히 알 수 있다. Pol.is는 시민들의 다양한 의견을 수집하고 군집화하여 주요 쟁점과 입장 차이를 시각화하는 도구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그것은 시작점에 불과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서 축적된 데이터와 경험이었다. 어떤 유형의 갈등이 어떤 방식으로 해결되었는지, 어떤 중재 방식이 효과적이었는지, 어떤 형태의 합의가 지속가능했는지에 대한 풍부한 실제 사례들이 쌓여갔다. 이러한 실질적인 경험의 축적이야말로 단순한 기술을 넘어서는 민주적 의사결정의 핵심 자산이었다.
이러한 깊이 있는 도메인 지식과 실제 경험은 거대 AI 기업들의 범용 모델이 쉽게 따라올 수 없는 영역이다. 여기에 더해, 민주적 의사결정은 본질적으로 참여자들 간의 신뢰와 정당성에 기반을 둔다. 이는 단순한 기술적 우수성만으로는 확보할 수 없는 가치다. 지난 10년간 전 세계 다양한 프로젝트를 통해 쌓아온 신뢰와 정당성은 그 자체로 귀중한 자산이다.
결과적으로, 지금까지 확보된 깊이 있는 도메인 지식과 신뢰는 CompDem의 비영리적 특성과 만나 특별한 기회를 창출한다. 민주적 의사결정은 본질적으로 사회 전체의 합의와 조정을 필요로 하는 공적 영역이다. 따라서 이 분야의 표준을 정립하는 일은 특정 기업의 이해관계로부터 독립적이어야 하며, 모든 참여자의 이익을 공정하게 고려할 수 있어야 한다. CompDem은 수익 극대화의 압박에서 자유로운 비영리기관으로서, 축적된 전문성과 신뢰를 바탕으로 이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독보적인 위치에 있다. 특히 현대 사회가 직면한 기후변화, AI 거버넌스와 같은 초국가적 문제들은 이러한 공정하고 표준화된 의사결정 체계를 더욱 절실히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CompDem은 이제 단순한 플랫폼 제공자를 넘어, 민주적 의사결정의 새로운 표준을 정립하는 프로토콜 제공자로 진화할 수 있는 시점에 와 있다.
이러한 상황 인식을 바탕으로, CompDem은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한 시점에 와 있다. 지금까지 CompDem은 Pol.is라는 의견 수렴 도구를 제공하는 역할에 주력해왔다. 하지만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민주적 의사결정을 위한 포괄적인 표준 체계를 만드는 조직으로 진화해야 한다. 이는 마치 이메일 시스템을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쉽다. 오늘날 전 세계 누구나 서로 다른 이메일 서비스를 사용하면서도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는 것은 SMTP라는 표준화된 프로토콜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민주적 의사결정에도 이와 같은 보편적인 규칙과 절차의 체계가 필요하다. 이는 단순히 기술적인 규격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 참여부터 합의 도출까지 전체 과정에서 지켜야 할 원칙과 절차를 체계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표준이 있어야만 다양한 상황에서도 효과적인 민주적 의사결정이 가능해질 것이다.
CompDem이 이러한 프로토콜로 나아가는 과정은 단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첫 단계에서는 CompDem이 가진 가장 큰 강점인 실제 경험과 데이터를 체계화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지난 10년간 전 세계에서 진행된 프로젝트들의 성공과 실패 사례를 심층 분석하고, 여기서 도출된 인사이트를 구조화된 지식으로 정리해야 한다. 예를 들어 오스트리아의 기후 정책 논의에서 5,000명 이상의 시민이 참여했을 때 발견된 의견 수렴 패턴, 우루과이의 공공 안전 정책 토론에서 16,000명의 시민들이 보여준 합의 형성 과정의 특징들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정리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지역별, 이슈별 특수성을 포착해야 하는 것이다. 같은 우버 규제 문제라도 대만과 미국에서는 매우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또한 교통 정책과 환경 정책에서는 서로 다른 의사결정 패턴이 나타났다. 이러한 차이점과 공통점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단순한 기술적 분류를 넘어, 각 상황에서 작동한 사회문화적 맥락까지 포함하는 포괄적인 분석이어야 한다.
이렇게 축적된 지식을 바탕으로, 두 번째 단계에서는 실제 프로토콜의 설계와 구현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는 단순히 기술적인 방법을 정하는 것을 넘어, 민주적 의사결정의 품질을 보장하는 포괄적인 프레임워크여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이슈에 대해 시민 참여 과정을 시작할 때, 참여자의 대표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 소수자의 의견은 어떻게 보호할 것인지, 논의 과정의 투명성은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 등에 대한 구체적인 기준과 절차가 포함되어야 한다.
또한 이 단계에서는 다른 플랫폼들과의 상호운용성을 보장하는 것이 중요하다. 현대 사회의 의사결정은 단일 플랫폼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도시 계획을 논의할 때, 인구통계 정보, 환경 영향 평가 등 다양한 외부 데이터와의 연계가 필요하다. 따라서 프로토콜은 이러한 다양한 데이터 소스와 원활하게 통합될 수 있는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
세 번째 단계는 이렇게 개발된 프로토콜을 중심으로 건강한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기술적인 표준을 공유하는 것을 넘어, 민주적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모든 이해관계자들이 함께 발전시켜 나가는 살아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정부 기관, 시민사회 단체, 학계, 기술 커뮤니티가 각자의 관점에서 프로토콜을 검증하고 개선하는 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변화는 CompDem에게 실존적 위협을 기회로 전환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거대 AI 기업들이 제공하는 강력한 기초 모델은 오히려 이러한 프로토콜 위에서 더 효과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GPT와 같은 모델은 프로토콜이 정한 규칙과 절차에 따라 의견을 분석하고 정리하는 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 이는 마치 웹브라우저들이 HTTP 프로토콜 위에서 작동하면서도 각자의 방식으로 혁신을 이뤄내는 것과 같은 원리다.
실제로 이러한 가능성은 CompDem과 Anthropic의 최근 협력 연구에서 잘 드러났다. 거대 AI 기업의 기술력과 CompDem이 축적해온 민주적 의사결정에 대한 전문성이 만나 새로운 시너지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거대 AI 기업들과 민주주의 기술 플랫폼이 서로의 강점을 살리며 협력할 수 있다는 실질적인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결국 이는 단순한 생존 전략을 넘어, AI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민주주의 인프라를 구축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CompDem은 이를 통해 민주주의의 미래를 설계하는 핵심 주체로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갈 것이다.
연세대 경제학부 하성욱
ha100ha@yonsei.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