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여행(포르투갈-스페인)
스페인에 발을 들인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여행 시작한 지 열흘이 넘어가고
전체 여정 반을 조금 지난 시점에
우리는 녹초가 됐다.
008. 론다론다론다
나이가 들면 체력의 총량을
어느 정도 가늠하며 살아가게 된다.
아무것도 모른 채 객기를 부려도
다음날이면 오뚜기마냥 벌떡벌떡 일어나던
그 옛날 옛적 성능과는 다르기에
체력 감지는
어쩌면 가장 중요한 생존본능인 것이다.
여행 시작 전부터,
중간 지점 '론다Ronda'에서는
무조건 휴식을 하기로 계획했다.
이미 약 열흘 동안
연식에 맞지 않는 숙소들을 전전한 덕에
숙면이라는 것에서 멀어지고 있었고,
독립된 화장실을 맘껏 쓰는 게 간절해졌다.
과거 청사 건물이었던 곳을
개조해 만든 국영 호텔에 입성하자
파르르 대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우리에겐 이 호텔이 엔진오일이었다.
없을 때 소중함을 안다더니
그렇게 무난한 (투박하기에 가까운)
호텔방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우리만의 숙소에서 쩌렁쩌렁 자유롭게 빙빙 도니
독립된 공간이 주는 소중함을 새삼 깨달았다.
마음대로 보내는 하루를 허락한 스스로가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딱히 목적지 없이 설렁 설렁 거니는 골목은
마음이 편해서인지 다 평화롭게 느껴졌고
론다는 그 휴식을 만끽하기에 완벽한 마을이었다.
여행이 이쯤 되니 강제적 외식도 지겨웠다.
(메뉴판 정독하고 주문하고 결제하는 게 지겨워질 줄이야...)
긴장의 연속이던 여행을 잠시 내려두고
원 없이 널브러져 있고 싶었던 우리는
론다산 와인, 가게에서 직접 만든 치즈와 하몽,
집에서 공수해 아끼고 아껴온 컵라면, 누룽지와 김치를
호텔 방 탁자에 우리의 몸처럼 풀어헤쳤다.
욕조에 뜨듯하게 몸을 데우고 저녁상을 맞이하니,
행복이 이거구나 싶었다.
뭐든 '적당히'를 모르는 변태 자매는
스파르타 여행을 자기합리화로 마무리했다.
누에보 다리 야경을 배경 삼아 와인을 홀짝이니
유럽판 신선놀음이 여기 있었다.
머리를 비우니 지난 여정을 돌이켜볼 여유가 생겼고
비워진 와인잔만큼 추억거리는 늘어났다.
"거기 에그타르트 진짜 맛있었지!"
"그 에어비앤비 위치 하나는 기가 막혔어."
"파두랑 그 좁은 골목이 계속 생각나더라."
"우리 마그넷 샀던 그 시장 이름이 뭐였지?"
시간은 부족하고 봐야 할 것들은 많은 유럽에서
여유로움을 찾는다는 게 어불성설일 수 있지만
전쟁 같았던 평일 뒤에 휴전 같은 주말이 있듯이
몰아치는 여행 중간에도 쉼표는 필요하다.
관광이랄 것이 딱히 없었던 론다에 대한 기억이
자매의 머릿속에 깊이 박혀있는 이유 역시 그 때문이다.
행복한 쉼표를 준 공간이었다.
"론다 떠나기 싫어!!!"
물론 변태같이 극과 극을 달리고 싶다면,
휴식 직후에 훈련 같은 여행을 이어서 하면 된다.
(말리지는 않겠다.)
메아리치는 동생의 목소리와 함께
그렇게 꿈같던 론다의 하루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저물어갔다.
계획한 대로 가장 완벽하게 흘러간 하루였다.
포스여행
8화 끝 :)
© 빛정, bitj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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